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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l 13. 2023

박영희 전시

         <자연의 결>에 기대書





박영희 작가가 경영하는 풀빛 갤러리는 정원이 아름답다. 

작가의 성정처럼 가지런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각양각색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정원을 가꾸는 것은 시간을 인식하는 동시에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것이다. 

시간의 고유함을 배우는 곳. 

그래서 <땅의 예찬>을 쓴 한병철은 정원은 타자의 시간이라고 했다. 

박영희의 작품에서 나는 정원을 본다. 

시간이 흐르는 적막을, 시간이 지닌 고요를, 시간 속에 배인 침묵을, 

무엇보다 타자와의 조화를 꿈꾸는 작가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의 캔버스는 보통의 작가처럼 화방에서 사다가 펼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결을 아는 작가의 안목으로 천을 사고 그 천에 천연 염색으로 수많은 시간을 덧 입힌다. 

박영희는 말한다. 

“염색은 농사와 같아요. 농부가 일은 하지만 열매는 하늘이 주시는 것처럼 색이 저를 찾아와야 해요.” 

그래서 그의 캔버스는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단 하나의 공간이다. 

그는 나무를 만들고 숲을 지으며 해거름 녁 일몰을 빚어낸다. 

그에게서 투사되는 자연은 간결하지만 힘이있고 소박하지만 아름답다. 

 <바람>의 제작 과정은 지난하다. 모시를 염색한 후 밥풀을 쑤어 멕인다. 

갈무리한 모시를 잘 개켜 밟아서(?)올을 세워야 한다. 

오브제로 사용하기 위해 모시의 결대로 자르는 일은 고도의 스킬이 요구되는 일이다.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오직 작가의 손길로만 가능한 일, 

나뉘어진 가느다랗고 작은 모시 천의 가장자리를 

살짝 그을려 선이나 아련한 형체를 만드는 일은 어떤가. 

그래 설까, 

어느 순간 그 선들은 삶 속에서 다가오는 난해한 어둠이나 그림자처럼 보인다. 

나비처럼 혹은 우연히 만난 가녀린 풀처럼 살짝 얹혀있는 조각보들은 삶에 대한 탄식이 아닐까, 

그러니 그의 작품은 결국 작가 자신이 오브제化 되어 작품 속으로 스며드는 일일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마티에르가 우아하게 채색되어 있으며 

<자연>의 마티에르가 두텁게 발화된 작품,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어느 순간 추상적이기도 하다. 

현실을 떠난 추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느 작가보다

땅 위에 든든하게 발을 디디고 서서 직시하는 추상. 


그래선지 살짝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이 생각난다. 

그의 색면추상은 형태라고도 할 수 없는 

그저 색만 존재하는데도 마치 늪처럼 움직이고 일렁인다. 

어느 순간 색이 내게로 오기도 하며 작품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박영희의 작품들도 그렇다, 

움직이고 일렁인다. 

나를 부르기도 하고 나에게로 다가오기도 한다.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에 필요한 것은 침묵이라고 했다. 

박영희 작품에서는 침묵이 새어 나온다. 

그래서 저절로 고요해진다. 

조금 더 깊게 바라보면 소슬한 바람도 불어온다.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을 볼 때 거리를 정해주기도 했다.

 박영희의 작품은 가능한한 가까이 서서 눈을 모아 아주 자세히 보시라. 

그래야 숨어있는 이야기들이 들려올 것이다. 

작가의 시간을 갈아서 만든 아름다운 시간이 당신 앞에 현현할 것이다.     


                          위영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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