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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l 12. 2020

죽음앞에서

조그마한 소리로

그제 오후 네시쯤 강화로 출발했다. 강화의 남쪽을 자주 가게 되는데 올만에 지인의 소개로 북쪽을 갔다.

 월곶月串이다. 곶串자 한문이 이상해서 만든 단언가...했는데 아니었다. 

곶은 바다 쪽으로 땅이 튀어나온 곳을 말한다. 

달 떠오르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라 하니 언젠가 더 느긋하게 가서 

달뜨는 풍경을 바라볼 일이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물길 모양이 제비꼬리와 비슷해 

연미정이라 이름붙인 정자가 있었는데 1500년경에 만들었다니 아주 오랜 자리다. 

공간 개념이 없어서 제비꼬리는 잘 모르겠지만 강건너 쪽으로 북한이 손에 잡힐 듯 보이니 그냥 괜시리 아이고~ 해진다. 

돈대 아래 설명글에서 오래된 두 그루 느티나무가 있다 해서 기대를 하며 올라왔는데 한그루밖에 없었다. 

세상에, 한그루는 작년 가을 태풍에 쓰러져서 참혹한 자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쓰러진 나무의 뿌리를 살펴보다가 가슴이 먹먹해왔다. 얼마나 넓게 자리를 잡았는지, 상기도 얼마나 강인해 보이는지,

죽음은 도처에 흔하다. 오래 산 그대라 해서 죽음이 찾아들지 않겠는가,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는데 티비에서 박원순 시장의 자취를 찾고 있었다. 

약간 서늘했다. 저녁을 먹고 저물어가는 햇살과 전깃불이 반반 어우러진 카페로 들어선다. 

방직공장을 개조한 카페다. 

난삽한가 했지만 그 난삽함을 화장실이 다 지워버렸다. 

이제까지 바라본 어떤 화장실보다 아름답고 그윽했다. 

변기 하나를 품은 곳 치곤 지나치게 넓었고 하늘이 뚫려 있었고 

난화분과 피아노 위의 인형들..기타등등 무엇보다 허투루 버리지 않는 그 심성이 고와보였다. 

세련됨보다 더 아름다웠다. 


새벽 두 시에 잠이 깼다. 흔한 일이다. 한두 시간 잠을 잤나...하면 깬다. 

웨더퐁을 누르고 비가 오는지 확인하고 다음 뉴스를 봤다.

 그랬구나 결국~

잠이 올 리 없었다. 일면식도 없는 관계지만 살짝 그의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육십이 넘으면 에너지가 적어진다. 

익숙한 일들은 처리할 수 있지만 무거운 일들 앞에 서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가족에게는 뭐라 할 것인가, 

수많은 사람의 난도질을 어떻게 견뎌낼까, 

이제까지 도전만으로 점철된 인생이다. 숨고 싶다. 

그리고 이제 지겹다. 이기려고 살려고 해온 모든 일들이 부질없다. 

변명을 해도 순응하며 고개를 숙인다 해도 그 수많은 손가락질

(그러고보니 정말 우리가 인터넷으로 하는 모든 일들이 손가락질이다)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 

한 번쯤 비겁해도 되지 않을까, 도망가도 되지 않을까, 

사자에게 죽음은 삶의 구원일 수 있다. 

떠나고 사라져 버리고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버린다.  

모든 남는 자에게는 더할 수 없는 상실이다. 

큰오빠 갑자기 돌아가시고 난 후 마음속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일상이라는 엷은 그물박이 쳐져 있어 잠시 잊기도 하나. 

어느 순간 그 사이로 갑자기 난데없이 차디찬 바람이 가득 들어찬다. 

인생이 갑자기 서늘해진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집에서도 두 가지 색채가 선연하다.

아니 그렇게 가버리면 신고한 사람이 살인자가 되잖아. 그걸 노린 걸까? 비겁한 죽음이야.

