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길위에서
늦은 밤 도서관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사람들이 없는 빈 공간들, 도서관의 주인인 책들이 살아나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여러 사람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고 사람들이 들락거려야 할 공간이 텅 비어 있고
모니터 앞에 한 명만이 있다.
빈 의자들 역시 의자 스스로가 존재하는 듯 낮과는 다른 존재감을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사람들이 강하다는 것을,
풍경에서도 느끼곤 하는데
사람이 많으면 아름답고 적요한 풍경은 사라져버린다.
많으면 많을수록 힘이 강해져 풍경의 힘은 쇠약해진다.
물론 소소하면서 섬세한 것들,
오래된 집이나 작은 뒷마당, 찬찬히 봐야 보이는 돌담길이나
숲에 펼쳐지는 소롯길의 고요한 아름다움은 어쩌면 스스로 숨어버리는지도 모른다.
밤의 도서관에서 <나이트 호크>의 기운이 살짝 느껴진다.
사람들은 어딘가 자신의 몸을 뉠 곳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밤 가운데 남아있는 그림이다.
빛이라고는 식당의 불빛이 다다.
하루살이처럼 거기 빛 속으로 네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두 사람의 남녀는 어둠이 두렵기라도 하듯이 몸을 책상 앞으로 기울이고 있다.
호퍼가 좋아하는 중절모를 쓴 남자와 주황색의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의 사이에
달달한 것이 흘러야 일반적이거늘,
호퍼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들 사이는 서늘해 보인다.
그렇다. 호퍼의 작품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중요한 지점의 하나가 그 서늘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달착지근한 것을 좋아해서 모든 것에 달차근을 바르나
원래 사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원하고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서늘함은 모든 사람들, 관계의 근간이다.
그것을 호퍼는 표현하고 우리들은 그 서늘함이 새롭기라도 하듯이 매혹당하는 것이다.
새로워서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기 때문에 마치 오라만에 사랑하는 이를 만나듯이
매혹당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그 서늘함이 힘들고 괴롭고 외롭기 때문에
뭉뚱그려 나 자신을 달착지근할 것이다.
추론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으로 밀어 넣고 잊고 사는 것이다.
설령 둘이 더 가까워진다 해도
저들에게는 현재의 저 빈틈이 완강한 자세로 존재할 것이다.
다른 한 남자는 그 어둠을 바로 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어둠이 두려운 듯 어둠을 피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다.
숙인 눈으로 커플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일반은 통속과 사이가 좋다.
그리고 특별하지 않은 한, 사람들은 그런 통속 사이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예측 가능한 안정감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 삶이 그러한가,
그러니까 호퍼는 지금 여기 어느 한순간,
소소한 모든 것들을 생략해버린 밤 풍경을 표현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는 삶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직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밤의 도서관에서
마크 스트랜드라는 시인이 쓴 ‘빈방의 빛’을 빌렸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대한 인상을 적은 글이다.
깊이 들어가지는 않으나 시인이라선지 글은 시적 감흥과 독특한 시각들이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를 가기 전 읽고 싶었다.
사실은 아주 오래전 호퍼의 그림을 주제로 여러 유명 작가들이 위탁받아 쓴 소설을 읽은 적도 있다.
오란비 오시는 날 호퍼 전시회를 찾았다.
아침 시간이기도 했고 비가 와선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생경한 생각일지 몰라도 호퍼의 전시회를 보는 동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호퍼는 우리 뇌 속의 풍경을 그리는 게 아닐까,
생략할 것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뇌의 성향대로
그린 그림.
일상을 그리면서도 일상의 디테일은 제거한 표현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숲을 좋아해선지 호퍼가 그린 숲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특히 ‘오전 7시’의 숲과 ‘이층에 내리는 햇빛’속의 숲 그리고 ‘계단’앞 숲,
눈부시게 환한 세상인데 숲들은 깊어선지 밤처럼 어둡다.
지금 사람들은 빛 가운데 존재하지만 어두운 숲은 바로 그의 옆까지
‘계단’에서는 바로 앞에 펼쳐진다.
누군가 그 집을 나서면 바로 그 숲으로 홀려 혹은 끌려 들어갈 것 같다.
펼쳐진 숲은 아득하고 모호해서 두렵기조차 한다.
숲의 어둠이 금바이라도 집을 나서는 사람을 덮칠 것 같은,
‘오전 7시’에는 그저 빛과 가게와 숲만이 있다.
집은 정갈하고 단단한 자세로 서있지만 무엇인가 스멀거리는 것들이 숲에서 나와
저 집을 두드릴 것 같지 않은가.
저 환한 집에서 폭력에 노출된 사람이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튀어나와 숲으로 도망치는데
숲에 들어서면 어둡고 기묘한 숲의 올가미가 오히려 그를 짓누를 것 같다.
(흠 영화를 많이 본 탓인지도)
‘이층에 내리는 햇빛’의 숲은 나무의 몸통이 몇그루 그려져 있긴 하지만 덩어리다.
숲의 덩어리
환한 빛에 온몸을 내어놓고 있는 젊은 여인과 나이든 여인의 대비가 모호하다.
생각은 다르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둘은 전혀 숲을 신경쓰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저 숲은 그들에게 인생의 어둠과 어둠 속의 균열을 보여주고 있다.
숲 같은 어둠이 알 수 없는 숲의 어둠이 바로 그들 곁에 상존해있다.
갑자기한 어둠이 펼쳐지는게 인생 아니던가,
대기하고 있는 어둠을 숲이 보여주고 잇는 것처럼 보였다.
1914년 작품 ‘푸른밤’ 앞에서 오래 있었다.
기둥이 두 개의 그림으로 보이기도 한다.
배경의 푸른 밤은 숲과 하늘일 것이다.
제각각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무려 일곱 명의 사람들은 어느누구도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삐에로는 막 연극을 마친것일까,
담배를 피어문 모습은 나에게 말걸지마, 피곤해,.
내가 방금 한 작품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하지마.
새빨간 입술의 접대부,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빳뻣이 세우고
그 어느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겠다는 모습으로 서있다.
별도 달도 없는 하늘,
색으로 지워버린 숲은 프른 밤이 되어 사이좋게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젯밤 밤의 도서관, 간행물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이 거울이 되었다
어젯밤, 밤의 도서관, 어두운 창밖으로 밖의 벽이 이렇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