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태백
한겨울에 무궁화호를 타고 강원도를 가는 것이 십여년 동안 나의 작은 루틴이 되었다.
정선도 가고 고한도 가고 사북도 갔다. 민둥산에서도 내려 봤다.
눈꽃 열차를 타고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추전역도 내려서 걸어봤다.
그곳에 가서 하는 일?
아무것도 없다.
그냥 낯선 동네를 어정거리다가 점심 사 먹고 마음에 든 카페가 있으면 커피 한잔하며 몸을 좀 녹이고
다시 동네를 어정거리다가 네 시쯤 기차역으로 가서 청량리로 돌아오는 것,
이 무미건조한 여행이라니,
그래선지 하지 말라는 유혹도 사실 거세다.
집에서 청량리까지 두 시간을 잡아야 넉넉하니
기차와 전철을 타는 시간이 열 시간이 족히 넘는다.
편안함을 원한다면 집이 훨씬 더 좋다.
작년에도 갔잖아, 재작년에도 갔었고, 그 전전해도.....
그리고 겨울은 올해도 또 올 것이야, 굳이 가야만 해? 오늘 컨디션 별루잖아,
내가 나를 유혹하는 일도 제법 차지게 다가선다.
그래도 갈 거야. 나는 내게 단호하게 말한다.
가끔 스스로에게 단호해질 때 나는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백팩에는 릴케의 로댕을 넣는다.
가볍기도 하지만 많이 읽지 않아도 몇 줄만으로도 충분한 글이니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독서의 종류를 구별하는 것을 나는 참 좋게 생각한다.
굉장히 아주 굉장히,
모든 것들처럼,
독서도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게도 몇 가지 터득한 독서법이 있다.
마음이 산란할 때는 절대 시를 읽지 말 것,
모든 아름답고 좋은 길이 그러하듯
시의 길도 협착하여 시를 향하여 갈 때만 시도 길을 내준다.
그러니 마음이 산란할 때 시는 안된다.
기차에서는 소설을 읽지 말 것,
줄거리에 빠지게 되면 절대로 다시 볼수 없는 창밖 풍경화들은 금새 사라져 버리니,
사실 바라보고 있어도 금방 사라진다.
그러니 어쩌면 기차여행은 사라지는 것들을,
그 사라지는 순간을 보내며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인생의 순간들이 그러하듯,
사라짐에 대한 학습!
삶을 잘보내는 일을 배우는 것일 수도,
라이너마리아릴케( 참 이 이름은 여전히 소녀적 감성을 일으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인지,
한 줄 읽고 창밖을 쳐다보면 그 흔한 풍경들에
로댕이 끼어들기도 한다.
로댕의 우는 말일지. 코가 부러진 남자일지, 아이고 그 거대하고 아름다운 손일지,
릴케의 느낌으로 더 풍부해지는 로댕을 생각하는 여행,
가볍고 얇어서 더 좋다.
조금 옛 날책이라 누우런 갱지, 그래서도 가볍다.
뜨거운 물 그리고 천혜향 세 개
몇 번 훅 불면 되는 목베게, 그리고 헤드폰도 필수 품목이다. .
책은 읽다가 읽지 않기도 하며
음악도 듣다가 듣지 않기도 한다.
졸리면 졸다가 다시 깨어 난다.
창가로는 수많은 풍경화가 스쳐 지나가고
그 풍경 속에 생각이 끼어 들기도 사라지기도 한다.
어쩌면 강원도보다 나는 기차 안의 그 편안함,
세상 어떤 것도 안해도 되는,
뭐랄까,
無와 함께 동행하는 無를 느끼는 막역한 상태라고나 할까,
요즈음 유행어로 해본다면 ‘기차멍’이다.
사람들을 떠났다고 생각하지만
기차 안의 사람들이 들어서기도 한다. 기묘한 냄새거나 거친 말소리거나,
음, 그정도야 또 너그러워야지, 너그럽지 못하면 여행이 아니다.
그중 자주 내리는 곳이 태백이다.
황지연못이 있기 때문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동네에서 솟아나는 연못이라니,
연못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옹달샘처럼 물이 솟아나는 모습이 보인다.
솟아나기 때문에 여기저기 둥그레한 물무늬가 그려진다.
빗방울과는 아주 다른 무늬다,
아주 작고 미미한 동그란 파문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다시 또 만들어지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그런 것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 있었다.
뭔가 그 솟아나는 물방울을 여기서 봐도 저기서 봐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못돼먹은 황부자의 전설과 낙동강 줄기의 시원에 대해 관계를 생각해보지만
현대인들의 그것처럼 아득하다.
태생이 촌사람이라선지 단촐한 음식이 좋다.
내가 부엌에서 일을 해봐도 가짓수가 많으면 정신도 없을뿐더러 청결도가 떨어진다.
그러니 식당을 찾아가면 거의 단품 요리집이다.
맛있을 확률도 청결도도 높을 수 있다.
황지 앞인지 옆인지 혹은 뒤인지, 여튼 가까운 시장에서 사먹는 옹심이가 맛있다.
감자로 만든 작은 새알 옹심이는 찹쌀 옹심이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움과 차짐,.
옹심이에서 부서져 내린 갈분 가루가 국에 넘쳐나선지 국물은 오지게도 뜨겁다.
김을 호오 불어제끼며 국물을 한 입 넣는다.
입에 들어서는 순간 온몸이 따뜻해지는 느낌,
다시 황지 연못을 세세히 느릿하게 보며 거닐다가 태백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세시간 반 기차를 탄다.
졸다 깨다 음악을 듣다 책을 몇 줄 읽다
어두워지는 창밖.
다시 그렇게 한해 겨울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