삼선을 했는데도 저리 가난한 것은 그 삶이 정직한 빙증이야. 흠 없는 사람이 어딨겠나,

딸은 아빠가 올드해서 성인지 감수성 부족이라 하고 

아빠는 사람을 생각한다고 했다. . 

나는 가만히 있었다. 

둘 다 옳았는데 그들의 옳음은 세대를 나타내고 있었다. 

굳이 변명을 하지치면

조양방직 카페에서 오래된 사진을 보았는데 옷을 다 벗기고 자랑스럽게 고추를 드러낸 

백일사진이 있었다. 

죽음앞에서 조그맣게  중얼거릴 수는 있을것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아왔다. 

시대시대시대 시대속 구조주의 희생자 

여자 사람에 대한 존중을 배우지 못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

인내도 배울 수 없어서.....



하이데거에 대한 강연을 들었는데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새로운 철학 사조를 일으킨 사람이고

 그가 쓴 존재와 시간은 철학서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책(나는 결국 드문드문 읽어낼 수밖에 없었지만)이지만 

그가 나치에게 협력한 것은 중대한 흠결이었다.

하이데거를 전공한 교수도 질문을 하며 그의 흠결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강연한 교수는 시대를 이야기했다. 

그가 나치 시대에 총장을 하고 히틀러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의 글 어디에서도 유대인 학살에 이야기나 동조는 찾아볼 수 없다. 

하이데거는 유대인을 싫어하기는 했다. 

그가 부임한 대학에서 처음에는 의대 교수 중 유대인 의사가 두 명이었는데 몇 년 후 대부분이 다 유대인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그는 그런 유대인이 싫다는 이야기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서보면 히틀러가 나타나 정말로 정치로 독일을 구했고 

만약에 이차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히틀러는 훌륭한 정치인으로 회자 되었을 거라고, 

그런 시절에 하이데거도 히틀러에 대한 기대심리가 있었을거라고, 


나는 그 강연을 들으며 당연히 우리나라를 생각했다. 

이런 극단적인 파벌이 존재하는 세상, 니편 내편이 갈라지고,

이미 진보도 보수도 아닌 무수한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은 진보 보수라는 생각을 하는 채

이념도 없으면서 (굳이 이념이란 것이 있다면 경제 이념과 이익 이념 정도라고나 할까)

이런 시대에 어느 쪽에 선들 반대쪽 사람은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우리 역시 나치시대에 살았더라면 하이데거가 되지 않았을까, 

아 당신은 야스퍼스일까? 

그가 나치에 협력했다고 해서 그의 인격도 형편없고 

그의 사상도 폄훼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 한다.

그렇다고 하이데게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겠지만 

맥락을 통한 이해는 필요하지 않을까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이가 든 사람은 

성인지 감수성보다는 맥락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은 게 아닐까, 


명필름 아트에서 밤쉘을 봤다. 

올만에 보는 영화관에서의 영화, 마치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설렜다.

소수의 용감한자들이 타성을 벗어나고 

그 용감한 자들에 의해서 세상이 달라진다는 주제도 명징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즉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눈을 감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권력은 그런 그들의 약점을 잡고 하수인으로 사용하고

그리고 아마 그 대다수 속에 당연히 나도 속할 것이다.

도대체 성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오직 두종류 여자 남자밖에 없는데

성은 어찌 저리 다르단 말인고, 

로저는 오거돈이고  안희정이고 박원순이었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니코프가 꿈을 꾼다.

신종 섬모충이 나타나는데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누구나 자신만이 옳은 사람이 된다. 

그러니 선악이 없어지고 사람들은 증오 속에서 서로를 죽이기 시작한다. 

사람이 신이 되는 인신 바이러스,

라스콜리니코프는 이 꿈을 꾼 후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되는데

현재 우리는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아닌가, 


벌써 칠월이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세월 빠르다. 


                      사진은 세 장 다 빌려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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