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짐을 대신 짊어진 동행의 뒷모습

마음의 축을 찾기 위해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열하루의 기록 [3]

by sw

한국 시간으로 지난 5일 오전에 2일 차를 올리고 금세 사흘이 흘렀다. 순례자의 길 여정을 마무리하고 잠시 한국에 들어와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는데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의 일상 속에서 느끼는 다양한 단상들(예를 들면 엊그제는 공사장 가림막에 붙은 큼지막한 '서울'이라는 단어를 너무 오랜만에 보아 게슈탈트 붕괴가 와서 혼자 "서울... 서울..." '이렇게 단어가 예뻤나?' 하면서 꼴값을 떨기도 했다.)도 쉽게 쉽게 글로 풀어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내 성격이 본래 그렇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테마로 연재글을 시작했는데 그 사이에 '서울이라는 단어가 낯선데 아름답다' 식의 일상 글을 뚝 끼워 넣는 게 용납이 되지 않는다. 눈치챈 독자도 있겠지만 첫 글의 제목을 '순례자를 위한 포르투 화가의 기도'로 지은 다음부터는 통일성과 리듬감을 유지하고 싶어 모든 글의 시작을 '순례자'로 이어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점점 포괄성과 센스를 둘 다 지닌 제목을 짓기가 어려워진다. 여기까지 짧게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담고, 다음다음 문단부터는 다시 3일 차의 기록을 해보기로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는 스포티파이에서 'Best of Rachmaninoff' 정도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두고 읽어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다. 별 다른 이유는 없고, 어제 모처럼 교보문고에 들러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잠깐 펼쳤다가 그 자리에서 두 시간 반을 서서 한 권을 다 읽고 말았기 때문이다. 브람스를 좋아하게 되었고 사강의 표현에 큰 매력을 느꼈다. 특히 "관자놀이에서 박동 소리가 울렸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귀에 대답하는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표현이 너무 좋아서 아마 언젠가 한 번 차용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3일 차는 내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하루로 남아 있다.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큰 위기가 찾아온 날이기도 했다. 1일 차와 2일 차 이틀간 걷는 내내 비바람을 맞으면서 몸상태가 많이 다운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숙소다운 숙소에서 잠을 청하면서 우리의 기상이 예상보다 늦어졌다. 게다가 대단한 호텔은 아니었어도 호텔은 호텔이기에 나름 스크램블 달걀이나 베이컨 따위의 간단한 아메리칸 아침 식사도 준비되어 있었다. 바보 형제는 신이 나서 늦장을 부리다가 출발이 매우 늦어졌고 이는 모든 악재의 시작이었다. 내가 글을 쓰듯이, 형은 매일 아침 출발하면서 인사하는 영상을 촬영했는데, 이 날은 출발 영상 촬영 시간이 무려 10시 21분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서, 평생 다시 입을 일 없을 줄 알았던 비에 젖은 판초우의를 또 입지 않아도 돼서, 둘 다 신이 나서 걸었다. Marinhais 지역을 지나면서 슬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작은 성당부터 시작해서 마을 곳곳의 성탄 구유까지 성탄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특히 마을 곳곳의 성탄 구유를 보면서는 내 학부 모교인 서강대학교가 자주 떠올랐다. 우리 학교도 매년 성탄절을 앞두고 아주 아름답고 평화로운 성탄 구유를 설치하는데, 종강하고 나서 여유로운 연말에 슬쩍 밤 산책을 나가서 그 반짝거리는 구유를 보면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

