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무너지다

by 상상이상

그렇게 웃지 마. 창피하니까!

억지로 끄집어낸 것도 아닌 못내 들켜버린 이 '사랑' 때문에

이제 난 네 눈을 마주하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단 말이야.

이 향기롭고 달큰한 감정이 가슴에 피아났다는 이유로

숨겨둔 일기장에 적은 네 이름을 아직 다 펼쳐 보일 순 없단 말이야.


대충 나를 구겨 넣고 밤거리를 거닐어.

까만 어둠 속에서도 잔뜩 웅크린 채 나를 숨기기 바빠.

바람결에 손짓하는 데이지를 살필 겨를이 없단 말이야.


무엇이 매번 그렇게 복잡하냐고,

더 가까이 와서 마음을 열어달라고,

마음 깊숙한 바닥까지 손 넣어 만지게 해달라고 보채는 너,

조금만 더 함께 있자고 나를 잡아끄는 네 손을 풀어내는 일이 하루만큼씩 더 버거워지는 날, 넌 모르지.


내가 없으면 우주가 무너져 내릴 거라는 너처럼 '사랑' 앞에 단순할 수 없는 나야.

쉴 새 없이 밀려오는 너라는 파도에 무시로 젖어드는 나를 달래며

온몸에 피어오른 열꽃이 식기도 전에 네게서 묻어온 부스러기들을 털어내고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걸.

비좁고, 낡고, 휑한 그곳에.. 여전히 내 자리인 그곳으로 난, 돌아가야 하거든.

옹색해지는 내 과거에 대한 사죄였는지도 모르겠어.

그 너머에 펄떡이는 것들을, 뜨겁게 들끓는 것들을, 들키고 싶지 않아.

잃고 싶지 않아.

너에게 가는 길이야.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꼭 잡은 연인들의 손이 보였어.

그리웠어.

'보고 싶다' 보다 '그리웠다'는 말이 그때의 나와 더 어울리는 것 같아.

보다 진득하고 보다 사무치는 느낌이었거든.

아름답다.. 예쁘다.. 참 좋은 시절이구나.. 생각하며 걷다가 차오르는 습기를 느꼈어.

가슴에 높아지는 상대습도를 느끼며 청명한 가을햇살 아래 혼자만 여우비를 맞으며 걷다가

어디선가 진하게 풍겨오는 멍게향에 걸음을 멈췄어.

향긋한 멍게향에 네가 생각났지.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얼마 전 저녁을 먹으며 네가 했던 말들이 멍게향과 똬리를 틀며 내 머릿결을 스치고 있었어.


또르르..


네 손을 잡고 그 거리를 걷는 모습을 그려.

그네들처럼 다정히 웃으며,

그네들처럼 맛있는 음식을 건네며, 너와 함께 그 거리를 걷는 모습을 그려.

그 별거 없는 소박한 상상에 벅차오르는 가슴을 토닥이며

사랑하긴 하는가 보다, 내가 너를 사랑하긴 하는가 보다.. 내내 되뇌었었지.


네가 그래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너를 사랑해.

꾹꾹 눌러 짜내도 금세 다시 차오르는 화수분 같은 사랑은 어제보다 더 웅장하게 차오르는 마법을 부려.

당연히 외롭고 다시는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 생각했는데 사랑으로 부푼 나는 어디 한 군데 사랑이지 않은 곳이 없더라.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못할 절뚝이는 사랑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해.

경이롭기까지 한 이 감정, 너라는 바다에 빠져 너라는 파도에 철썩이며 수백만 개의 우주를 만나고 있어.

자연사를 거부했던 길 끄트머리에서 너로 인해 다시금 자연사를 들춰보게 되었던 거야.

살고 싶어 졌어, 다시


임시로 머물던 4층 목조건물, 외부 계단 2층 테라스에 전 세입자가 두고 갔을 버려진 어항을 집으로 들였다. 여러 날을 오르내리며 망설였었다. 들었다 놨다 이리보고 저리보고.. 허름하고 바랜 버려진 어항 따위가 계속 눈에 밟혔던 건 어쩌면 그 어항이 자신과 닮아보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뒤에 깨달았지만 사람이던 물건이던 버려진 것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람만큼이나 물건도 제 쓰임을 다하려면 애정과 시간이 필요했다. 기성품이 아닌 누군가 애정으로 손수 만들었을 어항은 규격도 만듦새도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치밀하게 들러붙은 실리콘을 제거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유리가게 사장님을 불러 바닥의 깨진 유리를 갈았다.


" 아니 새 걸로 사지, 왜 이런 데다 공을 들이세요?"

" 실리콘 없애는 것도 만만치 않았겠구먼.. 이게 보통 손이 가는 일이 아닌데.."


혼자가 익숙한 날들이었지만 눈맞춤 할 생명체 하나쯤 곁에 두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일었나 보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으로 향하다,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사람이 아니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품었나 보다. 겨울이면 유난히 삐걱거림의 데시벨이 높아지던 모양만 그럴싸한 날림으로 지은 목조건물의 한기를 달래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싶었나 보다.


물을 잡는다.

