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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인 어디 없나요? 미남시인의 대명사!!

모던뽀이 백석의 사랑

대학 때 들은 웃긴 이야기

한 선배가 자신의 생일 선물로

남자친구에게

백석과 기형도 시집을 사달라고 얘길 했는데

막상 남친이 사온 것은

백석구의 시집과

기형수의 시집이었다는..

그 말에 배를 잡고 꺽꺽 웃었지만,

백석과 기형도는

그만큼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 시인이기도 하죠.


당대의 많은 시인들을 매료시켰으며,

해방 이후 후대의 시인들에게도

절대적이고 폭넓은 영향을 끼친

시인들의 시인으로 불리는 백석!

윤동주도 백석을 열렬히 흠모했구요.

‘별 헤는 밤’도 백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죠.

시인 안도현도

백석을 평생을 짝사랑 했노라고 고백하며

‘백석 평전’을 쓰며 그를 기렸구요.

소설가 김연수 역시

자신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이란 작품에서

월북 이후 참담했을 마지막 생애를 묘사하며

시인을 추모하기도 했습니다.  


평안도 정주가 고향인 백석은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가

1987년 해금되면서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백석이 유명해지게 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기생 김영한과의 운명적인 러브스토리 때문!!!

백석이 1936년 조선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함경도에서 영생고보(高普)의 교사로 일할 당시,

회식 자리에서 서울서 내려온 기생 ‘진향’을 만나게 됩니다.

이 때 옆자리에 앉은 게 인연이 되어

(이래서 회식이나 OT때의 자리 배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습니다.ㅎㅎ)

“죽기 전에 우린 이별은 없어요”란 말 한마디에

콧대 센 진향이 바로 백석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요.

이 진향이 바로 김영한입니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서

‘자야(子夜)’라는 아호도 지어주죠.

그래서 김영한은 ‘자야’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백석의 시 중 가장 유명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나오는 나타샤가

바로 자야였다고 합니다.


열렬히 사랑했지만

둘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이별하게 되었고,

백석에 대한 마음을 간직한 채 평생 홀로 지내며

‘대원각’이란 요정을 차려 큰 재산을 모은 김영한이

후에 천억 원이 넘는 대원각 땅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을 때

당연히 주위에서 이런 질문이 쇄도했겠죠?

‘아깝지 않느냐?’

이 질문에 김영한은 답합니다.  

“천억 원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이 대원각 땅에

후에 그 유명한 길상사가 들어서게 되죠.

이후 김영한은, ‘내 사랑 백석’이란 책을 출간하고,

백석 문학상도 제정하게 됩니다.


백석에 대한 김영한의 사랑은

백석의 사진을 보면 이해가 갑니다.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로 잘 생겼는데요.

김영한 뿐만이 아니라

당대 여류 시인이었던

모윤숙, 최정희 같은 모던 걸들이 호기심을 품던 대상이었구요.

독립운동가 조만식은

오산보고 재직 당시의 백석을 보고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용모도 출중하고 재주가 비범했다"라고 말이죠.

지금 나와도 리즈시절을 경신할 것 같은

185cm의 훤칠한 키에 옷도 잘 입어서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김기림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백석이 곱슬머리를 하고 광화문거리를 걸을 때면

마치 프랑스 파리의 거리를 보듯 거리가 환해졌다"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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