한 시간쯤 열심히 걷다가 아주 귀여운 양 떼를 보았다. 어미와 아비 양으로 보이는 큰 양 두 마리와 나머지 새끼 양 세 마리가 함께 졸졸졸 거리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정말 같은 발 박자로 졸졸졸 어디론가 가는데, 길 한 복판에서 그렇게 양 떼를 보고 나니까 '정말 성지순례를 하고 있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엄마가 무릎에 앉혀 놓고 아기 때 읽는 그림 성경 같은 걸 많이 읽어주셨는데 잊을 만하면 양, 양, 양이 항상 나왔다. 이번에는 내가 본 그 상황에 맞는 구절이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 숙소에 가서 열심히 찾아봤는데, 이사야 53:6의 말씀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Sao Bartololmeu do Mar 골목을 지나는 동안에는 정말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마주했다. 특히 담벼락에 올라타서 왜 이 추운 겨울에 사서 고생하냐는 듯이 우리를 쳐다보는 길고양이들. 그리고 폐교 같이 보이는 저층 건물에 적힌 우리나라 한글로 적힌 글씨도 있었다. "좋은 길, 좋은 방법." 'Buen Camino'라는 게 영어로 Good way로 번역되는데, 이게 말 그대로 좋은 길도 되지만 좋은 방법도 된다. 여러 나라 글로 적힌 부엔 까미노 중에서 우리나라의 글이 가장 미적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는 게 직역해서 좋은, 예쁜,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는 것이지만, 조금 의역하면 좋은 방법과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노력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뒤에서 걷는 내내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가리비 껍데기와 화살표가 가리키는 길이 때로는 구글맵에서 알려주는 간편한 지름길, 평지길보다는 돌아가는 길, 울퉁불퉁한 돌 길, 산 길, 언덕 길인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몸으로 많이 체험했다. 그리고 실제로 걷는 내내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지난 이틀간은 비가 와서 가방 속에 넣어 두고 걸었는데, 아끼는 닻이 달린 책갈피도 꺼내 가방에 달고 걸었다. 닻은 배가 조류나 비바람 따위에 떠내려가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 조그마한 물건이 그런 안정감을 내게 주었다.


오후 1시가 되어갈 무렵, 한 8km쯤 걸었을 무렵부터는 발목에서 처음 느껴보는 통증 같은 게 찾아왔다. 조금씩 걷는 속도가 느려졌던 것 같다. 영상을 보면 이때쯤부터 형이 앞에서 셀카 모드로 영상을 찍으면서 뒤에 있는 나를 부르는 구도가 잦아졌다. Antas라는 마을에는 정말 싱싱한 과일이 가득 열린 과일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오렌지, 귤, 레몬,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자몽 나무까지.

이전 글에 내가 미각이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비슷하게 식욕도 그리 강한 편이 아니라 과일나무를 보고도 과일이 당긴다는 생각은 잘 안 했다. (껍질 있는 과일은 누가 까주면 먹고 아님 마는 전형적인 게으름뱅이다.) 그런데, 형은 한마디로 과일에 미친 사람이었다. 창세기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처럼 긴 팔을 쭈욱 뻗어 오렌지, 귤, 레몬, 자몽 등을 꼭 두 개씩 따서 내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하필 형이 처음 따 준 과일이 레몬이었는데 몹시 셔서 거의 고깃덩어리를 본 들개처럼 침이 줄줄 나왔던 기억이 난다.


나와 같은 굉장히 목표지향적인 MBTI를 가진 형인데, 자상한 구석이 많아 여행하는 내내 서로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나중에 내 발목이 더 악화돼서 형보다 걷는 속도가 많이 늦어졌을 때는, 형이 과일을 따서 도로 한복판에 올려두고 가서 그 과일을 보며 피식 웃을 때도 있었다. 거의 헨젤과 그레텔 느낌이었다. 나중에는 반대로 형이 걷다가 흘리고 간 장갑 한쪽을 내가 발견해서 주워다 준 재밌는 일화도 이야기해 보겠다.

Antas라는 지역을 걸으면서부터는 슬슬 힘이 들어서 처음으로 노래를 틀고 걷기 시작했다. 캐럴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YMCA 같은 노래를 틀어놓고 형이랑 함께 춤을 추면서 걷기도 했다. Y M C A라는 알파벳을 그리는 율동을 추는 우리의 그림자를 촬영하면서 낄낄거리기도 했다. 이 모든 게 다 이 날 처음으로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가 오고 해가 뜨지 않았다면 춤을 추는 그림자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잊을 만하면 산이 등장했다. 분명 우리는 포르투 해안길로 시작했는데 왜 이렇게 산길이 많지? 하는 생각을 일찌감치 했어야 한다. 나중에 Camino 공식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은 뒤 알게 된 사실은 우리가 이 날 굉장히 어려운 길을 골라 헛 힘을 많이 뺐다는 것이다.

