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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l 16. 2023

베트남 나트랑에서

달과




베트남 나트랑을 다녀왔다. 

멕시코의 칸쿤을 다녀온 어느 여성 소설가는 천박한 여행지라고

칸쿤 탄식을 했는데 여행을 다니다가 자주 그녀가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을 파괴하고 몰아세우고 마음대로 만들어 리조트. 호텔을 세운, 

자연을 다아 죽여버리고 들어선 사람들의 즐김 도락 이런 것들이 횡행하는 곳이란 인식

나는 그녀의 인식이 무척 고급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나는, 내가 지닌 인식이 명징하지 못해서인지, 

어디론가 떠나기만 해도, 그리고 낯설기만 해도 설레니,

무급의 격이라고나 할까, 


늦은 밤 비행기를 타선지 

오메 달이 그것도 거의 출산일이 다가온 산모의 배처럼 부풀어 오른 둥그스럼한 

달이 구름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 위라선지 더 가까이 느껴졌다. 

어린 왕자의 여우가 저런 모습이었을까, .

살짝 홀렸는지 잠을 자야할텐데 계속 달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일큐84에서 달이 두 개 나온다.

나는 달 두 개를 생각해내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진짜 기발하다 생각했는데 

우주의 시작점에서는 처음 달이 두 개였다는 이야기를 과학다큐멘터리에서 들었다. 

달은 그렇다. 

신비롭고 묘하며 낭랑하며 鬱하며 슬프며 환하며 자석이다.

달은 감성으로 뭉쳐진 어떤 존재처럼 여겨진다. 

깊은 밤 호텔에 들어가 잠깐 잠을 잤나 싶었는데 커튼 사이로 환한 달빛이 새어 들어와 있었다. 

창을 열고 나가니 달이 휘영청~~

습관처럼 사진을 찍어 봤으나 어디 달이 그 작은 핸드폰 속으로 들어오길 원하겠는가,  

그나마 눈이라도, 전두엽에라도, 박아 놔야지. 

눈도 물렁물렁해지고 뇌도 물렁물렁해져서 이젠 잘 박히지도 않지만,  

물렁해진다는 것은 일종의 해체다.

눈이 물렁해지니 비문증이생겨나 나비나 새 혹은 먼지들이 주인인 양 눈 속에 살고 

뇌도 그렇다. 

박히기는커녕 순식간에 수많은 정보를 물처럼 흘러 보내고 만다.

하긴 필요도 없는 수많은 정보들을 헤아리고 담고 정리하노라 너도 얼마나 피곤했겠니,  

그러니 자신의 세계를 점점 놓아버리는 거지, 

다 놓을 때 거기 죽음이 있을 것이고,

세상에 그 지난한 해체 철학을 나는 내 눈과 마음 혹은 몸에서 느끼곤 한다.         

그나마 독서의 해체는 좀 선명하게 이해된다.

저자가 글을 써서 새로운 탑 하나를 쌓는다 치면 

다른 누군가가 그 탑을 자세히 보다가 부숴버린다. 

그리고 그만의 다른 탑을 쌓는 것이 해체 철학의 독서다.        

그러니 내 몸의 해체도 철학적으로 생각한다면 

해체되어가다가 

다시 새로운 어떤 존재로 거듭날 것, 

그게 부활일 것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얄팍한 인식으로 무슨 철학을 온전히 이해할 것이며 

안티 크리스트 철학에 믿음 까지 연결 시키다니.....

그러나 상관없다. 

이제 나는 적어도 나의 나무가 되어 가고 있으니,

모든 세상의 학문과 인식에 내 나무가 꼭 맞으란 법은 없다. 

틀려도 괜찮고 아름답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는 여기 존재하고 저기 달도 존재하고 나트랑의 바닷물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가.      

새벽 다섯시가 되어 바닷가로 나갔다.

밤새내 바닷가에 있던 사람들이 저기 태양의 빛이 조금씩 비쳐오는 수평선을 앞에두고 

그림자가 되어, 실루엣이 되어, 명화가 되지 않는가, 

그대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아니 모를수록 더 좋다.

우리는 지금 한공간에서 서로 살아있다. 

무엇을 더 바랄것인가. 

이순간, 이 감흥, 이 설렘, 

처음 바라본 바닷가의 풍경, 이른 새벽, 저기 저 여명의 빛이 바로 시간의 존재가 아닌가.

빛이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어둠사이로 새어들어 스며드는게 빛의 존재가 아닌가.,        

구름은 시시각각 변형변색하며 하늘 역시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움직인다. 

세상 모든 것들. 하다못해 자 푸르른 단단한 여명의 하늘도 무지할정도로 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이제 나는 고정되어 있는 것들에서 

움직임을 느끼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다. 배워지는 것도 깨달음도 아니다.   

나만의 사유가 빚어낸 나만의 동참이다. 모든 타자와의 혹은 형태와의 존재와의 합일.   


      



재미있었다. 

베트남의 가우디라는 별호가 있다는 작가의 집이 달랏에 있었다.

무한정한 곡선에서 훈테르트 바서가 느껴지기도 했고

명징하고 고급한 하우스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오금이 저렸다. 

크지 않는 공간인데도 한참을 오르락내리락 거렸고 아주 작은 연못도 있고

 광활한 바다도 그 건물안에 있었다. 

조금 위험한곳이 있지만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나도 아이 같아선지 좋았다.   


달랏 가는길 어느 휴게소 뒷뜰,  자그마한 돌로 만들어진 코불소 킹콩 그리고 배가  제법 샤프했다.

뒤에 흐르는  강물이 눈초리를 부드럽게 해주었는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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