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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May 22. 2020

선의에 대하여

최근에 집에서 차로 오 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 있는 비밀의 숲을 알게 되었다. 

명성은커녕 소문도 없이 조용하게 존재하는 숲이었다. 

지인들과 점심을 먹고 좀 걷자는 이야기에 어디 새로운 곳 없냐고 했더니 한사람이 자기가 아는 자그마한 숲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는 교회가 있는데 그 뒷산에 예수님의 행적과 함께 펼쳐지는 기도 길도 있다고,

 숲이라 하면 이성을 상실(?)하는 사람이라 아니 가까운 곳에 그런 숲이 있느냐는 호들갑스러운 반응으로 우리는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아파트 사이의 좁은 길을 올라가니 넓지 않는 입구에 철망으로 되어 있는 문이 높다랗게 자리하고 교회 팻말이 보였다. 

아무도 그 안에 숲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입구였다. 

추측컨대 교회 명패와 철망 문은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가볍게 스쳐가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비밀의 숲이 되었을 것이다. 

철망문 한쪽이 열려 있었고 그 문을 들어서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꽤 넓은 찻길인데도 도열하듯 서있는 벚나무의 그늘이 벌써 울울했다. 

인조잔디가 멋지게 깔린 야구장과 축구장이 시원스레 펼쳐지고 교회는 그들을 지나 높은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예배당은 배민수목사의 기념관도 겸하고 있었다. 당연히 코로나여파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오월의 싱그러운 햇살이 가득한 날이었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숲길은 적막해서 깊어보였고 고요해서 아름다웠다. 

산길 옆쪽으로는 작은 열매가 맺힌 매화나무가 꽤 있어서 이곳이 원래 농원이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아

카시 꽃이 한껏 피어나 이곳저곳에서 향기가 뿜어져 오니 천상의 회원이 됐다. 

비아도로사에서 유래한 그림과 말씀 묵상 길이었다. 그림은 간결해서 어떤 설교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탄생, 세례 받으심과 제자를 부르심,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나병환자를 고치고 베드로를 건지심, 

가나안 여자의 믿음과 세족식, 겟세마네 기도와 십자가에 달리심, 부활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등이 말씀과 함께 있었다. 

마지막 제자들에게(나에게) 하신 말씀.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얼마나 크고 깊은 위로인가.

 말씀이 주는 평안과 숲이 주는 위로가 함께 하는 곳. 

이즈음 그곳을 자주 간다. 

바로 곁에 안곡습지라는 큰 공원이 있고 고봉산과 이어져 있는데도 그렇게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경이롭다. 

그러다 보니 배민수목사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 폭풍 검색을 했고

 <선의>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배민수목사의 부친은 나라 사랑하라는 유언을 남긴 독립 운동가였다. 

배목사도 교도소까지 다녀온 독립운동가로 미국 유학 후 목사 안수를 받고 장로교 총회 농어촌부 초대 총무를 역임한 목사다.

 농민학교를 세우고 ’농민생활‘이라는 잡지도 간행하면서 어려웠던 시절 농민의 삶을 개량하려고 노력했는데 그의 ’삼애정신은 하나님 사랑 농촌사랑 노동사랑이다. 1967년에 일산에 삼애농업기술학원이라는 공동체를 설립해 농업을 가르쳤다. 

1976년에 배민수 목사가 별세한 후 그의 유족들은 재단법인 삼애농업기술학원과 법인에 속한 일체의 재산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면서

 약 5만 5천평 규모의 연세삼애 캠퍼스가 조성되었다. 

1980년에 배민수기념관과 천문대를 건립하였고 2000년에 체육시설을 조성하였으며, 2006년에는 배민수 기념관에 삼애교회를 창립하였다. 

놀랍게도 최근 이 비밀의 정원에 ‘영구적인 교육 및 학술기금 확보’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건설 추진 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연세삼애 캠퍼스는 나 같은 문외한의 눈으로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지 못하는 듯 했다. 

야구장이나 축구장은 볼 때 마다 텅 비어 있었고 아는 사람 소수의 놀이터였다. 

기증의 목적인 농촌사랑이나 노동 사랑을 위해서도 도심 귀퉁이에서 원활하게 이루어갈 방법이 없어보였다. 

무엇보다 농업과 노동에 대한 개념이나 그 방법이 너무 달라진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현재 무용지물인 이 땅을 이용해서 교육이나 후학을 위한 기금을 마련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에 매우 걸맞은 사용법이 아닐까, 

이 내용에 대해 장로교 총회에서는 

"아파트 건설은 배 목사님의 유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면서 "삼애농업기술학교와 농업개발원 졸업생들도 반대하고 있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런 사안을 접한 중산마을 사람들은 이 좁아터진 땅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면 더욱 지옥길이 될 거라고 

하나님의 뜻을 심고 있는 연세대가 그래서야 되나...하며 아직 시작되지도 않는 일에 반대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 사랑 농촌 사랑 노동 사랑이란 뜻 아래 기증된 <선의>를 어떻게 해야 이룰 수 있을까, 


이젠 아무도 푸나무를 생명이 없는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식물의 세계에 조금만 들어서면 식물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눈물겨운 일이 많다. 반려식물이라는 단어도 낯설지 않다. 

이즈음 가까운 정발산에 가면 백당나무 꽃이 피어있다. 

실제 꽃은 꽃 같지도 않는 동그란 알갱이 모습인데 그런 자신을 잘도 알아서

 나비와 벌을 모으기 위하여 주변에 헛꽃ㅡ낭화浪花라고도 한다, 물방울 낭浪이다)ㅡ인 하얀 꽃잎들을 만들어낸다. 

벌과 나비는 이런 헛꽃을 보고 달려들고 이 찬스에 백당나무는 수정을 한다. 

이런 헛꽃의 모습을 탐내서 생식을 못하는 꽃잎만 가득 피어나게 한 꽃이 불두화이다. 

전라도에서는 밥티꽃이라고 불렀다.(기억이 합해져서 그런지 밥티꽃 참 어여쁘다) 

산수국도 마찬가지다.

 이런 헛꽃은 꽃이 수정을 하고나면 몸을 푹 꺾어 버린다. 소임을 다했다는 듯이, 

다래나무는 한 수 더 뜬다. 

무성한 잎 아래로 꽃이 피어난다. 이파리에 가려서 꽃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가래나무 이파리는 자신이 꽃처럼 하얗게 변해서 벌과 나비를 불러 모은다. 

아주 오래 전 엄마 텃밭에서 엄마가 가르쳐 주신 이야기 하나 

“ 아야, 이 풀 봐라, 이것이 봄에는 엄청 크게 자란 뒤에서야 꽃을 핀디 이라고 늦은 가을에 나오믄 땅에서 솟아나자말자 꽃을 피어야, 

살날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아는 거제, 그래서 얼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하는 거여.”

눈물겹지 않은가, 


사람들 사이의 <선의>는 그 단어가 지닌 아름다움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관계> 속에서 무수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동편의 선의는 서편에서 보면 악의가 될 수 있다. 

시작은 선의 였다 할지라도 그 끝도 선의 일 수는 없다.

 당연히 나의 선의가 타인의  선의와 합일하기는 어려운 시절이다.  

이 무서운 자본주의 시대에 선의라는 게 과연 있을까, 

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하면서 기도길을 걸으며 중얼거렸다.

“나무들아, 이 땅에서 오래 산 너희들이 이 땅의 주인이란 것을 나는 안단다.” 


                   기도길 사계 사진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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