다행히 산 길을 걷는 동안 멋지고 아름다운 길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지난 며칠간 내린 폭풍우에 꺾인 나무들을 뛰어 넘어가며 걸었고, 그 폭풍우로 인해 만들어진 진흙길을 점프하며 걸었다. 돌이켜보면 이 날 이렇게 계속 뛰고 점프하고 돌길을 건너고 하는 과정에서 발목에 큰 무리가 갔던 것 같다. 오후 2시 반, Igreja Paroquial de Castelo do Neiva라는 성당까지 가서는 형과 나는 거의 모든 체력을 잃었다. 마땅히 점심을 먹을 만한 곳을 찾지 못해 굶은 채로 계속 걸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가방 속에는 어제 구입한 페레로로쉐가 인당 서너 알 정도 남아 있었다. 죄송하지만 성당 안에서 페레로로쉐를 한 알씩 까먹고는 숨을 고르고 다시 산 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형과 따로 걷지 말았어야 한다. 형이 내게 자신은 너무 힘들면 속도가 많이 빨라진다고,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퍼질 것 같으니 앞장서서 걷겠다고 했다. 흔쾌히 동의한 나는 내 페이스대로 오로지 화살표만 따라 걸었다. 그렇게 형과 떨어져 걸은 지 어느덧 한 시간 반. 형이 아무리 빨라도 뒤에서 실루엣이 늘 보였는데, 어느 순간 형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내 위치는 정말 산 꼭대기였다. 그리고 화살표가 가리킨 방향대로 계속 갔더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길을 형이 나한테 별말 없이 건넜다고?' 할 정도로 인간이 걸을 수 없는 길이 등장했다. 이미 세 번이나 미끄러져서 내 신발은 물에 젖은 대걸레처럼 눅눅해진 뒤였다. 급히 형에게 연락을 했더니, 형이 자신의 gps를 보내줬다. 나와 정반대였고, 형은 어느덧 도심으로 내려가 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는 스마트폰을 아예 보지 않고 오로지 노란 화살표만 따라갔고 형은 중간중간 구글맵 gps를 보며 어느 순간 오른쪽 하산길을 따라 내려왔다. 비가 오지 않아 길이 멀쩡했다면 내가 가던 길을 따라 쭉 가면 형과 얼마 안 가 만났을 것 같은데, 당시에 형과 나는 더 이상 멀어지면 안 된다고 판단했고 내가 형이 보내준 식당으로 가기로 결론을 내리고, 다시 혼자 올라왔던 길을 따라 내려가기로 했다.

서너 번쯤 미끄러졌던 그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가면서 정말 무서웠다. 발목이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정말 말도 안 되게 이 타이밍에 비가 다시 오기 시작했다. 정말 이 산에서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곧 해가 지고 내 만 26년 인생이 이름 모를 포르투갈의 한 산에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두려웠다.

오후 4시 30분, Castelo de Neiva - Sendim de Cima 근처의 한 우아한 식당에서 형을 다시 만났다. 센스 있는 독자는 눈치챘겠지만 두 문단 위의 성당 이름을 다시 보라. Castelo de Neiva가 겹친다. 그렇다. 아까 형과 처음 헤어졌던 그 성당에서 도보 5분 거리의 식당이었다. 형은 성당에서 서쪽으로 올라갔다가 동쪽으로 내려오면서 그냥 성당 위 산을 한 바퀴 탄 사람이 되었고, 나는 성당에서 서쪽으로 형보다 2배 뻗어 올라갔다가 같은 길로 다시 내려온 사람이 되었다.


이 날 저녁 같은 아주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처음으로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던 것 같다. 이대로 걸었다가는 우리 목표대로 도착하는 걸 떠나서 신체가 무너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Camino 앱을 다운로드하고 더는 구글맵 gps가 아닌 Camino 앱만 믿고 걷기로, 그래야 둘이 더 이상 엇갈리지 않는다는 결론이 났다. 둘 다 ENTJ 답게 서로를 감정적으로 원망한다거나 탓한다거나 이런 건 전혀 없었다. 그저 이번 대참사를 빨리 수습하고, 다시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해결책을 내는 데 집중했다.

오후 5시 30분, 양말이 정말 너무 젖어서 '동상원'이 될까 봐, 길 한복판에 쭈그려 앉아 물과 비에 젖은 양말을 갈아 신었다. 갈아 신는 중에도 비가 쏟아져서 사실 '완전히 젖은 양말'을 '젖고 있는 양말'로 갈아 신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걸맞은 비유가 하나 떠오른다. 예전에 탈부착형 배터리를 쓰던 초기 스마트폰 시절에 말이다. 한 10% 남은 기존 배터리를 빼내고, 완충해 놓은 줄 안 서브 배터리를 호기롭게 꽂았는데 잔량 15%라고 뜨는 그런 느낌이었다. 절망스러었지만 일단 갈아 신고 마저 걸었다. 이때쯤부터는 발목이 생전 처음 느껴보는 통증을 내게 주었다.

