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영 Jul 26. 2023

<바오밥 나무와 달팽이>

민병일


바오밥 나무를 한택 식물원에서 알현한 것이 십오년 쯤 된 것 같다. 

그보다 더 아득한 시절에 어린 왕자에서 알았고, 

아프리카의 황혼을 배경으로 크지만 거꾸로 선 것처럼 보이는 신비로운 나무, 

누군가는 뚱뚱한 몸통에 파마머리라고 해서 살짝 웃었다.  


<바오밥 나무와 달팽이>는 예쁜 책이다. 

금방이라도 지니가 네 주인님 하며 나설 것 같은 호리병 바오밥 나무에 

푸른색 달팽이가 사랑스러운 아기처럼 그려져 있다.

작가가 그린 그림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샤갈과 클림트, 앙리 루소와 장욱진, 

제비꽃이 그려져 있는 절벽 그림은 프리드리히의 백암암을 떠올리게 한다. 

동화에 어울리는 그림이지만

메르헨, 플라뇌르라는 낯선 단어가 지닌 분위기도 품고 있다.    

구루 달팽이와 어린 달팽이의 그림을 보다가

문득 오월, 통영의  편백나무 숲에 있던 작은 연못의 남생이가 떠오른다. 

연못 가운데 솟아있는 돌팍 위에 있었는데 

주변을 산책하고 온 뒤에도 여전히 가만히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

잠을 자나, 꿈을 꾸나 궁금했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그 아이도 몽상의 상태였겠네, 깨달음이 왔다. .     


  

 바오밥 나무와 달팽이의 여행이다. 느리고 찬찬히, 

그러니 그들과 여행하려면 우선 느리고 찬찬한 시선을 장착해야 한다. 

메르헨처럼 보이지만 라이너마리아 릴케의 시처럼 읽어야 하고

앞만 보고 가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인 프리드리히 니체의 글처럼 

앞뒤를 오가며 읽어야 한다. 

식물처럼 (바오밥 나무) 한곳에서 가만히 서있기도 해야하낟. 

그래야 생각이 모아지니까,   


프롤로그에 작가는 선언한다. 

나는 별의 산책자,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별의 플라뇌르,

그러니 이 책은 보통 사람들은 쉬 상상할수 없는 별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풍경이 아닌 별의 마음에 대한, 보이지 않는 풍경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 어찌 허위허위 걸어갈 수 있을까,    

   

꽃피는 바다별에서 아주 오래 산 바오밥 나무는 왜 파란 별을 찾느냐고 묻는다.  

그순간 달팽이는 존재론적인 회의에 휩싸인다.

먼 곳에의 동경이었을까, 

숲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방랑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원초적인 여행으로 초대된 떠남이었을까,

달팽이의 회의에서 나는 내 삶을 바라본다. 

내 삶의 여정은 과연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무엇을 향한, 어디를 항한, 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오래 산 바오밥 나무는 회의에 잡힌 달팽이에게 불쑥 길 이야기를 한다. 

길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된다는 것, 

그게 길의 속성이고 숙명이란 것, 

그리고 길은 달팽이 너의 심연에도 있다는 것,

사라진 파란 별은 여전히 지금 별빛 가운데 있고 세상과 우주 

그리고 네 심연에도 이미 길을 내고 있다는 것, 

그러니 네 안에 숨은 파란별을  찾으라는 것, 

몽상가 달팽이는 그 지점에서 깨닫는다. 

싱그러운 바람 한줄기에서도 파란 별을 찾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 

내가 걸으면 그곳이 길이라는 것, 

삶의 은유가 길이고 길의 은유가 삶이라는 것,  

바오밥 나무는 그곳에서 방랑자의 길을 끝내고 

모든 식물들이 그러하듯 한곳에 정착해서 씨앗이 되고자 한다.      



이제는 그렇다. 

살아보니, 

허무주의자는 아니로되 

전도서의 기자처럼 생은 허무하다는 지점에 자연스레 도달했다.

허무를 안다는 것은 욕심을 버린다는 일과 동격이다.

돈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을 놓는 일이다.

(가끔 나 아닌 가난한 화가의 좋은 작품 앞에서나 

나 아닌 자식들의 삶 앞에서는 잘 안되기도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이 맞는가 회의하게 하는 것이 허무의 힘이다. 

소소한 일이 귀하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다.

학자가 된들, 유명한 소설가가 된들, 세계적인 부자가 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놓아버리는 지점이 바로 허무다.

성찰하고 사유한다는 것은 바로 허무주의자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허무 때문에 생은 더욱 빛나고 아름답고 비범해진다. 

아무도 그렇게 여겨주지 않겠지만 지금의 나는 화양연화다.

나와 다른 사람의 생을 볼 수 있으며 그 가운데 피어나는 꽃들의 아름다움을 

그 어느때보다 찬연하게 느낀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존재와 허무는 절친이다.  

허무라는 공감의 결이 한겹 배인 시선으로 책을 읽으니까

이 책은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허무는 오감과 육감을 지난 칠감으로 삶을 차지게 만들어준다.  


<바람 속에도 꽃이 피고 달빛과 별 사이에도 꽃이 피는 칠월 

선생님의 섬에서도 존재의 사유가 꽃피기를 기원합니다> 

민병일 선생은 ‘바오밥 나무와 달팽이’를 보내주시면서 이런 글을 적었다.

 그렇다.  

나는 훌륭하지는 못하더라도 

쉬지 않고 존재에 대한 사유를 한다. 

여행을 가거나 동네에서 걷다가 푸나무를 대하면,

사람과 만나면 더하고 집안의 소소한 일들을 하면서도

어디 가치의 향기가 있는지 킁킁거린다.

그러니 내게 딱 맞는 글을 써주신 것이다.      

 풍세의 작은별을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아마도 작가는 작은 별을 들으며 수많은 별나라를 구상 했겠지.

도연명은 줄없는 칠현금을 지니고 있었는데 흥이 오르면 악기를 연주하며  말했다고 한다. 

‘거문고 속의 풍취를 얻었노라 어찌 줄로서 소리를 이야기 하랴,’       

글 뒤편에 실려 있는 해설에서 김병익은 

어린 왕자, 싯다르타보다 더 통찰이 깊고 포용적이며 데미안보다 더 맑은 직관을 보았다는, 

그래서 이글은 <방황하는 인간을 위한 각성의 아가雅歌> 라는 놀라운 소회를 적었다.

인정!     


책속 사진이라.... ㅎ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