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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상원 Sangwon Suh Oct 13. 2015

천 년전 강감찬 장군의 시에 숨은 언어유희

돌베개 출판사의 <근역서휘 근역화휘 명품선>은 위창 오세창(1864∼1953) 선생이 우리 선조들의 빼어난 글과 그림을 수집해 엮은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를 발췌한 것이다. 그중 하나가 자그마치 천 년을 견딘 강감찬(948-1031) 장군의 친필 한시 한 수:


孤鶴寵衛軒

雙鳶入毛論

秋風無限恨

不能共一尊


<명품선>의 한글 번역은 다음과 같다.


외로운 학은 위나라 수레에서 사랑을 받고,

쌍 솔개는 모론에 들었네.

가을 바람에 시름이 끝이 없는데,

함께 한 잔 술 나눌 수 없는가?


그러나 위의 번역과 <명품선>의 짤막한 해설만으로는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않다. 뿐만 아니라 다른 문헌을 봐도 이 시에 대한 연구나 해설이 전무한 상태. 천 년을 내려온 시에 마땅한 해설 하나 없단 말인가?


그래서 부족하나마 내 나름대로의 해설을 간략하게 적어 본다. 찬찬히 뜯어보다 보니 강감찬 장군의 기발한 언어유희가 이 시 곳곳에 베어있었다. 천 년동안 고이 잠들어있던 비밀을 하나 하나 풀어나가는 느낌이랄까?




먼저 이미 알려져 있는 내용: 수레의 학이란 말은 공자가 쓴 춘추(春秋)를 풀이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고사로 전쟁에 나가거나 일은 하지도 않고 녹만 받아 먹는 신하를 말한다. 춘추 시대 위(衛) 나라 의공(懿公)이 학을 좋아하여 수레에 태우고 다녔는데 정작 전쟁이 나자 백성들은 자신들 대신 녹을 받은 학을 전쟁터에 내 보내라며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징병 거부. 물론 위나라는 망하고 만다. (여기서 수레는 리어카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고관이나 탈 수 있는 바퀴 달린 가마를 말한다). 모론(毛論)이란 모형(毛亨)이란 사람이 전한 시전(詩傳)을 가리킨다. 시전은 춘추시대의 노래를 모은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詩經)에 주석을 달아 편집한 책이다




여기서 부터는 문헌에 없는 내 나름대로의 해설.


첫 구(句): 외로운 학이 던지는 의문

외로운 학(孤鶴)이라 했을까? 문맥상 이 학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다. 굳이 외롭다 할 이유가 없다.


가마를 두셋이 나누어 타는 것도 아니고 혼자 탄다는 것으로 사치스러움을 나타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언절구라는 형식은 총 20자 안에 모든 시정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어느 한시 형식 보다 더 함축적, 경제적 한자 사용이 필요하다. 한 자도 낭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쉽게 첫 자를 홀랑 써 버렸을까? 내 생각엔 여기에 앞으로 설명할 재치있는 언어유희의 실마리가 숨어있다.


어째든 첫째 구는 병역은 등한시하고 조정에서 편안히 녹만 받아 먹으면서도 임금의 총애를 받는 얄미운 신하의 모습.


둘째 구: 왜 뜬금 없이 솔개?

그러면 둘째 구의 솔개는 무슨 의미일까?  이건 어느 정도 상상력이 요구되는 문제.


솔개 연(鳶) 자를 보면 새 조(鳥) 자에 주살 익(弋) 자를 엊은 것이 새가 무슨 모자를 쓴 모양같다. 그런데 옛글을 보면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너풀너풀 소매가 넓은 관복을 갖춰입은 모양을 곧잘 새에 비유하곤 했다. 관복을 차려입은 조정의 벼슬아치(鳥)가 고관대작이 쓰는 관모(弋)를 쓰면, 짜잔! 솔개(鳶)로 변신. 우리 선조들이 즐기던 파자(破字)를 이용한 언어유희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유유자적 시나 읊는 조정의 고관들에겐 참새나 까치보다는 높은 하늘을 나는 솔개가 더 잘 어울린다. 또 솔개가 자신보다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육식동물이라는 점에서 겉으로는 고상한 척 하면서 뒤에서는 모함을 일삼는 고관들의 이중성을 표현한 중의적 표현으로도 볼 수도 있겠다.


셋째, 넷째 구: 처세 한탄

셋째 구(句)는 본인의 처지를 읊는다 (가을 바람에 끝 없는 한). 그런데 넷째 구의 ‘不能’을 ‘할 수 없나?’로 생각해 의문문으로 번역하면 자칫 누구에게 술을 마시자는 권주가(勸酒歌)처럼 들릴 수 있다. 이보다는 ‘술 한잔도 같이 나눌 수 없구나’ 하는 본인 처지에 대한 한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전반적인 시정(詩情)

강감찬 장군은 노년기에 접어 들어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원정군을 대파한 후 여러 중앙관직을 두루 지냈으나, 귀주대첩 이전 20 여년간은 추운 북쪽 변방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첫 두 구(句)는 서울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중앙 고위 관료, 나머지 두 구는 야전에서 고생하는 자신을 묘사하고 이 둘을 대비시켜 현실을 비판하면서 변방의 외로움을 솔직하게 표현한 시로 볼 수 있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야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강감찬 장군은 애초에 문과 장원급제 출신.


