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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ug 06. 2021

크레센도

서동시집 오케시트라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서동시집오케스트라 West-Eastern Divan Orchestra>의 베토벤 9번을 듣고 있다. 

화면을 보며 누가 팔레스타인이고 누가 유대인인지 살펴보지만, 알 수가 없다. 

그냥 음악에 빠져서 음악으로 들어간 음악인들이 있을 뿐이다. 

 서동시집은 괴테의 시집 제목이다. 

괴테가 이란의 시인 하피즈의 시를 읽고 그의 시에 반해서 서동시집을 펴냈다. 

“자신을 알고 다른 사람을 아는 이라면 알게 되리라. 

동방과 서방이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음을” 

괴테의 시다. 

유대인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함께 뜻을 모아 

서동시집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1999년 괴테 탄생 250주년 당시 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된 독일 바이마르에서 

이 오케스트라를 처음 결성했다. 

 지금도 여전히 아랍인 40% 유대인 40% 유럽인 20%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얼굴은 그 시대를 향하고 있고 다른 한 얼굴은 영원을 향하고 있죠.” 바렌보임의 말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태어난 나라 아르헨티나와 스페인 시민권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민권을 함께 보유한 첫 사람이기도 하다. 가히 코스모 폴리탄이다.

 

 에드워드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을 읽고 쓴 글을 찾아보니 작년 이 무렵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든 날 오르든 왕복 18KM의 백록담같은 글이라고 시작을 했다. 

     

글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언제나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나를 더듬거리게 하는 것이 좋다. 

너무나 우리 인생이 빤하니까

빤한 글자로 된 어떤 상태를 설명하는 

손에 잡히지 않는 저기 먼 지성의 상태를 바라보는 재미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되는 그 대목을 떠나기로 한다.

혹시 다음 길에서 우연히 깨달아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오 내가 쓴 글이지만 멋있네.ㅋ~

인정과 여유가 넘쳐나지 않는가, 솔직함도      


 <크레센도>는 극영화이지만 이런 팩트를 기반으로 한 영화이다. 

얼마나 조용하게 개봉을 했는지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가끔 드는 생각인데 꼭 봐야 할 책이나 영화라면 그들이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먼 곳에 있는 숲 아트 외에는 볼 곳이 없다. 

네이버에서 영화를 사도 티브이로 볼 수 있어서 영화관 만큼은 아니더라도 볼만하다.


팩트를 알아서이기도 하지만 예측되는 스토리는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그 아쉬움을 익숙한 음악들이 충분히 채워줬다. 

바렌보임 역할을 하는 ‘에두아르트’가 토니 에드만의  페테르 시모니슈에크이란 것을 

기록을 보고서야 알았다.  

이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눈썰미도 이름 외우는 재주도 없는 이즈음의 내게 위로가 되는 문장을 한줄 적는다.  

그러니 그는 진짜 배우다.    

  

사람들은 쉬 변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배우고 느껴온 관습적 사유뿐 아니라 

여전히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전쟁속에 있는 현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갔을 때 팔레스타인 지역에 가서 식사한 적이 있다. 

양고기를 맛있게 하는 집이라고 했다.

살짝 경계만 넘어섰는데도  느낌이 확 달랐다.

동네가 달랐고 분위기가 달랐다.

이스라엘이 평범한 도시라면 팔레스타인 지역은 뭔가 응축되고 오랜 냄새가 난다고나 할까, 

하긴 몇 발자국 걸었던 곳을 아는 척하는 일도 우습긴 하다.


평화 콘서트를 위해 오디션을 거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재능 있는 연주자들을 뽑는다. 

에드아루트가 그 역할에 푹 빠져 보이지는 않는다. 

뭔가 역할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느껴진다. 

오히려 아이들의 모습이 더 진하고 깊다. 

물론 아이들의 연기에도 과장이 살짝 엿보이긴 하지만,

어쩌면 의도 자체가, 음악으로 하나가 되게 하려는, 그 무한 의도가 이미 과장일테니, 

하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상황에서는 다르다. 

그들은 적어도 음악을 하는 순간만큼은 하나가 된다. 

어느 나라의 누구가 아니라,

 나와 같은 음악을 하는, 같은 사람이 된다. 

점이 선이 되듯이 그렇게 점 하나를 그들은 찍는다.   

야만의 역사를 어린 청춘들은 자신의 음악으로 새롭게 써보려고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남티롤 풍경이 펼쳐진다.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쨍한 풍경이다. 

눈부신 자연은 사람의 마음을 확장 시킨다.

비록 화면속에서  펼쳐지지만 

나는 그순간 그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그 아름다운 풍광속을 달린다.  


평화콘서트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소년의 죽음 때문이다. 

어느 소년 소녀이든, 어느 사람이든 그렇지 않을까만,

난데없는 죽음은 생겨나고 그 슬픔은 참혹하다. 

결혼식 뒤풀이를 한다고 차를 타고 다니며 즐겁게 외치던 소년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며 고통스럽게 외치고 다닌다. 


내 삶은 아니지만, 그런 삶을 보면, 그런 죽음을 보면,

결국 삶은 생래적인 비극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그들은 볼차노 공항에서 헤어진다.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다. 

이스랄엘 바이얼린 주자가 라벨의 볼레로를 시작한다.

양파를 문지르며 연습을 하던 팔레스타인의 바이얼니스트가 연주하기 시작하고 

파헬벨의 캐논에서 시작하던 기적의 오케스트라가

라벨의 볼레로로 끝난다. 

크레센도~~~~~~

크레센도를 더욱 희망적으로 보이게 하는 유리벽도 


에드워드 사이드는 갑자기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말했다.  

“정체성이란 고정된 장소나 변치 않는 물건이 아니라 

일종의 흐름, 흘러가는 물줄기 같은 것입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올해 만해평화대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2011년 광복절 임진각에서 열린 대규모 평화콘서트에서 베토벤의 ‘합창’을 연주했다. 


남과 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좀 급하고 빠른 듯, 

그래서 세련된 느낌은 나지 않지만

생각거리가 많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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