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KT&G 상상마당 시네마
2025년, 상상마당 시네마 영사기의 불빛은 쉼 없이 돌아갔고, 스크린 너머로는 수많은 세계가 피고 졌다. 극장 문을 열고 들어서던 발걸음들이 객석의 온기가 되고, 침묵 속에 흐르던 공기는 어느덧 누군가의 삶을 위로하는 빛이 되었다. 일상의 소란을 잠시 접어두고 어둠 속에 몸을 맡긴 채, 우리가 같은 장면에서 숨을 죽이고 같은 대목에서 옅은 탄성을 내뱉었던 그 모든 시간들이 모여 올해의 영화적 풍경을 완성했다.
이제 그 풍경의 중심에서, 2025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관객이 선택하고 열광했던 KT&G 상상마당 시네마 최다 관객 동원 영화 다섯 편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감독 츠키카와 쇼
개봉 2017.10.25
재개봉 2025.04.09
상영 기간 2025.05.01 -06.06
시놉시스 스스로를 외톨이로 만드는 ‘나’, 학교 최고의 인기인 ‘그녀’. 어느 날, 우연히 주운 [공병문고]를 통해 나는 그녀와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 "너 한 사람밖에 없어. 나에게 평범한 나날을 선사해줄 사람" 네가 건넨 영원히 잊지 못할 고백. 그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던 완연한 봄날에 맞춰 진행된 재개봉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당시 박스오피스에서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같은 가벼운 멜로 작품을 볼 수 없었기에, 이 영화처럼 맑고 투명한 청춘 로맨스를 찾는 관객들의 갈증이 상당했다. 덕분에 상상마당 시네마에서는 평소 보기 드문 교복 입은 학생 관객들이 눈에 띄게 늘었고, 봄나들이 삼아 극장을 찾은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 개봉작 중 이토록 확실한 '봄의 정취'를 담은 대안이 없었다는 점이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모은 핵심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지구를 지켜라!>
감독 장준환
개봉 2003.04.03
상영 기간 2025.11.05 - 12.22
시놉시스 병구는 외계인으로 인해 지구가 곧 위험에 처할 거라고 믿는다. 이번 개기월식까지 안드로메다 왕자를 만나지 못하면 지구에는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할 엄청난 재앙이 몰려올 것이다.병구는 분명히 외계인이라고 믿는 유제화학의 사장 강만식을 납치해 왕자와 만나게 해줄 것을 요구한다. 한편, 경찰청장의 사위인 강만식의 납치 사건으로 인해 경찰내부는 긴장감이 감돌고 지금은 뇌물비리 사건으로 물러나 있지만 왕년에 이름을 날렸던 명형사인 추형사는 병구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집까지 추적해 온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강사장은 기상천외한 고문을 견딜 수 없게 되자 급기야 병구가 수집해놓은 외계인 자료를 훔쳐보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이제 승리는 누가 상대방을 잘 속여 넘기는가에 달려있다. 외계인의 음모를 밝히려는 병구와 외계인(으로 추궁 당하는) 강사장의 목숨을 건 진실 대결. 과연 지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병구는 개기월식이 끝나기 전에,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할리우드 리메이크 소식과 함께 다시 찾아온 이 비운의 걸작은, 20여 년의 시간을 단숨에 가로질러 우리에게 도착했다. <부고니아> 개봉에 맞춰 상상마당 시네마 단독으로 기획된 특별상영은 수많은 관객을 홍대로 불러모았고, 예전의 충격을 다시금 추억하려는 중년층과, 전설로만 듣던 작품을 드디어 큰 화면으로 마주한 청년층이 나란히 앉아 숨을 죽이던 풍경은 꽤 인상적이었다.
