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셀 오토니엘
거울은 인식의 도구다.
거울이 없던 시절 사람은 자신을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생각 역시 인식이라는 도구와 밀접하다.
기본적으로 생각 뒤에 인식이 따라오지만
인식함으로 생각은 인지 될수도 있을 것이다. 인식은 생각의 필수 조건일 것이다.
어린 아이 앞에 거울을 놓아두면 한참을 거울 속의 자기와 논다.
단순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철학자들은 이 부분을 그렇게 단순하게 넘기지 않았다.
자신의 객관화 자신의 인식 혹은 자신과의 만남 사랑등 수많은 개념을 차출해 낼 수 있는
유의미한 부분으로 인식,
철학의 논리나 정신분석의 기저 혹은 심리학의 중요한 테제로 삼았다.
성찰과 사변은 어원적으로 라틴어에서 거울을 의미하는 'speculum'과 연관이 깊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나르시즘의 신화 역시 물거울에서 시작되었다.
자기애라고 번역되는 나르시즘의 시작은 엄밀하게 말하면 아름다움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선택에 따라 얼마나 사실이 호도 될수 있는가를 선명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일본 작가 가네히라 케노스케가 쓴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다.
작가의 세 번째 의붓아버지는 이발사였다. 그는 자주 말했다고 한다.
“내가 웃으면 거울이 웃는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그는 한걸음 더 나갔다. .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먼저 웃음을 보이는 삶을 살고 싶다고 나 자신을 타이른다.“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장ㅡ미셀 오토니엘의 <정원과 정원> 전시가 열리고 있다.
며칠 전 덕수궁 연못에서 그의 작품을 쌩뚱맞다고 여긴 것은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으리라.
연못을 다 덮은 자그마한 어리 연꽃을 배경으로 피어난 황금연꽃은
그곳을 신비로운 공간 혹은 동화 속 공간으로 변화시켜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할 거라고 했는데
뭐 썩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
그래서 다시 시립미술관으로 갔다.
<정원과 정원>은 미술관을 벗어나 다양한 공간을 미술관으로 만드는 의도가 있다고 하는데
단순한 생각이지만 야외 조각공원은 일찍이 그런 공간이 아니었을까,
입구의 크지도 작지도 않는 은색의 구슬 조각들은
자연히 아니쉬 카푸어의 클라우드 게이트와 리움에 있는 <큰나무와 눈>을 떠올리게 했다.
그의 현기중이라는 작품은 또 얼마나 어지러웠던가.
수많은 내가 보이고 나를 보는 내가 또 보이고 또 보이던 작품들
나만 담는게 아니라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품고 저 하늘 조차 품던 작품이었다.
아니쉬 카푸어와 비교하면 안되는가?
몇몇이조용히 이야기하며 지난가는데 오모낫, 신문에서 보았던 작가 장선생이다.
나도 슬며시 끼어 들었다.
선생이 말하고 누군가 번역하고
나중에 보니 별말은 아니었다.
작은 책에 기록된 말을 그냥 속삭이는듯한,아주 작은 소리로 말하는, 알아 들을수 없는
쑝썅븅 하는 불어로 들었을뿐이다.
키도 작고 목소리도 작은 아저씨였다.
파란색 유리벽돌 7000여개로 만들어진 <푸른바다>는 놀랍기는 했다.
그리고 그 위에 무수하게 반사해내던 매듭들과 함께 예뻤다.
예뻐서 반했다.
색색의 구슬이 매듭지어지고 다양한 색들의 변주, 그리고 비춤, 거울,
무한을 상징할수 있다고...유리 벽돌의 불순물이 만들어낸 다양한 빛의 변주
수공유리를 만들 때의 흔적 흠이 상처와 고통의 공존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벽에 유리벽돌은 조명의 빛을 담아 아주 다양한 색의 그림자를 빚어내고 있었는데
장선생은 그것이 영혼이라고 말했다.
아 그렇게 의미, 혹은 엮을수도 있구나,
그렇게 말하면 그런게지,
그러나 정말 그럴까,
나는 장선생에게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묻고 싶었지만
물을수도 없었고 설령 묻는다 하여 그 질문이 질문 같을까?
숱한 거울이 있듯이
장선생도 장선생의 거울을 만들어낸 것일 테니까,
루브르 미술관에 작품이 안치?된 작가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
엄청나게 돈을 많이 들여서 무료 전시에 책자도 무료인데 작은 도록 같았다.
가끔 미술관 전시도 특히
나랏돈을 쓰는 전시라면
돈 이야기도 했으면 좋겠다.
이거 돈이 얼마나 들어간 아주 비싼 전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