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백주! 대낮!의 강도다. 살인범이다. 학살자다.
오늘 아침 신문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아파트를 쏘아
어린아이들까지 참상을 입었다고 한다.
내 아이라면....아이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진다.
사실 러시아의 어린 군인들도 모스크바 출신은 거의 없고
변방의 가난한 젊은이들이 주축이라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누가 뭐래도 이 학살의 원흉은 푸틴이다.
푸틴은 이 시대의 스탈린이자 히틀러다.
그런 학살자도 체면이 혹은 체면을 위한 논리가, 자신의 합리화가 필요한가.
푸틴의 휘하에 철학자 알랙산드르 두긴이라는 책사가 있는데
그는 실제 서구에서 꽤 유명한 철학자라고 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철학에 입각하여
신념의 문제는 진실을 정의 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우리에게는 러시아적 진실>
이 있다고 말했다.
전쟁을 일으켜서 사람을 죽고 죽이며
타인의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러시아적 철학이라니,
어린아이까지 무차별 학살하는 것이 러시아적 진실이라니,
이런 것이 철학이고 진실이라면 철학도 가고 진실도 가라.
사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분야별로 방만하기 그지없어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한 갈래는 분명 다원주의의 모태다.
자연스레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주의로 걸어온 것이다.
다원주의에 <절대>는 없다.
대신 수많은 대체개념, 혹은 신 대신 인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주 쉽게 풀이해본다면 척도가 사라졌다고나 할까,
현대의 철학은 말한다.
감히 인간이라는 존재를 판단할 진리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그런 개념들이 인간들을 노예로 만들 뿐이다.
다원주의의 핵심은 절대 가치도 없고 절대 도덕도 없으며 절대 진리도 없다.
절대 선도 없고 절대 악도 없다.
굳이 무엇인가가 <절대> 혹은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맥락>이다.
맥락만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그래서 이사야 벌린은 절대 자유란 없으며
그저 개인 안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며 집약하는 소극적 자유만이 자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2016년에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탈진실을 그해의 단어로 자리매김했다.
탈진실은 진실이 탈색된다는 것,
진실이 진실을 벗어난 것이다.
사실 추구와 합리성은 무시되고,
조작된 거짓 정보가 사실의 자리를 위협하거나 대체하는 현실을 의미한다.
이미 시대는 탈진실을 넘어 탈사실 까지 도달해 있다.
인터넷의 발달이 우리에게 더욱 확증 편향을 강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무수한 가짜뉴스,
오직 니편 내편을 가르는 확증 편향된 거짓된 사실이
사실의 옷을 입고 진실처럼 우리 앞에 서있다.
그들은 진실이나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탈진실도 좋다.
탈사실도 괜찮다.
무엇이든 나의 유익, 혹은 감정이나 정치성향,
논리상의 나의 <편>을 위하여 해석하고 조작해 낸다.
신과 가치와 의미의 부재때문이다.
<자유> 뒤에 따라붙으며
자유라는 善을 제재하던 방종이라는 단어도 사장되어간다.
아니 이미 사장되었다.
자유면 자유지 거기 어디 천박한 방종이 따라붙는가.
나의 자유가 넘치면
그 뒤에 타인의 자유가 침해된다는 것을 이제 사람들은 생각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밀물 후에 썰물이 다가온다. 생이 시작됨과 동시에 죽음 역시 시작된다.
이런 만고불변의 진리로 되는 것이 삶이다.
이런 확고 불변한 진리를 근거로 새로운 논리도 태어나야 한다.
그 모든 것을 부인한 상태의 논리나 철학은
날 수 없는 사람이 마치 새라도 되듯이 날아간다는 착각 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처럼 여겨진다.
지구라는 천체 안에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서 신을 제외하는 것은,
근원에 대한 물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디에서 왔고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면 끝없이 사고해야 한다.
설령 그 답이 없다 할지라도 해야 한다.
결국 삶은 생과 사중에 존재하듯
삶의 목적은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과정이 중대한 것은 어쩌면 과정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이네는
‘고요한 골방에서 하는 철학자의 연구가 문명을 파괴’ 할수 있다며
이념을 작게 여기지 말라고 경고했다.
실제 파시즘은 그들이 존재하기 전의 니체를 이용해서 자신들 철학의 기저로 삼았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를 기저로 삼아
‘러시아적 진실’이라는 논리로 전쟁을 정당화 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내편이면 무조건 옳고 니 편이면 무조건 틀리다는
확증편향이라는 전쟁을 하고 있다.
거짓과 악이 혹은 소용돌이 치는 역사를 모르지 않지만
확증편향이 이렇게 심화된 시대가 있었을까,
아침마다 조작된 거짓과 과장된 진실 혹은 자신의 소소한 경험이
마치 검증된 진실처럼 sns를 통해 우리 앞에 나선다.
물론 래거시미디어들도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려 더 고난도의 술수를 부리고 있다.
무엇보다
확증편향자들은 정치세력들에 가스라이팅 되어
이미 그들의 노예가 되어 있다.
이 민주주의가 환하게 꽃피고 있는 나라에서 노예라니....
키크고 틀 좋은 윤대통령은 오늘도 인사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지난번 정부 때 장관들은 훌륭했습니까?
오마이갓!
정치의 ㅈ도 모르는 나같은 민초도 저런 대답은 안한다.
걱정 만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