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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Mar 29. 2022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다

최선주 시간을 만지는 사람들 

 

 집에서 조금 걸으면 경의선 풍산역이다. 

지하철을 타고 이촌역까지 40여분, 

이촌역에 내리면 국립박물관 까지 꽤 긴 지하도를 걸어야 하는데 그 길이 참 좋다. 

튀지 않는 벽 장식에 유물들이 살짝살짝 보이는데 

고즈넉한 박물관 분위기를 한껏 내보인다고나 할까, 

세련된 문화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언제 가도 좋으므로 자주 가는 편이다. 

겨울에는 걷기 운동(?)을 위해서도 간다. 

최근 두 번은 디지털 실감 영상관람관을 예약해서 완전 새로운 경험을 했다. 

첫 번째 수장고를 경험할 때는 낯설어서 어려웠고 

두 번째 청자 보기는 

세상에, 청자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데 학처럼 절벽을 날아오르니 

머릿속으로 ‘나는 지금 여기 박물관 작은 방안에 가만히 서 있는 거야’를 

끊임없이 생각하는데도 무섭고 떨렸다.      

그런 생각도 했다.  

실감 영상이 확장되기 시작하면 아프리카를 가지 않더라도 사하라 사막을 날아다니며 불 수 있겠구나, 실제로 사막을 간다면 내 발길이 닿는 아주 조그마한 주변일 것이나 

실감 나는 영상으로 학을 타고 사막을 날아다닐 수 있다면 그 또한 매혹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실감은 실감이 나니까 사실일까, 

과연 사실은 진실일까,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사랑이 그쳐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절절히 그리워하게 되고 더 자주 생각하며 철저한 이별을 이유로 말할 수 없이 간절해진다. 

그러니 기억이 존재보다 더 깊을 수 있고 

어쩌면 기억이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      

 나의 친애하는 벗 윤금숙 화가의 배려로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최선주 지음, 여잔가 했는데 인상 좋은 남자분. 

보기 좋은 미소처럼 좋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이리 맑은 필치(과장 없는)로 써낼 수 있고 

다시 태어나도 박물관 큐레이터를 꿈꾼다니 그 삶이 충일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이야긴가 하면 박물관 유물에 대한 스토리가 펼쳐지고 

유물 이야기 속에 큐레이터의 삶이 녹아있어서 장마다 산뜻한 수필 하나씩을 읽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쉬 접할 수 없는 유물이나 전시 이면의 이야기가 많으니 흥미롭기도 하다.  


 은진미륵=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을 언제 보았던가, 

보긴 본건가, 적어도 내 기억 속에 머리 위의 관은 처음이었다. 

최선주는 은진미륵에 대한 통념에 대해 

그만의 느낌으로 색다른 접근과 해석 연구를 통해 결국 

‘못생긴 관촉사 은진미륵’이 국보가 된 경험을 적고 있다. 

그 일화 속에 큐레이터의 많은 면이 보였다.   


 이집트 박물관에서 넓은 공간에 한 작품 네페르티티 두상을 보고 그는 금동반가사유상을 독립 전시했다. 

그리고 그 독립전시는 틀리없이 이즈음의 놀라운 전시 ‘사유의 방’에 대한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크리스챤인 내게도 ‘사유의 방’은  불상에 대한 새로운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주었다. 

끝없는 물질의 순환을 나타내는 흑백의 미디어 아트가 펼쳐진 입구는 

성전에 들어가기 전 손을 씻는, 

회막과 제단 사이에 있는 물두멍처럼 여겨졌다고나 할까, 

삼국시대에 제작된 국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딱 두 점만을 전시한 공간 

턱에 팔을 괸 자세는 깊은 사색을 뜻하는 자세로 사투르누스의 속성이 멜랑콜리아였다. 

사유하는 불상의 감은 눈과 신비로운 미소는 

사유의 근원이라도 되듯이 수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모나리자의 눈뜬 미소와 함께 

‘미소’라는 이름으로 함께 전시를 해본다면 어떨까, 

신라인들의 미륵신앙을 담은 장창곡석조미륵여래삼존상이 보물로 지정되더니 

미소가 더 밝아졌다고 하니 그 밝아진 미소도 함께 전시하면 좋겠다.  


경건한 부처들의 공간에서 연주되는 양방언의 피아노 공연, 

나도 그의 공연을 한번 본적이 있는데 일반 연주회와는 전혀 다른 공연이었다. 

그러니 경주 박물관에  피아노 치고도 

엄청나게 현대적인 새바람이 들이찰 때가 슬그머니 궁금해졌다.  

진구사 터의 석등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조우하게 된 비로자나 부처와의 만남도 스릴 넘친다. 

2019년 창령사터 오백나한상은 나도 만난 전시였는데 

작가가 기획한 전시였다니..... 

기억이 새로웠다.

대다수 박물과 유물들처럼 유리관에 전시된 것이 아니라 

현대의 조각처럼 공간으로 나서며 관객들 옆으로 다가서던 전시.. 

어두운 공간에서 들리던 새소리와 바람소리, 

수많은 스피커들 사이에 존재하던 나한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불행히도 마루 벽에 깔린 고벽돌과 그 벽돌에 기록되었다는 

마음의 심연으로 이끌어가는 단어들은 보지 못했고 

벽돌 사이에 이끼를 심었다고 했는데 그 역시 거친 눈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 전시회를 가다 보면 작품을 전시하는 일이, 혹은 공간이 , 

작품을 느끼게 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점점 깨닫게 된다.

격있는 작품이 격조 없는 공간속에 있어 격을 상실하게 되는가 하면 

섬세하고 깊은 공간 때문에 

혹은 색다른 배치와 놀라운 콜라보 때문에 

더욱 깊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큐레이터는 단순히 작품 전시자가 아니라 

작품을 재창조하는, 

작품에 깊이와 아름다움을 더하는 크리에이터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어느 공간에서 어떻게 수많은 유물을 만나게 할 것인가

특히 박물관속 과거의 유물은 한정되어 있는데(물론 여전히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 과거가 현재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큐레이터들의 몫일 것이다.

그냥 유물인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큐레이터에 의해 현대로 새롭게 재 창조되는, 

유물과 관객과 만남에서 무엇이 빚어질 것인가, 

그들이 함께 빚어내는  무형의 만남, 

즉 마음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큐레이터다. 

책의 말미에 작가가 적은

<큐레이터는 시간을 만지는 사람들이자 시간을 잇는 사람들> 이란 문장이 

묵지근 하게 독자를 사로 잡는다. 



                                                    (사진은 전부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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