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은 기억을 더듬으며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아직은 남아있을 나의 흔적이 그리웠어.
회귀본능, 흐르고 흘러 당도한 고향은,
처연한 바람들을 가슴 한구석에 꾹꾹 눌러 담고 마주한 강릉은,
맥 빠진 기억이 비빌 언덕을 잃고 화려해져 있었지.
도시는 낯선 여행지와 다를 바가 없었어.
어릴 적 뛰어놀던 논밭엔 펜션과 카페들이 즐비해 있었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이질적인 공존의 촉감이 잊혀지질 않아.
차라리 낯설기만 했어도, 그저 이방인이기만 했어도,
그렇게까지 혼란스럽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따뜻한 눈빛으로, 애정 어린 손길로,
넓은 품으로 감싸주던 오랜 연인의 싸늘히 식어버린 마음을 보는 것 같았어.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나와 있지 않은 변심한 연인을 마주하고 있는 듯했지.
화려한 화장에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선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하라 재촉하듯 싸늘해져 버린 도시.
기다려도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리운 모습은 보이질 않았어.
시선 둘 곳이 없었어.
잠시 기댈 곳이 없었어.
내가 기억하고 나를 기억할 무엇이 보이지 않았어.
마을의 과거와 전설을 기억하던 이들은 떠나고
낯선 이방인들로 북적이는 동네와 재회하는 일은 변심한 연인이
새로운 이와 즐거워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욱신거렸지.
까만 허공을 향한 공허한 헛손질들..
훠이~ 훠이~ 가거라
훠이~ 훠이~ 그래 가려무나
받아들여야 했지. 이곳에도 나의 자리는 없다는 걸.
더는 이곳에 빛바랜 추억이나 어쭙잖은 주인정신을 따윌 품어줄 낭만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16년 만에 살아서 돌아온 아들.
꽃다운 청년에 사라져 희끗한 중년이 다 되어 나타난 차마 버리지 못한 아픈 손가락 때문에 더 병들고 찌들어 갔을 사람들.
언어로 치환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버린 신음과 탄식과 애증으로 들끓었을 밤에도
싫은 소리, 원망의 소리 한마디 하지 않으셨어.
나를 낳아준 이들이 사는 곳.
나를 키워준 이들이 머무는 곳.
세월의 풍랑이 휩쓸고 간 낡은 육신에 생채기처럼 깊이 파인 고랑을
고스란히 떠안은 한 여인,
파킨슨이란 괴물에 삼켜져 과거와 미래를 잃고
하루하루 사그라드는 한 사내가 있는 이곳.
늙고 병약한 사내 곁에서 시들어 가던 여인이 차려주는 밥상을 마주하는 일은 고역이었어.
너무나 그리웠던 집밥, 어머니의 손맛이었음에도 밥을 삼킬 수가 없었어.
꾸역꾸역 뭔가를 씹어대는 내 꼬락서니에 구역질이 났거든.
차려진 밥상에 본능에만 충실하면 되는 그 간단한 일이 내게는 그렇게 버거울 수 없었어.
'아무렇지 않게 잘 먹고 잘 자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보다.'
싶었지. 노쇠한 부모 앞에 면목 없는 죄인은 뻔뻔하지도 당당하지도 못했어.
그리웠던 여인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 싶었지. 철부지 아이처럼
그럴 수가 없었어.
아픈데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어.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할 수 없었어.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괜찮지 않은 나를 차마 그대로 보여줄 수가 없었어.
엉망진창, 만신창이의 날들이었지.
나는 다시 조난자가 되었어.
분리되어야 했어.
맘대로 널브러져 있을 수 있는 동굴이 필요했어.
사랑하는,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 염려의 눈길 밖으로 가림막 같은 방풍림 같은 도피처가 절실했어.
아플 때 아파할 수 있는.. 무거워 엎드려 울 수밖에 없는 눈물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태어나고 울고 웃던 곳.
고향 집에 와서도 은신처가 필요했던 거야.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챙겨 주고 돌봐주는 변함없는 내 편들과 있는데도
마음은 고요해지질 않았어.
꽁꽁 얼어붙은 마음의 빙하기는 살랑이는 봄바람에도 한여름의 땡볕에도 아랑곳없었지.
돌보고 보살펴야 할 이들로부터 염려의 눈초리를 받는다는 건,
지랄 총량의 한계치를 이미 탕진한 놈에겐 저주였지.
급한 대로 존엄을 지킬 피난처를 구했어.
비바람만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구호시설 같은 거처.
급조한 도피처였지만 더없는 안식처이기도 했어.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의 눈물과 다시 만났어.
발가벗고 아픔의 맨살을 다시 끌어안았지.
가면을 벗어 재치고 껍데기를 까던지고 엉망진창의 실체와 다시 만났지.
바닥을 쳐야,
그 천재지변의 맨바닥을 쳐야,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았어.
죽어라 울다가 죽은 듯 쓰러지던 날들
죽어라 웃다가 미친 듯 무너지던 날들
그대로 영영 깨지 않았으면 싶었던 밤들
밤보다 어두웠던 낮들이 갔어
겨울보다 추웠던 봄날이 갔어
만년설처럼 견고했던 빙하기의 하늘에도 나비가 날아들기도 하더군.
동토의 골짜기로 오염되지 않은 태곳적 맑은 샘물이 솟아오르기도 하더군.
짙눌렸던 마음의 짐으로부터 홀가분해지는 날이 더러 있기도 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