<썸머 필름을 타고!>
감독 마츠모토 소우시
개봉 2022.07.20
상영 기간 2025.07.03 - 07.16
시놉시스 시대극 찐팬으로 영화 감독을 꿈꾸는 고교생 ‘맨발’. 영화 동아리에서 자신이 기획한 <무사의 청춘>이 탈락되자 직접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절친 ‘킥보드’, ‘블루 하와이’와 드림팀을 결성한다. 우연히 극장에서 만난 미래에서 온 의문의 소년 ‘린타로’를 주인공으로 전격 캐스팅한 ‘맨발’은 꿈에 그리던 촬영을 시작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지는데…
상상마당 시네마 여름 기획전의 작품으로 짧게 편성된 작품이었으나, 관객들의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도록 폭발적이었다. 기본 한 달이 넘어가는 상영 기간을 가진 순위 내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단 2주 동안 9회 상영되었으나 올해 관객수 3위라는 놀라운 지표를 만들어냈다. 모든 회차가 매진을 기록할 수 있었던 건, 여름이라는 계절이 가진 에너지와 <썸머 필름을 타고!>가 가진 청춘의 힘이었다. 살인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도 극장을 가득 채웠던 젊은 관객들의 눈빛 속에서,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도 아름다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린다 린다 린다>
감독 마츠모토 소우시
개봉 2006.4.13
재개봉 2025.09.17
상영 기간 2025.09.17 - 11.11
시놉시스 고교 시절 마지막 축제, 마지막 공연을 앞둔 밴드부. 하지만 팀에 문제가 생겨 공연을 못 할 위기에 처한다. "송! 밴드 안 할래?" 급하게 섭외한 한국인 유학생 송이 보컬로 합류하고 함께 엇박의 하모니를 만들어 나가는데...
개봉 20주년을 맞아 4K 리마스터링으로 돌아온 이 작품은 계절의 경계에서 더욱 빛났다. <린다 린다 린다>는 8월 말 늦여름의 열기 속에서 개봉해 선선한 가을까지 상영이 이어졌는데, 이 계절감이 영화의 분위기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무더운 연습실에서 땀 흘리던 소녀들의 모습이 늦여름의 습도와 공명했고, 고교 마지막 공연을 마친 뒤의 여운은 가을의 문턱과 연결되었다. 리마스터링을 통해 한층 선명해진 영상미는 기존 팬들에게는 재관람의 가치를, 신규 관객에게는 고전의 세련미를 전달하며 장기 흥행의 발판이 되었다.
<해피엔드>
감독 네오 소라
개봉 2025.04.30
상영 기간 2025.05.01 - 09.14
시놉시스 점멸등이 일렁이는 근미래의 도쿄. 음악에 빠진 고등학생 ‘유타’와 ‘코우’는 친구들과 함께 자유로운 나날을 보낸다. 동아리방을 찾아 늦은 밤 학교에 잠입한 그들은 교장 ‘나가이’의 고급 차량에 발칙한 장난을 치고, 분노한 학교는 AI 감시 체제를 도입한다. 그날 이후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검증된 고전과 쟁쟁한 재개봉작들 사이에서, 2025년 관객수 TOP5 중 유일한 신작인 <해피엔드>가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규 개봉을 지나 배급사 기획전까지 이어지는 무려 5개월의 장기 상영 동안, 관객수는 꺾이지 않고 꾸준히 유지되었다. 익숙한 명작들 틈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며 오로지 작품의 힘만으로 관객을 불러 모았다. 한 번 본 관객들의 높은 만족도가 입소문으로 이어지며, 2025년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가장 기특하고도 묵직한 흥행 기록을 써 내려갔다.
스크린 위에서 빚어진 다섯 편의 기록은 단순히 숫자의 결과가 아니라, 그 숱한 시간 동안 객석을 지켜준 관객들의 마음이 빚어낸 찬란한 증거다. 비록 이 포스팅에서는 관객 수가 가장 많았던 다섯 편의 작품만을 소개했으나, 올해 상상마당 시네마를 거쳐 간 모든 영화는 저마다의 빛으로 누군가의 삶에 소중한 균열을 냈음을 믿는다.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누군가에게는 뜨거운 용기를 건넸을 수많은 영화들이 여러분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휘발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꺼이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준 수많은 관객 한 분 한 분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전한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스크린의 빛이 아니라, 그것을 응시하는 관객의 눈빛으로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매일 아침 관객분들을 맞이하며 다시금 깨닫는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소중한 이의 손을 잡고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던 그 모든 뒷모습이 올 한 해 우리를 움직이게 한 가장 큰 동력이었다.
2025년 한 해 동안 우리가 나누었던 그 짙은 여운을 동력 삼아, 여러분이 보내주신 그 귀한 시간들에 보답하기 위해 더 치열하고 다채로운 영화적 세계를 성실히 길어 올릴 것이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도 스크린이 내뿜는 온기만큼은 여전하기를 바라며, 다가오는 2026년에도 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다시 반갑게 마주하기를 기다린다.
지난 2005년 온라인 커뮤니티를 시작으로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KT&G 상상마당은 홍대·논산·춘천·대치·부산 등 총 5곳의 오프라인 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있으며, 신진 아티스트 지원과 지역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는 등 대중 문화향유 기회 확대를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