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살구둑 마을을 걷다 보면.

by 강화진

치악산을 뒤에 둔 우리 집은 시내에서 십오 분 떨어진 거리에 있지만 과수원이 있고 밭이 있고 논도 있는 시골이다.

가끔 버스를 타고 수변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데 더운 여름날엔 저 너머로 기울어지는 노을을 보며 걷다 보면 아랫마을 시내와 이곳의 온도가 다름을 느낄 수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치악산을 넘어온 바람이 심어 놓은 작물을 지나 각각의 다른 향기를 품은 채 불어오고 봄에는 길 양쪽을 가득 채운 붉은 노을에 빛나는 살구나무의 달콤함까지 더 해진다. 살구에서 나는 향기에 그 자리에서 대강 닦아 먹기도 하는데 매연, 먼지 이런 것들에 대한 걱정은 살구가 뿜어내는 향기 속에 이미 사라져 버린 뒤다.


집에서 나와 황골 쪽으로 걷다 보면 왼쪽으로 작은 길이 나오는데 이 길은 행구동 큰길 뒤에 있는 작은 시골길이다.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작은 이 길엔 사람도 차도 거의 지나가질 않는다. 길 따라 함께 내려가는 작은 시내에서 들리는 물소리, 길 넘어 산에서 들리는 새소리 가끔 저 쪽 동네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와 걸을 때 스치는 바람소리만이 이 길에서 들리는 소리의 전부이다.

이른 아침 이 길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이슬의 싱그러움이 가득하고 저녁 무렵의 길은 지는 해의 붉음이 치악산을 붉게 물들이고 아래로 내려오며 산 아래 동네를 그리고 내 앞까지 물들인 후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한다. 길 위에서 반짝이는 아침을 맞고 붉은 노을의 사라짐을 바라볼라치면 주체하기 힘든 마음은 통통 튀기도 하고 끝없는 고요 속으로 침전되기도 한다. 이 길은 끝도 없을 것 같던 힘듦이 이어지던 때 알게 된 길이었는데 나는 이 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만난 자연에게 위로를 받고 있었다.

겨울을 견뎌낸 작고 여린 새순이, 차가운 얼음 아래로 흐르면서도 경쾌했던 시냇물이, 가끔씩 음머~하던 착한 눈의 소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볏짚 위로 나오던 마늘 싹이 주는 생명의 신비가 인생의 겨울을 보내고 있던 내게 전해지자 이 길에서 겨울과 봄을 보내던 내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걸음의 힘은 삶의 힘으로 이어졌다. 생명이 생명을 살린다는 것을 이 길을 걸으며 알게 된 시간이다.


이웃에 사는 어르신과 아침 산책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산책인 줄 알았는데.......

석경사를 지나기 전까진 산책이었는데 조금 더 가보잔 말을 들은 나는 그날 산을 넘어야 했다. 숲길을 헤치고 다다른 길은 햇살을 받은 행구동 맨 위 카페가 있는 동네였다. (황골에서 산을 넘자 행구동인 동네) 다시 길을 내려와 작은 길로 들어서자 마을이 보이고 구경을 하며 집에 돌아오는데 산책 시간만 두 어 시간인 등산이 되어버렸다. 길을 걷고 산을 넘은 그날 나는 길이 길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걸으며 알게 되었다.

인생길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살아가며 배우고 있는데 길은 길로 이어지고 사람은 사람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 없는 길이 알려 주었다. 어르신과의 산을 넘은 산책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지만 우연히 수변공원에서 만나 이들에게까지 이 길을 알려 줄 정도로 이곳은 잊히지 않는 곳이 되었다.


친구 산방이 치악산 밑에 있는데 우리 집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가끔 산방에 들러 차를 마시는데 산방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이곳 또한 작지만 근사한 소나무 숲길과 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계곡의 물을 볼 수 있다. 전에 마음이 상했던 날 상하게 한 이가 이곳을 걷자고 한 적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걷다 보니 마음을 상하게 한 상대였던 이와 다시 다정한 말을 나누고 있었다. 고요함이 주는 치유를 알게 된 날이다. 말이 마음을 만지기도 하지만 그냥 바람을 맞고 졸졸 흐르는 물에 손 한 번 담그고 길가에 피어난 꽃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만져질 수 있다는 것을 배운 날이다. 자연이 주는 소리는 소리가 아닌 고요함이란 막연한 생각이 확신이 된 시간인데 지금도 마음이 시끄러워지면 사람의 소리를 피해 자연의 소리, 그 고요함을 찾게 된다. 스스로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감정이 폭풍처럼 올라올 때 가만히,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자 하는데 놀라울 정도로 이 시간이 지나면 폭풍이 가라앉음을 경험하게 된다.


몇 년 전 눈이 많이 온 날 차를 타고 가다 산을 보게 되었는데 눈으로 덮인 치악산은 웅장했다. 저 아랫동네에서 윗동네인 우리 동네까지 하얀 눈이 쌓인 치악산을 이어지게 보며 올라올 땐 그 근사함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은 산을 쫓고 입은 감탄의 소리로 가득했다. 산을 오르는 것보단 보는 것을 훨씬 좋아하는 나로서는 설산의 웅장함을 매 년 겨울에 보고 봄이 되면 연두가 초록으로 변해가는 시간을 보는 것도 행복한 순간이다. 나무는 생김도, 채도도 모두 다른데 어우러져 하나의 멋진 산을, 길 가를 이루어 가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어느 해 봄 문득 들어온 이 생각을 한동안 한 적이 있었다. 나무도 다 다르구나……. 사람이 다 다르듯 나무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자 자연의 모든 것들이 신비로워 보였다. 멀리서 보면 같은 초록인데 잎 하나하나마다 다른 초록을 지닌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만물이 다 각각의 자기다움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뭇잎의 다름이 알려 주었다.


가끔 퇴근을 하다 저 너머로 지는 해를 집 앞에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 집으로 들어오곤 한다.

붉은빛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바라보자면 내가 사는 삶이 풍요롭기도 하고 때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그 마음은 아침에 햇살 가득한 동네를 산책할 때와는 전혀 다르나 틀리지 않은 순간이다.

다르나 틀리지 않음을 자연은 모든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우리의 아둔함이 그것을 그냥 지나치고 있다.


이름 고운 '살구둑' 우리 마을은 치악산 아래 작은 마을이지만 그 마을이 품고 있는 자연은 내게 우주와 같은 크기로 이 세상을 알려주고 있다. 이 마을에서 사는 동안 나는 이 우주를 매일 만나게 될 터인데 곧 시작될 봄은 또 다른 세계를 나에게 보여줄 것이다. 살아갈 힘을 공급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