오후 5시 40분, 이미 해는 완전히 졌다. Day 3 메모장에 적어둔 문장을 그대로 가져와서 옮겨본다. "고속도로 해 지고 밤 5시 반부터 걷는데 폭풍우 쏟아지고 빛이 아예 없음. 차는 너무 빠르게 달려서 정말 생명의 공포. 저절로 찬송가 아주 크게 부르게 됨.ㅋㅋ" 발목이 정말 너무 아파서 5분도 더 걸을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열 보쯤 걸을 때마다 "으악" 소리가 절로 날 만큼 좋지 않았다. 어쨌든 2km 정도는 더 걸어야 문 연 호스텔이 하나 나왔다. 형이 이때 굳은 결심을 하고 내게 말했다. "가방 줘. 내가 들게." 형은 나랑 달리 랩탑과 두꺼운 침낭을 챙겨 왔기 때문에 나보다 가방이 많이 무거웠다. 그 와중에 가방을 들어준 형에게 당시에나 지금에나 많이 고마웠다.

형이 가방을 들어주니 열 보에 한 번씩 으악 할 정도로 찌릿하던 게 그 빈도가 반으로 줄었다. 대략 20보에 한 번씩 말도 못 할 전기통증 같은 걸 한 번 느끼고 다시 걷고의 반복이었다. 마지막 1km가 남아 있었다. 이때부터는 형이 내게 이 날의 기억이 가장 오래 남을 것 같지 않냐고 물었고 나도 그렇다고 했다.


문득 형이랑 나랑 전우 같다는 생각도 했고, 논산에서 가장 좋아했던 '실로암'도 부르면서 통증을 분산시키려고 많이 노력했다. 실로암은 언제 들어도 정말 명곡이다. 형과 같이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부르면서 마지막 1km를 견뎠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다시 한번 그때 기분 느껴보고 싶냐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아니라고 대답할 자신 있다.


이 날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샤워 부스에 앉아서 샤워를 했다. 마치 '007 카지노로열'에서 에바 그린이 샤워기에 물을 틀어놓고 쪼그려 앉아 물을 맞는 장면과 같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에바 그린은 두려움에 떠느라 그랬던 거고 나는 발목이 너무 아파 서있을 수 없어서 그랬던 거다. 아무튼 그렇게 힘겹게 샤워를 마치는 동안, 형은 저녁 같은 점심 한 끼만 먹은 우리의 끼니를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동네 상점을 두 곳이나 돌았다고 한다.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우리의 페레로로쉐 사랑이 말이다. 전날의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한 형이 페레로로쉐와 물 등을 구입해서 돌아왔고, 아쉽게도 문 연 식당은 없어서 배달이 되면 아무거나 시켜 먹기로 했다. 그 결과 정말 아무거나 도착했다. 도미노피자에서 Buy One, Get One 피자를 하나 주문했는데 음... 사진과 같은 음식물이 도착했고 그냥 허겁지겁 배를 채운 뒤 잠을 청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이 날의 음식이 우리가 꼽은 worst가 아니다.

발목이 사진과 같이 정말 많이 부었고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행히 친절한 호스텔 사장님께서 비닐봉지에 얼음을 넣어 묶어주셨다. 그걸로 자기 전까지 아이싱을 하고 마지막 두 장 남은 파스를 양쪽 발등과 발목 사이에 붙이고 잠에 들었다. 자는 동안에도 발목이 아파서 몇 번 잠에서 깰 정도였다. 통증 때문에 잠에서 깬 것은 이번이 살면서 두 번째였다.

처음은 지난 2022년 여름의 일이었다.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 얼른 집에 갈 생각에 신이 나 왼손으로 쾅하고 차 문을 닫았는데 차 문이 미처 닫히지 않았다. '왜 문이 안 닫혔지?'하고 문틈을 봤는데 불쌍한 내 오른손 엄지가 차 문에 끼어 있었다. 그날 처음 알았다. 인간이 견디기 힘들 정도의 통증은 보통 5분에서 10분이 지난 후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런 감각이 없이 그저 온몸의 피가 오른손 엄지로 향하는 듯한 피 끓는 느낌만 나더니, 10분이 지난 뒤부터는 정말 아팠다. 통증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내 엄지손톱은 새카만 네일을 받은 사람의 엄지손톱보다도 짙은 색을 띠게 되었다. 좀 길어졌는데, 그에 준하는 발목 통증을 느꼈으나 나와 적어도 8일을 더 걸어야 하는 형이 걱정할 것 같아 티를 내진 않았다. 그렇게 고난의 3일 차 밤도 지나갔다.


- 마음의 축을 찾기 위해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열하루의 기록 [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