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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Feb 27. 2021

은선생

괴물

 


(쓸데없이 글이 길어요.)

네이버에 있어요. 열린 연단이라고, 나의 걷기 벗이죠. 

오래전에 사놓은 소리 좋은 헤드폰을 끼고 걸어요. 

네, 좀 나이에 맞질 않죠. 그런데 그러면 좀 안 되나요? 

이제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남의 시선에 나를 맞추며 살아왔는데

나이 든 아줌마가 젊은 애들처럼 헤드폰을 끼고 걷는다고 해서 젊은 척하세요? 거슬려요? 

근데 이것도 사실 제 생각이에요.

 수년 전부터 느낀 것은 이제 사람들이 나를 별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특히 젊은이들은 말이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 할아버지 할머니 들예요. 

나이가 들면 너무 눈부신 젊은이들이 예뻐서 바라보려면 제법 에너지가 드니까

편한 또래의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는 거죠.

그러니 괜찮아요. 

걷기를 무척 싫어하는 사람인데, 강의 듣는 맛으로 걸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래서 데이터도 무한대의 것을 써요. 

강의 한번 들으면 데이터가 뭉텅뭉텅 들거든요. 

삼 년 정도 된 것 같아요. 들으며 걷는지가,

그래서 관심 있는 분야는 거의 다 들었고요 다시 처음부터 또 골라가며 듣고 있죠.

한 달에 한 번씩 새로운 강의가 올라오기도 하고요. 

이거야 말로 스트리트 스마트 아닌가요? ㅋㅋ

저야 물론 초등학교도 못 나온 울 엄마의 지적 수준을 인정하는 편이라 

북스 마트보다는 스트리트 스마트에 점수를 주는 편이죠. 

강의가 좋거나 기억할 게 있으면 다시 본문을 꼼꼼히 읽어요.

그렇다고 아무 데나 적용할 수 있는 실력이 느느냐 하면 그건 아녜요.

그런 말 있잖아요.

 어릴 때 공부는 돌에 새긴 거라면 늙어서 공부는 얼음에 새기는 거라고,  

그러니 날마다 얼음에 새기기는 하는데 해는 날마다 떠올라서 ㅋㅋ 

사라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요.  


그런 생각은 해요. 

특별히 지적인 사람들 빼고 평범한 사람 치고는 독서를 제법 하는 편이라고

ㅡ이제 나이가 드니 이런 것도 뭐 자랑처럼 여겨지지는 않아요. 그냥 솔직하다고나 할까ㅡ  

근데 그저 그게 순간을 즐기는 거예요.

손에 가둔 물처럼 빠져나가요. 디지털 치매일 수도 있어요.   

애니웨이, 제가 그렇게 만나는 사람마다 네이버 열린 연단을 전도하는데도 

사람들이 잘 안 듣더라고요. 

그러니 나에게만 그리 좋은가 봐요.

우리가 정지용이 향수를 거의 모두 좋아하잖아요.? 아닌가? ㅎㅎ

그래서 나는 그 시를 다 안다고 생각했거든요.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

이 부분을 전깃불이 없는 호롱불 창문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한 거예요.

나보다 훨 더 나이 많으신 유종호 선생이 해석을 하신 거죠.

이런 시도 이제 우리 아이 들 때에 가면 아득한 역사 서사로 남을 거 같아요. 

귀밑머리를 알겠어요, 불 없는 밤의 깜깜한 어둠을 알겠어요.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초적녁 별자리... 한밤 별자리가 다르니 

금모래를 흘리는 은하수가 아닌가, 유 선생이 짐작한다고 하더군요. 

이런 모르는 이야기 너무 재미있지 않나요?    


김우창 선생의 미당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다시 글을 읽었어요.

그러다가 댓글까지 보게 되었죠.     

일제 강점기 때의 처신과 시의 향방을 묻는 이야기들이 많더군요. 

단순 정리해보면 삶과 문학이 되겠지요.

아무리 아름다운 시를 써도 그 삶이 해바라기라면.... 전두환 생일 때 찬가를 썼다니......

일제 강점기는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전두환은 아니죠, 맛이 팍 가더군요.

미당 선생한테

그러다가 댓글 속에서 고은이 쓴 미당 담론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사실 가끔 은 선생이 궁금했거든요. 

아내와 딸과 함께 여전히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을까?

설령 남편이 좀 바람둥이려니,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 그러려니, 막연했을 때와 

사람들 앞에서 고추를 흔들고 자위를 했다니,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알게 그렇게 큰 우세를 당했을 때, 

아내가 겪은 그 창피는 어떨까, 딸은 아비를 어떻게 생각할까,

천박한 호기심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때 최영미의 새 시집도 샀거든요. 격려 차원으로요.    

 

미당 담론을 찾아봤더니 있더군요. 

사십여 년 전 글인데요.

이럴 때 엄청 인터넷이 좋아요. 사랑스럽기까지 하다니까요. 

고은이 쓴 미당 담론, 

오메, 잘 썼더군요.

그 냥반 시보다 산문이 더 나아요.

미당의 시 자화상으로 미당을 칼로 난도질하더군요.        

