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극장

스크린에 내려앉은 겨울의 온도

2026년 1월, KT&G 상상마당 시네마


1년 중 가장 시리고 날카로운 1월. 두꺼운 외투 속으로 파고드는 찬 공기를 피해 들어온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공간을 넘어, 온기와 안도감을 주는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이 차가운 계절에 유독 더 몰입하게 되는 영화들을 찾게 된다는 사실이다.


계절과 완벽히 어우러지는 영화를 관람할 때의 만족감은 각별하다. 스크린 속에 가득한 설경이 객석의 서늘한 공기와 만날 때, 혹은 시린 배경과 대비되는 인물들의 뜨거운 온기가 전해질 때 영화의 여운은 배가 된다. 날씨라는 자연적인 맥락이 영화의 미장센과 만나는 순간, 관객은 단순히 작품을 '관람'하는 것을 넘어 그 계절 자체를 '체험'하게 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연이은 한파로 유독 추웠던 이번 1월,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관객을 만난 작품들 가운데 겨울이라는 계절과 가장 잘 어울렸던 영화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하의 기온 속에서도 관객들의 발길을 이끌었던, 겨울의 농도를 한층 더 깊게 만들어준 다섯 편의 기록이다.








1 · 러브레터

common (70).jpeg


<러브레터>

감독 · 이와이 슌지
개봉 · 1999.11.20
KT&G 상상마당 시네마 두 번째 겨울 기획전 [겨울 클래식] 특별 기획 상영작
시놉시스 · 중학교 시절, 같은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애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어느 날, 잊고 살았던 그 남자애의 연인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무심코 편지에 답장을 쓸 때만 해도 저는 몰랐습니다. 가려졌던 제 기억 속 첫사랑이 누구였는지 깨닫게 될 줄은... "아직도 마음속 그리움이 남아 있습니까?"


cn28mlmIKCzLPGFLbZUcyBKPifK.png
다운로드 (3).jpeg


누군가는 이제 너무 익숙한 이름이라 말하고, 또 누군가는 이미 다 아는 풍경이라 치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겨울의 초입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러브레터>를 떠올리는 건, 이 영화가 대체 불가능한 계절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상마당 시네마가 이번 1월, 특별 기획 상영을 통해 이 오래된 편지를 다시 꺼내어 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얀 눈밭 위로 울려 퍼지는 안부는 상실의 아픔을 간직한 이들에게는 치유의 손길이, 첫사랑을 추억하는 이들에게는 아련한 향수가 된다. 수많은 겨울 영화가 지나간 자리에도 여전히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지키는 이 작품은, 익숙함조차도 스크린에서 마주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선명한 취향임을 증명한다. 찬 바람이 부는 계절마다 어김없이 관객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 안부는, 올해도 상상마당의 겨울 라인업 중 가장 반가운 응답으로 남았다.





2 · 여행과 나날

common (82).jpeg


<여행과 나날>

감독 · 미야케 쇼
개봉 · 2025.12.10
시놉시스 · 슬럼프에 빠진 각본가 ‘이’는 어쩌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말로부터 도망치듯 설국의 작은 마을로 떠난다. 지도에도 없는 깊은 산 속 여관을 찾은 ‘이’는 수상할 만큼 무심한 주인 ‘벤조’와 머물게 되고 이윽고 폭설이 쏟아지는 밤, 어쩌다 ‘벤조’를 따라 나선 ‘이’에게 긴 꿈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imgi_5_10.jpg
03.jpg


온통 하얀 설국을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이 영화의 영상미는 굳이 비행기 표를 끊지 않아도 홋카이도 한가운데 뚝 떨어진 것 같은 대리 만족을 선사한다. 발길이 닿지 않은 순백의 설국, 그 끝없는 지평선 위로 쌓인 적막은 소란스러운 일상을 잠시 멈춰 세우기에 충분하다. 특히 우리에게 친숙한 심은경 배우가 낯선 설경 속을 유영하며 보여주는 담백한 연기는 자칫 차갑게만 느껴질 수 있는 겨울 풍경에 기분 좋은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뽀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와 고요한 정적, 차가운 눈 입자가 만져질 듯 생생한 영상미는 1월의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가장 확실한 '겨울 여행 티켓'이 되어주었다.





3 · 굿 포 낫씽

common (78).jpeg


<굿 포 낫씽>

감독 · 미야케 쇼
개봉 · 2010년
재개봉 · 2026.01.14
시놉시스 ·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너무 일이라고만 생각하면 재미없거든 평소처럼 얘기하면서 해도 돼 평소처럼 말이야 노는 거랑 같지” 어른이 되려다 번번이 길을 잃는 세 청춘이 순백의 삿포로 속을 떠돌며, 아무것도 아니었어서 ‘특별한 겨울’을 마주하는 꿈 같은 이야기


common (80).jpeg
common (79).jpeg


순백의 삿포로를 배경으로 갈 길 몰라 헤매는 세 청춘의 모습은 겨울밤의 정취와 묘하게 맞닿아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요즘 가장 주목받는 미야케 쇼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신작 <여행과 나날>의 개봉에 맞춰 한국에서는 최초로 스크린에서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흑백 화면으로 담아낸 삿포로의 거리는 화려하지 않지만, 그 안을 유영하는 인물들의 방황은 그 자체로 특별한 리듬을 형성한다. 순백의 삿포로를 배경으로 길을 잃고 헤매는 세 청춘의 모습은 겨울밤의 정취와 묘하게 맞닿아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던 일상이 겨울의 계절감과 만나 '꿈 같은 이야기'로 변모하는 순간, 관객은 자신의 시린 청춘 한 자락을 발견하게 된다. 재개봉을 통해 다시 만나는 이 영화는 여전히 춥지만 아름다운 청춘의 겨울 기록이다.





