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랜75
힘들고 긴 연휴가 끝나고 영화를 보러 갔다.
복잡한 세상사가 대추나무 연 걸리듯 걸려 있는데 영화관에 가지는 못한다.
극장에 간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일인 듯 하지만
걸리는 일이 없어야 하고 마음도 한갓져야 한다.
사실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다.
무엇보다 관심 가는 영화가 있어야 하고 시간들이 나와 맞아야 한다.
내친김에 운동까지 하자 싶어 4키로 정도 되는 길을 걷기로 한다.
숲길로 가면 아마 4키로가 넘을 것이다.
헤드폰을 끼고 공덕포차를 들으며 걷는다.
내가 유일하게 가끔 듣는 유튜브가
한겨레 티비의 <공덕포차>와 <시사종이 땡땡땡>이다.
정치평론가 김민하가 나는 마음에 든다.
언제 봐도 수줍다.
그쯤 되면 닳아져서 매끄러운, 일명 세련된 모습을 보일만도 하는데
사람들 시선에 의해 자신을 바꾸지 않는, 우직한 수줍음,
그 수줍음은 아마 진실과도 맥락이 닿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말은 거침없이 해서 작가나 피디 혹은 사회자를 위한 말치레도 없다.
정치인들의 심리를 파악해서 행보를 짐작하는데
논리적이고 밝다.
들을만하다.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지점 이야기도 흥미롭고,
한 시간 정도 걸어서 벨라시타를 간다.
6신줄 알고 급하게 걸어서 도착했는데 6.40분이다.
이런 ‘짓거리’가 요즈음 잦다.
정확하지 못하고 마치 뜨개질 하다 코 빠지듯이 나중에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경우,
제주도를 가려고 표 구매를 했는데
출발하려던 전날 확인해보니
아침 7시가 아니라 저녁 8시였다.
이해는 할 수 있다.
가격이 싼 표에 나도 모르게 휘둘린 것이다.
비행기표를 어떻게 할수도 없고
그래서 파생된 렌터카 예약을 늦은 시간에 맞춰 하다보니
보통 예약금보다 렌트비가 두 배가량 되었다.
전형적인 소탐 대실이 된 것이다.
멀티뿐 아니라 총명도나 정확도에서 현저하게 급이 낮아지고 있다.
더 많은 체크와 더 정확한 기록이 필요하다.
설 지나고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온 기사는
노르웨이 총리를 지낸 93살 부부의 동반 안락사다.
여든세 살의 철학자가 여든두 살의 아내에게 바친 편지도 있다.
<D에게 보낸편지>
이글을 십여 년 전에 읽은 거 같은데 그 때 여든은 정말 노인이었는데
지금은 가까운 이웃처럼 여겨진다. ㅎ
평생 글을 써 왔지만 아내에 대한 글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글을 썼다는 철학자.
그리고 두 사람은 동반 자살했다.
노르웨이 총리의 안락사는 의료진이 직접 약물을 투여했다고 한다.
평생 내 연인이라고 아내를 불렀다고 했다.
마지막 인사는 뭐였을까?
(만약 나라면, 우리둘다 함께 죽지는 않겠지만 ㅋ~
‘푹 자고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 천국에서의 만남. 두렵지는 않겠네, 함께 해서)
네덜란드는 2002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나라다.
2022년 전체 사망자의 5%가 안락사로 숨졌다고 한다.
안락사는 존엄사의 다른 명칭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생명의 존엄성보다 삶의 존엄성을 우위로,
즉 삶의 마무리를 존엄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의식이 사람을 존엄하게 만든다는 빙증이기도 하다.
<플랜 75>
75살이 되면 원하는 사람에게 나라가 편안한? 죽음을 줄 수 있다는 것,
일본 영화다.
젊은 여자 감독이 만든,
흐릿함 사이로 피가 흐르고,
“넘쳐 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
더는 사회에 폐 끼치기 싫을 것이다.”
일본 영화 ‘플랜 75’(7일 개봉)의 첫 장면,
노인들을 무차별 살해한 젊은 남성은 자살을 하며 이같은 유언을 남긴다.
장애인 시설에 근무 했던 전 직원이 장애인 19명을 사살한 팩트에 기인했다고 한다.
이런 노인 혐오 범죄에 응답하듯
일본 국회는 ‘75세 이상 고령자가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지원’하는 안락사 제도
‘플랜(Plan) 75’를 통과시킨다.
일본은 20여년 전부터 75세를 후기 고령자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독사도 나온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친구, 전화를 해도 안 받으니 주인공이 찾아간다.
열려있는 문과 냄새.
그리고 식탁 위에 엎어진 사람
그런 고독사는 외롭고 참혹하다.
TV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되는 플랜 75의 광고 문구도 그럴듯하다.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지만 죽음만큼은 원하는 때 할 수 있는,
의지를 최대한 보장하는 선택이란 것이다.
남편과 사별하고 가족 없이 사는 78세 미치(바이쇼 치에코)는
호텔 청소 일을 강제로 그만두게 되면서 플랜 75 가입을 고민한다.
미치의 사연을 중심으로, 친척의 신청서를 받게 된 플랜 75팀의 젊은 공무원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
안락사 시설에서 일하는 필리핀 이주노동자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의 시선과
죽음 이상으로 음울하게 보이는 블루 들이 영화의 전면을 흐른다.
푸르른 일몰 푸르른 흰 커틴 푸르른 흰 벽 푸르른 침대,
그래선지 플랜의 가치는 얼핏 굉장히 쿨해 보이는 면두 있다.
사실 당당하게 떠난다는 것은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고독사 보다는 멋진 일 아닌가,
그러나 그 대상은 결국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들이다.
존엄을 이야기 하지만 존엄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처리>다.
자연,
자연스러움이 배제되면 거의 모든 일이 그렇다.
플랜 75는 미래판 고려장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너무 리얼리틱 해서 우리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닥칠지도 모른다.
코로나 시절에 인공호흡기를
늙은이들은 젊은이를 위해 양보해야 한다는 소리도 있었다.
외국 어딘가에서는 무차별적인 노인의 죽음에
복지 예산이 줄어서 기뻐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영화는 에둘러 표현하거나 감싸는 것도 없이 직진한다.
그저 노년과 그들 앞에 선 죽음으로,
죽음의 성향도 그러지 않을까?
기억도 외로움도 쓸쓸함도 꿈같은 시간도 아주 잠깐 흐르지만
죽음은 저기 자그마한,
빤히 보이는 개울가 건너편에 있다.
감독은 카메라 앵글의 흐릿함으로 세상이 해피엔딩이 아나라는 것을 표현했다고 했다.
“아무리 높은 파도라도 결국 수평으로 되돌아 가듯이
본 적은 없으나 되돌아 갈 곳은 있다고”
이어령 선생은 마지막 수업에서 본향에 대해 말했다.
영화를 보는 것은 카르페디엠이다.
영화를 보고 난후 생각하는 것은 메멘토 모리다.
영화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생각은 아주 긴시간 속에서 하는것이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음식을 더욱 맛있게 먹는일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에 대해 더욱 아름답게 여길수 있는,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더욱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카르페디엠을 지향하며 살지만
결국 나는 메멘토 모리족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바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