아비는 종이 었다/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스/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볕이거나 그늘이거나/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처럼/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죄인 천치’는 탁월한 은유지만 강렬한 수사이지 자기 성찰이나

회개의 아픔에 다다르지 않는 추상이며 체질적인 자기 합리화가 시작된다고 하더군요. 

‘스물세 해 동안 바람’은 

60은 넘어야 할 나타날 탄식으로 언어 자체가 가지는 허상으로서의 감동 유발이다고 했어요..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이 대목은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을 말한다고요.     

미당이 죽고 49제 후 발표된 이 글은 그 시대와 맞물려  

미당의 주리를 틈과 동시에 고은에게는 더 확실한 발판을 마련해주었을까요,

고은은 <이상>에게도 음습한 주술이라 악평하며 이상의 여성 편력을 집중적으로 부각, 

그의 시 대부분이 성적인 의미가 담긴 섹스시라고 폄하했더군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어떤 의미에서 시가 아니며 시보다는 설명문이며 

모든 암시의 힘을 믿지 않는 사설체의 요설(饒舌)로 넘쳐흐르고 있다고 혹평을 했고요.      


이렇게 고은에 대해서 찾아보다가

이문열이 쓴 사로잡힌 악령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첫 출판을 하고 그다음에는 사라져 버린  글을 어느 블로그에서 읽은 거죠.  

그 글을 읽어보니 은 선생이 너무나 분명한 주인공,  

그 행태가 야비하기 그지없고 마음은 천박하기 이를 데 없어서

명사 사냥을 다니고 한번 만난 사람은 아예 절친이 되는 사깃군 언어

(그의 시어가 그런 곳에서 태어났을까요? 구정물에서 태어난 시어?)에 

유부녀는 간식?이고 문학을 사랑하는 여성들은... 그에게 한 끼 식사가 되었으니 

이문열의 책은 다음 판본부터 빠진 채 출판됩니다.

얼마나 은 선생의 혹은 그 주변의 힘이 거센지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사실 

 그 소설 속의 남자가 은선생이라는 것을 누구나 확실히 알게 하는 

그래서 읽어보니 너무나 연결이 잘 되는 거예요.

이러니까, 이래서, 이랬구나.

상식선에서 볼 때 그는 시인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요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죠. 

일반적으로 사람은 거의 보수 즉 바뀌기를 싫어한다고 해요.

뇌가 지닌 성향이 그렇다는군요. 

편안하면 편안한대로 안주를 즐겨하고

 힘든 사람은 너무나 삶에 에너지를 많이 소비해서 오히려 보수가 된다는 거예요.

 바꿀 에너지가 없어서 말이죠.           

은 선생에 대한 나무 위키를 보니, 

누가 기록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향한 적대적인 시선이 분명해 보이더군요......

자신을 위해주는 시인의 아내와 바람이 나고

(악령에서도 이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요) 

아이들과 남은 그 시인의 말로가 정말 풍비박산이 되었다는,

구체적으로 그 시인의 이름까지 회자되는 것을 보니 사실이겠지요.  

        

정치인들의 자식을 위한 태도나 집을 옮겨가며 돈을 버는 행태를 

쉽게 지적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저 자리에 있다면?’라는 내 질문에 ‘너는 더할 수도 있어’라는 내 대답 때문이에요.

하도 부자들은 더욱 부자를, 권력 쥔 사람들은 더욱 권력을 해서

왜 저럴까 했더니 

아이들 네 명에게 다 건물 한 채를 ~ 하면서 건물을 사모으는 부자 동생을 둔 친구가 그러더군요. 

‘네가 부자가 아니라서 부자 심리를 몰라서 그래.’ 

하긴 어찌 알겠습니까, 

꼴랑 살고 있는 집의 따뜻함 속에서 

소박한 음식에서 

봄이 오는 계절에서 , 

 겨울 소나무와 잣나무가 요즈음 얼마나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환희를 느끼는 

이 협량 한 의식으로 말이죠. 

경험해보지 않는 것은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인간에게 죽음은 영원한 관념이죠.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관념은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요.    

우리가 말하는 태반은 거의 경험해 보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상이 섹스 시를 썼다면 

은 선생은 섹스를 삶으로 체화한 건가요?

한용운의 시가 요설이라면 은 선생은 감언이설의 시일까요?

미당이 수치가 결여된 체질이라면

 은 선생이란 사람에게는 수치라는 덕목이 아예 존 재무일까요.  

“남자한테도 뽀뽀하는 천진한 분이고, 

옛날 윤리와 지금의 윤리는 다른데 작은 흠으로 거장을 매장시키면 안 된다"

이해는 할 수 있어요.

조국 내외도 자녀를 위한 일이니 그리고 조금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할 수 있죠.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처연한 아름다움에서  저항시인 민중시인 민족 시인의 이름까지 뒤집어쓴 은 선생.

누군가는 셀프 노벨상 천거라는 추론도 하더군요.        

제 책꽂이의 책에서 은 선생의 이름을 보면

남의 아픔을 생각하지 않는 시인의 모든 시는 가짜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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