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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an 12. 2022

간통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밤이여 오라》


책은 고요한 시간에 읽어야 한다. 

좋은 책일수록 그러하다. 

요즈음은 이른 새벽, 눈이 떠지면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겨울은 게으른 햇살로 더불어 게을러지기 쉬운 시절이다.

이불 속은 왜 이리 포근한가,

커다란 돼지 인형 위에 책을 세우고 글자 위로만 불빛을 보낸다. 

어젯밤 읽다 둔 ‘밤이여 오라’를 끝낸다. 

그리고 책표지를 한참 본다.

커다란 나무 다섯 그루, 보랏빛 하늘, 사람 둘, 땅은 어둡고 환하다. 

나의 벗 윤금숙 화가가 찍어준 작가의 사진도 한참 본다. 

그래도 아직 창밖이 어둡다. 

실비 제르맹의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를 읽기 시작한다. 

제르맹의 소설. 아니 산문시 같은 짧은 책을 부러 아껴 읽었다.

번역자의 글도 다 읽고..... 생각하다가

르동의 감은 눈과 고야의 거인을 떠올렸다. 

감은 눈보다는 거인이야, 그 거대한 남자, 

그래, 틀림없이 실비 제르맹은 고야의 거인 그림을 보며 이 글을 생각했을 거야.


여러 권의 책을 함께 읽는 것은 나만의 오랜 독서법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섞이는 것을 간통이라고 보르헤스가 말했다. 

처음에는 그 놀라운 갭과 놀라운 연결에 놀랍기만 했는데

지금은 단어를 해체 시키는 것이 작가라고....보르헤스의 의도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몸이 커다란, 다리를 저는 여자와 <밤이여 오라>의 주인공이 살짝 섞인 것은 

프라하 때문이었다. 


비셰그라드는 프라하의 비셰흐라드를 연상시켰고 베오그라드의 요새 역시 프라하를 생각나게 했다.

그래서 구글 지도를 펼쳐 들고 지명을 따라 가보았다. 

자그레브가 크로아티아, 여기쯤이군, 마르부르크는 독일이고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의 수도이고

한나가 여행한 칼레매그단은 구글 지도에 사진으로 여러 장이 나왔다. 

흠 여기를 갔단 말이지, 변이숙이 , 

구글 지도에서 비셰그라드를 치니 왼쪽으로 돌로만든 요새 사진이 주욱 뜬다. 

변이숙은 드리나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드리나강의 다리>를 읽는다.

당연히 나는 <드리나강의 다리>란 책도 검색해본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책인데 처음이다. 

책이 책을 부르는 독서를 그렇게 하는데도 여전히 읽지 않은 책은 차고 넘친다.

사실 이젠 책에 대한 욕심도 버린 지 오래다. 

그저 내 앞에 다가오는 책들을 조용히 읽을 뿐이다. 

<밤이여 오라>는  작가의 사진을 찍어준 화가 윤금숙에게서 나에게로 다가왔다.  


강가의 호텔에서 

손님처럼 호텔 안으로 들어서 버린 참새 이야기에 마음이 머물렀다. 

길인가 하고 가지만 길이 아닌, 

자신의 공간인 줄 알고 날아왔지만 막힌 감옥, 

참새의 처절한 몸부림과 그 몸짓이 낳은 숨결, 

유리창에 서려 있던 참새의 입김은 

실제 작가가 경험했건 경험하지 않았건,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그 작고 여린, 가냘프지만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주는, 

하얀 입김이라니, 

언젠가 북한산을 걸을 때 아무도 없는 그 숲속에서 딱따구리 소리가 들렸고 

잘 보이지 않던 그 작은 모습이 내 눈에 잡혔는데 

딱따구리가 나무를 콕콕 찍는데 세상에, 그 작은 조두를 뒤로 한껏 제끼며 

반동의 힘을 더하더라는 것, 

세상에 그렇게 너 힘써서 사는구나.

작가는 아마 그런 힘으로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보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낙엽은 폭신했으나 발을 잘못 디디면 왈칵 빗물을 뿜어냈다. 

몹시 낯설면서도 익숙한, 일치되지 않는 양가감정이 나를 혼몽하게 했다.”

이 문장도 섬세하면서도 독특한 비유로 여겨져 표시해놓았다. 


원래도 바닷가에는 제사가 같은 날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배타고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기리기 위한 제사. 

제주 4,3 사건은 이승만 미군정 남로당, 

결국은 정치에 의해 행해진 참혹한 사건이었다. 

강요배의 그림 ‘피살’은 젖먹이를 안고 있던 젊은 엄마의 죽음을 그린 그림이다.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고 그 후에 어떤 일이 생겨도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란 것을 작품은 웅변보다 더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세르비아는 인종청소란 이름으로 보스니아 인들을 학살 했다. 

아내와 딸을 잃고 폐인이 된 채 다리 위에서 살아가는 남자는 

‘살아서 지옥을 배회하는’으로 작가에 의해 표현된다. 

인류 안에서 더는 회자되지 말아야할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학살> 일 것이다. 


변이숙은 연인에게 말한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던 자신에 대한 이야기, 

4.3 사건의 부모와 조부모의 이야기 

머슴으로 태어난 사람이 자신이 사람이라는 인식을 했다 .

그 인식에 의해 달라진 삶은 얼마나 잔인했던지,   

그리고 그 비극 속의 세포가 여전히 살아남아 변이숙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랑했던 연인들이 조작된 역사 속에서 아이를 잃고 사랑도 잃고 결국 사람도 잃게 된다.

평범한 사람의 생을 그렇게 파도 위의 부표처럼 만들어버린 자는 누구인가, 

대상 없는 증오는 허망을 더해 사람을 절망하게 한다. 


발칸반도에서 그녀는 자신의 고통과 같은 비극을 대면한다. 

아 나만이 아니었구나, 우리만이 아니었구나, 

그러나 그 깨달음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통렬한 인식은 

그녀에게 또 다른 절망을 주었을 것 같기도 하다.  

아픔이나 고통의 힘이 강력할수록 사람은 객관화 된다. 

감옥에서 나온 뒤 변이숙의 기록되지 않는 삶이 잠깐 궁금하기도 했다. 

서정적인 글이다. 

그래선지 잘 읽힌다. 

고통을 품고 있으나 소리 지르지 않고 폭력을 직시하나 부드럽다. 

그러나 <밤이여 오라>는 제목이 내포하고 있듯이 두려움 없는 삶을 기록하고 있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삶이 거룩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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