물고기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

새로 쏜 실리콘이 마르자 어항을 신줏단지처럼 쓸고 닦았다. 여과기를 설치하고 바닥재를 깔고 수질조절제, 박테리아제를 첨가했다.


며칠을 쓸고 닦던 어항에 물고기 한 마리를 담았다.

넓은 어항이 자유로움 보다는 외로움으로 느껴져 한 녀석을 더 데려왔다. 혼자가 아니라 든든했을까?

혼자가 좋았을까? 둘이 좋았을까?

그래도 넌 혼자가 아니었음 싶었다.


적잖은 물고기가 죽었다.

바람과 달리.. 기대와 달리..

배 고프지 말라고 듬뿍 넣어준 밥이 쌓이고 부패하는 바람에 또 죽었다. 무지와 과잉이 대상을 죽이는 과정을 거듭하며 녀석들을 이해하고 보살피는 방법을 배웠다.


혹여나 배고프진 않을까 하는 염려에 밥을 넉넉히 주는 것을 사랑이라 생각했다. 무지했고 경솔했다. 그건 폭력에 다름 아니었다. 사랑을 가장한 만행이었다.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

바르게 알아야만 비로소 바르게 사랑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권하는 것보다 내게 싫은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 관계의 기본임을 다시금 상기한다.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을 표방한 이기와 야욕을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자행되는 탐욕을 생각했다.

그 따위 사랑들에 대해 생각했다.


녀석들 덕분에 물이라는 물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체의 70%를 구성한다는, 지구 표면의 75%를 차지한다는.. 자연대기상태에서 기체, 액체, 고체의 세 가지 형태를 함께 나타내는 유일한 물질. 너무 흔해서 그 경이로움에 둔감해진 물은 알아 갈수록 신비로운 물질이었다.


지구상의 생명체들은 언제,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수소, 산소, 질소, 탄소, 황은 어떻게 생명의 틀을 갖춘 세포를 만들어 냈을까?


'물은 답을 알고 있다 - 에모토 마사루'에 심취한 적이 있다. 사이비과학 책이라 비난받는 책이기도 하다. 과학도가 아닌 비전공자에겐 참으로 솔깃하고 낭만적인 책이었다.


며칠새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심취했고 감동했다.

모두가 참이 아니고 모두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해도..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헤아릴 수 있었다.

어림짐작이었을 것이다. 보고 싶은 대로 보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을 것이다.


겨울에는 수온을 높이는 방법을

여름에는 수온을 낮추는 방법을 모색했다.

야생의 자율조절시스템을 가정의 한정된 환경에 재현하는 일은 이해와 관심과 대가(돈)가 필요했다.


모든 생명은 물에서 왔다는데.. 물의 기원, 생명의 기원, 지구의 기원, 우주의 기원.. 그렇게 거슬러 빅뱅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왜 비가 오는지? 눈이 내리는지? 바람이 부는지? 서리가, 이슬이, 구름이, 밤낮이, 계절이, 단풍이, 낙엽이.. 소소한 일상의 근원이 긍금했다.


식물과 동물과 미생물이 세균과 박테리아가

별과 달이 무지개와 오로라와 은하수가..

삼라만상의 이치가 긍금했다.

자잘한 현상 너머의 근원이 궁금했다.

움직임과 변화를 만드는 그 힘의 근원이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운명적으로? 나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가용 가능한 대부분의 시간을 나비를 찾아다닌 시절이 있다.

어느 날 참나무 숲을 거닐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작은 생명체를 만나게 된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에 반짝이는 에메랄드 빛 자태는 가히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그토록 아름다운 존재의 정체가 무엇일지? 너무도 궁금하였다.


그 후로 치명적인 나비앓이를 하게 된다.

요정처럼 작고 아름다운 녀석들을 마음에 들이게 되니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그 모습이 아른거려 끼니도 거르고 잠도 설치게 되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단지 볼 수만 있기를

잠시 곁을 내어주기만을

그저 무탈하게 건강하기만을 염원하는

더없이 지고지순한 사랑이었다.

사람을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한라산에서 백두산, 민통선 안까지..

눈보라 치는 한겨울 볼펜 볼 만큼이나 자그마한 나비 알을 찾으면서, 천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위장과 은신으로 비상을 꿈꾸는 애벌레들을 보면서, 그럼에도 어떻게든 그네들을 찾아 먹이로 삼는 천적들을 보면서.. 생로병사의 이치가 생명을 가진 모든 유기체의 난제임을 알았다.


양자역학, 뇌과학,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과학의 발전 속도가 특이점을 넘어선 지 오래이지만 우리네 일상은 여태 진보와 보수의 이데올로기조차 넘어서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실소를 머금곤 한다. 작은 미물? 들과의 교감을 염원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정작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로움을 좇고,

누군가는 의로움을 쫓고,

저마다 제 깜냥만큼의 하늘 아래에서 흔들리며 사는 거겠지..


적잖은 시간 자연과 함께 하며 깨달은 바는 바르게 알아야 비로소 바르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관심이 때론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관심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지만 사랑 없는 관심은 넘쳐난다는 걸 알았다.








화,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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