4 · 마이 선샤인

common (73).jpeg


<마이 선샤인>

감독 · 오쿠야마 히로시
개봉 · 2026.01.07
시놉시스 · 홋카이도 작은 시골 마을의 아이스링크. 아이스하키에 집중하지 못하는 소년 ‘타쿠야’는 빙판 위에서 춤추는 소녀 ‘사쿠라’의 스케이팅에 시선을 빼앗긴다. 혼자 어설프게 동작을 따라 해보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오는데… “아이스 댄스를 해보자” 첫눈과 함께 처음으로 잘하고 싶은 게 생겼다!


common (74).jpeg
common (76).jpeg


홋카이도의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소년과 소녀의 호흡은 겨울 햇살처럼 맑고 투명하다. 영화의 절반 가까운 분량이 아이스링크 위에서 펼쳐지고, 링크장의 밖으로 나서도 키만큼 높게 쌓인 눈더미와 꽝꽝 얼어붙은 호수, 빨갛게 상기된 얼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처럼 영화의 모든 장면이 겨울의 극치를 달리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추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스하키 채를 붙잡고 두려움에 떨던 홀로 빙판 위에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던 소녀가 서로의 손을 잡고 피겨 스케이팅 동작을 맞춰가는 그들의 모습은,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설국을 가장 따뜻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뺨을 스치는 칼바람조차 잊게 만드는 성장의 열통과 설렘은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작은 태양을 띄운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단순히 춥기만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온기를 내어주고, 서로의 온기를 가장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계절이라는 다정한 메세지를 건네온다.





5 · 6번 칸

common (71).jpeg


<6번 칸>

감독 · 유호 쿠오스마넨
개봉 · 2023.03.08.
KT&G 상상마당 시네마 단독 특별 기획 상영작
시놉시스 · 고대 암각화를 보러 가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오른 핀란드 유학생 '라우라'. 무르만스크행 기차에서 낯설고 무례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두 사람의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변화한다. 이 여행의 끝에 불완전한 그들은 어떻게 될까?


EDRYnXkeSOk.jpg
common (72).jpeg


눈 덮인 러시아의 밤을 가로지르는 기차, 그 안의 6번 칸에는 서로 다른 온도를 지닌 두 남녀가 마주 앉아 있다. 어색한 침묵과 다름에서 비롯된 불쾌감이 이어지는 동안 창밖의 풍경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은 조금씩 자리를 바꾼다. <6번 칸>은 관계가 완성되는 순간보다, 어긋난 채로 함께 시간을 건너는 과정을 오래 응시한다. 화려한 극적 장치 대신 투박하게 쌓아 올린 시간의 결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유대감을 빚어낸다. 차가운 풍경과 대비되듯, 완전하지 않기에 더욱 진하게 남는 감정들. 불완전한 상태로 타인과 함께 겨울을 통과한다는 것, 그 서툰 동행이 남긴 온기는 스크린을 넘어 관객의 마음에 고요히 내려 앉았을 것이다.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한 다섯 편의 영화를 나란히 놓고 보니, 그중 네 편이 일본의 홋카이도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이웃 나라의 그 설국이 우리에게 얼마나 강렬한 '겨울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는지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스크린 가득 펼쳐진 낯선 이국의 눈밭을 응시하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 땅의 풍경들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가령 평창의 대관령처럼 우리나라가 품은 깊은 설경을 배경으로, 그 시린 아름다움을 오롯이 담아낸 겨울 영화를 스크린에서 마주할 수 있기를 내심 기대해 본다. 이러한 기대와 상상이, 여러분이 추운 겨울날에도 계속해서 극장을 찾게 만드는 조용한 원동력이 되길 바라며.


이렇듯 각자의 겨울을 품은 이들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도착한 1월의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마주한 다섯 편의 이야기는, 때로는 시린 눈밭으로, 때로는 좁은 기차 칸의 흔들림으로 각기 다른 겨울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계절의 온도가 낮아질수록 스크린 위의 풍경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던 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 차가운 배경 속에서 기어이 피어나는 작은 온기들을 함께 응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 입춘을 앞둔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장면이 가장 깊은 자취를 남겼는지 궁금해진다. 계절과 영화가 만나 완성된 그 특별한 만족감이 일상의 추위를 이겨낼 작은 힘이 되기를 바란다. KT&G 상상마당 시네마의 문을 나서는 모든 관객 여러분의 발걸음에, 상영관 안에서 함께 나누었던 그날의 온기가 오래도록 머물기를 소망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025년, 관객들에게 가장 사랑받은 영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