숨은 대비 구조

다시 첫번째 질문: 그냥 학, 솔개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외로운 학, 한 쌍의 솔개라고 했을까? 이 시를 잘 들여다 보면 각 구마다 정서적 특성과 함께 수리적(數理的) 특성을 교묘하게 배치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첫 구 = 1 (외로운 학),

둘째 구 = 2 (쌍 솔개),

셋째 구 = 무한 (끝 없는 한),

넷째 구= 0 (한 잔도 같이 할 수 없음).


1이나 2가 표현하는 조정 고관들의 세상에 '있음'과 무한과 0이 표현하는 변방에 있는 자신의 '초월', 세상에 '없음'을 대비시켜 상대적 박탈감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숨은 수열(數列) 찾기

그런데 이 시에는 찾을 숫자가 더 있다. 첫째, 둘째 구는 1, 2로 시작한다고 했는데 셋째 구는 '秋'로 시작한다. 그런데 춘하추동 사계 중 가을은 셋째 계절. 그러므로 여기까지 보면 1, 2, 3을 순차적으로 각 구의 첫 머리에 둔 것이다.


문제는 마지막 구의 첫 자, 不. 일견 4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강감찬 장군이


에이, 넷째 구는 뭐 잘 안되네. 까짓거 그냥 셋째 구까지만 합시다.


이랬을까? 어허, 이분이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다. 不과 4의 관계는 뭘까?


不은 비밀은 그 획수 = 4획. 이렇게 각구의 첫 글자로 1, 2, 3, 4 완성!

첫 글자만 정리하면:


孤 = 1 (외로울 고)

雙 = 2 (쌍 쌍)

秋 = 3 (가을 추)

不 = 4 (아니 불).


물론 우연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한시 짓기를 언어유희와 재치를 시험하는 고난도의 지적(知的) 놀이로 삼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땐 스마트폰도 인터넷 게임도 없었다. 그나마 벗과 술 한잔 기울이며 재치있게 한시 짓는 재주를 겨루는 것이 최고의 놀이).


압운

이 시와 같은 오언절구는 2구와 4구의 마지막 음의 중성과 종성을 맞추는 압운법이라는 것을 쓴다. 그런데 이 시의 경우 2구와 4구의 마지막 자는 '論'과 '尊'으로 현대의 우리 한자음으로는 '론'과 '준'이다 (현대의 중국어 발음도 이와 비슷하다). 따라서 압운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尊'은 술잔이라는 뜻의 '준' 뿐만 아니라 높다는 뜻의 '존'으로도 읽는다. 그렇다면 ‘론’과 ‘존’은 중성과 종성이 같게 된다. 기지를 발휘해 절묘하게 압운까지 맞춘 것이다. 강감찬 장군이 둘째 구에서 알기 쉽게 그냥 '시경'이나 '시전'이라 하지 않고 굳이 '모론'이라 돌려 말한 것도 '론'과 '존'의 압운을 맞추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천 년전 한자의 우리 발음이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아마 지금과 비슷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것을 통해 이 시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간 시가 아니라 미리 철저히 계산해서 지은 시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겠다.


한 마리 학은 위 나라의 가마 위에서 사랑을 받고,

두 마리 솔개는 시전(詩傳)에나 빠져 있지만,

(나는) 가을바람에 시름만 무한하고,

술 한 잔도 같이 나눌 길 없네.


그런데 이렇게 한글 번역만 보면 뜻은 통하고 시정(詩情)도 어느정도 이해되지만 원문에 숨어있는 작자의 기발한 재치를 하나 하나 발견하며 탄성을 내게 되는, 그 쏠쏠한 재미가 없다. 한시는 한시로 읽어야 제맛인 가보다.




요컨대 강감찬 장군은 이 시를 통해 입으로만 떠들면서도 임금의 총애를 받는 중앙 고위 관료를 비꼬고 이를 경계하도록 하는 한편 변방의 외로움, 상실감, 상대적 박탈감을 첫 두 구와 나머지 두 구의 정서적, 수리적 이중 대비 구조를 통해 진하게 드러내고 있다. 당시 무관들의 시가 판에 박힌 듯 충정이나 기개를 노래하고 있는데 반해 강감찬 장군의 시는 비판적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또한 파자를 이용한 중의적 표현, 각 구의 첫자에 1, 2, 3, 4의 수열을 교묘히 감추고 압운까지 절묘하게 맞춘 다채로운 언어유희를 시 곳곳에 꼭꼭 숨겨놨다. 장군의 세심함, 비상함, 주도면밀함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귀주대첩을 그냥 얼렁뚱땅 이긴 게 아닌 것이다.


20자 밖에 안되는 시 한 수지만 이 시를 통해서 천 년전 장군의 남다른 성정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으니 글이 주는 공감의 힘을 새삼 느낀다.



연관 글 링크


* 참고로 이 브런치 글의 표지 사진은 이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강감찬 장군의 오언절구를 친필과 비슷한 필치의 초서로 쓴 비교적 최근 작품으로 보이며 <명품선>에 실린 강감찬 장군의 친필 원본의 사진과는 좀 다름을 알려드립니다. 장군의 친필 원본 사진은 돌베게 출판사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이 시에 나온 각구의 한자들 입니다.

孤 외로울 고/ 鶴 학 학/ 寵 사랑할 총/ 衛 지킬 위, 위나라 위/ 軒 집 헌, 수레 헌

雙 쌍 쌍/ 鳶 솔개 연/ 入 들 입/ 毛 터럭 모/ 論 논할 논

秋 가을 추/ 風 바람 풍/ 無 없을 무/ 限 한스러울 한, 심할 은, 한정할 한/ 恨 한스러울 한

不 아닐 불/ 能 능할 능 / 共 한 가지 공, 함께 할 공/ 一 한 일/ 尊 높을 존, 술잔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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