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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l 15. 2020

개망초

해가 저물 무렵 나뭇잎들은 어둠의 빛을 슬며시 몸에 지니면서 짙어진다.

아니겠지만 문득 궁금하다. 

햇살보다 어둠은 더 무거울까?

짙음은 무거움일까?

그래선지 해 저물 무렵 나뭇잎들은 낮보다 더 침잠에 빠져 보이는 걸까, 

아직 거리의 가로등이 켜지기 전 

그러나 햇살은 저 산 너머 다른 동네로 넘어가 버리고

어둠의 기운이 살짝 밴 나뭇잎들은 분명 다르다.  

그들도 사람처럼 밤이 선생일지도 모른다. 

어둠이 깊어지고 밤이 되면 조용한 사위 가운데서 풀의 생에 대해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 동네 기찻길 옆 산책로에는 개망초가 가득가득 피어났다. 

워낙 많아서 오래오래 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피고지고다.  

개망초는 북아메리카 산이다. 

가난한 나라를 돕는 외국 곡식 속에 묻혀왔다는 설도 있고 

1897년 경인선 철도를 만들 때 침목에 따라와서 기찻길 옆에서 만발했다는 설도 있다.

그때가 조선 왕조가 와해될 무렵이어서 망국초 망초라고 했다는 말도 있지만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웬수 같은 풀이어서 망초 개망초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얼마나 생명력이 가득하면 망할 풀에 개까지 넣었을까,


아무려면 어떤가, 

이제는 외래종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만치 우리 산야의 식물이 되어

고향의 정취를 아련하게 자아내는 풀이 되었다.      

땅이라면 어디나 제일 먼저 자리 잡는 잡초 중의 잡초이다.

그러나 땅 없는 도시에 살아보라, 하다못해 산책로도 땅이 아니다. 

가공된 폐타이어를 가공해서 땅 위에 깔려있다. 

폭신거리고 먼지도 없고 땅이 쓸리거나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 

편리하지만 가끔 도시의 땅이 호흡곤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땅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 무수한 생명을 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죽은 것이 새로운 생명을 내어줄 수는 없다. 

그러니 대지는 살아있고 살아 있을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명줄이다.

그런 땅이 호흡을 해야하는데 

호흡은커녕 도시의 땅은 무거운 짐을 가득 진 채 움직일 여력도 없다. 

도시의 땅이 숨 쉴 곳은 겨우 숲이거나 자그마한 화단뿐이다.

우리 동네 기찻길 옆으로 숲이라기에는 빈약하지만 

그래도 눈을 쉴 수 있는 나무들이 심겨 있고 그 사이로 난 길이 나의 산책로다,.    

 

풀이지만 개망초는 키가 제법 크다.

작지만 꽃송이도 많고 큰 키 위로 피어나기 때문에 여백이 느껴진다. 
해가 저물어가니 어두워지는 사이로 개망초 하얀빛이 더욱 눈부시다. 

도심 어디에서 이런 자연스러운 꽃을 대할 수 있으랴,

개망초는 새들의 보금자리 역할도 한다고 했는데 

정말 참새들이 나무 위에서 휘익 개망초 꽃들로 내려와 앉기도 한다.

무거워~ 꽃대는 휙 꺽이나 부러지지는 않는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세상에 입을 쉬지 않고 쫑알거리며 참새가 

소리를? 울음을? 웃음을? 짝을 부르는? 소리를 낸다.

분명코 짹짹은 아니다. 

미묘한...공간을 가르는 소리다. 

참새 속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참새가 입을 움직일 때 공간을 가르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공간에는 소리가 차 있고 그 공간에 길이 생길 때 소리가 다가오는 게 아닌가,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 서서야 자기를 위한 존재들로 여겼던 아내와 딸을 

그들의 존재로 인식하며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랑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즉 죽음 앞의 허무도 이기게 된다. 

대개의 사람들이 타인의 죽음을 보며 

자신은 죽지 않았다고, 죽은 것은 그라며 죽음에서 도피하지만 

죽음을 자각하며 죽음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을 하이데거는 ‘선구’라고 했다. 

불안의 시간이지만 세상의 굴레에서 자유로워 지는 것이고 

그 때가 자신의 존재를 직면하게 된다는 것,

하이데거는 존재를  비본질적 존재와 본질적 존재로 나누었는데 비본질적 행위로 우리는 인생의 태반을 살아가고 있지만, 본질적 존재는 오직 죽음 앞에서 혹은 죽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존재한다고 했다.

그의 ‘존재와 시간’을 읽으며 시간에 대한 개념은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존재에 대한 개념은 안개처럼 다가왔다.       

가령 그는 소소한 것들이 지닌 존재에 대한 놀라움을 ‘경이’라고 했는데

‘경이’를 느끼는 것도 본질적인 삶을 사는거라고 했다.      



해저물 무렵 

개망초 주변으로 살짝 어둠이 깃들면 개망초 하얀 꽃은 그 어둠을 배경으로 더욱 환해진다.

경이로운 개망초.


      



가끔 이런 연한 보랏빛 개망초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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