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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May 17. 2021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윤금숙


잘츠부르크에서 은방울꽃을 보았다. 성당 안에 있는 묘지 앞이었다. 

오월 초 였는데 은방울 꽃이 가득 피어나 있었다. 

우리나라 은방울꽃과는 잎도 살짝 틀리고 꽃도 조금 더 컸다.

의외로 그곳 묘지에 은방울꽃이 많았다. 

서양에서는 은방울꽃으로 만든 부케를 사용한다는데 

반드시 행복할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묘지 앞 은방울꽃이 주는 느낌은 조금 달랐다. 

몇 년 전 재벌가와 아나운서의 결혼에서 

그들의 나이 차이나 재혼보다 

천만 원 짜리 은방울꽃 부케가 주인공으로 나섰다. 

나도 그 기사를 보며 

흠~ 천만 원짜리 부케라~~~ 흠흠~~을 했다. 


연천 화가 윤금숙 마당에는 그녀가 자신의 산에서 옮겨온 은방울꽃이 가득하다.

굵직한 초록 이파리들 사이사이에서 은방울꽃은 아래쪽에 살짝 피어난다.

관심이 없다면 잘 보이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신부의 부케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수줍고 고요한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이니 딱 새각시와 어울리는 ....

(이런, 이런 글은 내가 유명작가라면 쓸 수 없는 문장이다. 

페미니즘에 맞지 않는 글이기에 ㅎㅎ) 

은방울꽃 향기는 매우 그윽해서, 

그리고 그윽한 것들이 거의 그러하듯 작고 여려서 

그와 접선하려면 한껏 고개와 다리를 숙여야 한다. 

나는 가끔 이런 문장을 쓰다가 삶의 한 철칙을 생각해보는데 

우리가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접혀야 할 것들은 그런 작고 여린 것들이 아닐까, 

돈이나 힘이 아니라 아주 소소한 것들,

그런 소소함을 중요하게 보는 시선이 

우리의 삶을 보다 더 깊게 하는 것이 아닌지.... 


포천 국립수목원에도 야트막하고 가느다란 계곡 사이에 은방울꽃이 가득 심겨 있다.

그런데 연천화가댁 은방울꽃 이파리는 세상에 수목원 보다 더 크고 실하다. 

거름도 하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은방울꽃 이파리가 저리 풍성할 수 있을까,

꽃 못지 않아, 나도, 그 이파리들이 내게 말을 하는 듯 했다.

꽃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향기는 이상하게 사람을 피해 가는 듯한 느낌이 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면 그 향기를 혼자 맡기 아까웠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럴 것이다. 그렇고 말고, 

밤새 내 그 어둠 속에서 자유롭고 방만하게 은방울꽃은 얼마나 향기를 내뿜었을것인가,

향기의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른 아침 그 향기의 세상으로 성큼  들어섰을 것이고 

아, 모과꽃도 엄청 예뻤는데....

사라지고 없는 그 여린 분홍빛 꽃을 보았다. 고 생각했다. 

대신 보랏빛 붓꽃과 색색의 작약이 풍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작약과 붓꽃은 아주 어릴 때 봐온 꽃이다. 

‘아름다움’은 크고 풍성한 단어다. 

언제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자라고 성장하는, 

존재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 있는 나무라고나 할까,

그 나무의 이름을 인식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나무가 어리면 품도 작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게 된다. 

당연히 그가 느끼는 아름다움도 어리거나 보잘 것 없어서 

자신에게 유익한 존재만이 아름답다고 여길 것이다. 

삶이 여물어가듯 인식도 여물어지고 키가 자라나듯 성숙해가면서 

사람의 인식나무는 새로운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다. 

이쁨이나 젊음. 싱싱함 혹은 특별한 것들에서 느껴지던 

당연하고 익숙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에서 조금씩 그 부피와 깊이를 키우기 시작한다. 

사람을 봐도

 눈코입이 제자리에 뚜렷이 있고 

피부는 고우며 아프로디테처럼 얼굴의 면이 거의 없는 유약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세파에 흐트러지고 노동으로 햇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 

그 피부에 고통은 주름을 새기고 

가뭄에 갈라터진 논바닥처럼 무수한 면을 만들어가는 얼굴이 아름답다. 


신기하게도 그런 진짜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전혀 알지 못한다. 

약한 지력의 소유자들 역시 그런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어쩌면 깊은 인식의 소산물일 수도 있다.

인식은 삶을 이해하며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센서가 가동할 때 다가오는

 삶을 이해하는 키.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얼굴은 진짜 배우의 얼굴이다.

쓰리 빌보드에서의 그녀는 배우가 아니라 정말 엄마였다. 

모녀간의 싸움은 어디에서나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그런 싸움 끝에 딸이 죽는다면,....

사랑도 강인한 사람만이 하는 거라는 사실을 그녀는 온몸으로 말한다. 

 노매드 랜드에서도 그녀는 역시 배우가 아닌 펀이었다. 

펀은 로션이라도 바르나 싶게 습기 없는 사막처럼 거칠고 건조하다.

머리는 짧고 옷은 단순하다. 

주름은 깊다. 

그녀 얼굴의 주름은 자신이 살아왔던 신산스러운 삶의 길과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사람을 기대게 하는 품이 있으면서도 결국은 고독한 길로 나선다.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그녀의 삶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안정된 삶보다는 떠나는 혹은 홀로 있는 고독을 택한다. 

그녀가 오직 기대는 것은 사람의 품이 아니라 자연이다.

자연만이 그녀의 고독을 치유해줄 수 있다. 

그녀 아니고 누가 더 이상 편의 역할을 할수 있으랴. 


연천 화가댁의 작약은 지금 막 피기 시작했다. 

그늘 아래는 몽우리들이 살짝 오무려 있고 햇살 아래서는 활짝 피어났다.

살짝 꽃 이파리 하나를 만져본다. 

그 매끈함, 부드러움, 연약함,...등이 혼재해 있지만 담대하다. 

색은....흰빛도 아니고 핑크도 아니며 빨강도 아니고 자주도 아니다. 

아니 그 모든 것들이다.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하였다.” 

연천 화가, 윤금숙의 정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화된 <느낌적인 느낌>을 느꼈다. 

그녀는 하얀색 에이프런을 두르고 

화장 없는 얼굴에 화장 대신 환한 미소를 가득 띄운 채 우리를 맞아주었다.

육십 넘은 화장은 변장이라던가, 

그러니까 나는 변장을 한 채 자연스러운 그녀를 만나며 

노매드 랜드의 펀, 

자연으로 ,

고독의 길로 향하는 아름다운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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