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가을이면 내가 살던 명륜동에서 한 30분 걸어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을 찾곤 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다. 봄가을마다 2주씩만 개관했는데 그때마다 보기 힘든 소장품 중 일부가 얼굴을 내비쳤다. 그나마 작년부터 일반 관람을 받지 않고 외부 갤러리를 빌려 전시한다니 간송미술관을 찾아 성북동을 거닐던 일도 고스란히 추억이 되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작품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간송 전형필 선생께서 사재로 사 모은 수장품들이다. 그중에는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이 있다. 이 화첩은 실제 금강산의 모습을 바탕으로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겸재의 대표작이자 진경산수화법의 백미로 꼽히는 걸작이다.
그런데 <해악전신첩>의 구매 경위가 참 흥미롭다. 일제강점기 당시 명문고택을 차지한 친일파들은 집안에 남에 있는 고서화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골동상을 하던 장형준이 여행 중 친일파 송병준의 손자가 살던 집에 묵었다가, 우연히 그 집 머슴이 아궁이에 불 때는 모습을 보았다. 한데 불쏘시개로 쌓아둔 물건 중에 고서화로 보이는 것들이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바로 <해악전신첩>이었다. 선생은 장형준이 가져온 그 그림을 천문학적인 돈을 주고 매입했다고 한다. 아무리 진귀한 보물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불쏘시개만큼의 가치밖에 없고, 알아보는 이에게는 억만금이 아깝지 않다. 아름다움을 살펴볼 줄 아는 안목, 즉 심미안(審美眼)이 곧 가치이다.
지금 세계는 정부, 산업, 학계 할 것 없이 생태 서비스의 가치를 파악하는 일로 분주하다. 국제 산업계도 올해 ‘자연자본연맹(Natural Capital Coalition: NCC)’이 중심이 되어 기업 활동으로 발생하는 생태 서비스의 이용과 영향을 측정하는 방법론 개발에 착수했다. 나도 NCC 일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일을 하다 보면 생태계의 가치가 돈으로 따져 얼마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마다 참 난감하다. 생태계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없다면 인간은 한시도 살 수 없으니 어찌 보면 그 가치는 인간이 감히 따질 수 없을 만큼 높다 할 것이다. 더구나 생태계의 가치에 비용을 지급하는 주체는 궁극적으로 국민이다. 세금을 내고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국민이 생태 서비스의 대가를 지급할 의사가 없다면 학자들이 계산하는 생태계의 가치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문제는 국민이 생태계의 고마움을 느끼고 그 진가를 제대로 알아볼 기회가 많지 않다는 데 있다. 어른들은 세계 최장 수준의 근로 시간에 바쁘고, 아이들은 빌딩 숲에서 나고 자라 학원 다니기 바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나마 여름캠프를 통해서라도 자연을 접한 아이들은 생명과 자연에 대한 친화성이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고 한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접해본 적도 없는 아이들을 교실에 모아 놓고 생태계의 가치에 대해 암만 떠들어 봐야 뜬구름 잡는 소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간송 전형필 선생께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심미안을 갖게 된 것도 <근역서휘>, <근역화휘>, <근묵> 등을 직접 모아 엮은 당대 최고의 감식안, 위창 오세창 선생을 통해 우리 문화재의 진수를 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태계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지켜나가려면 이땅의 아이들을 자연으로 내몰아야 한다. 아이들이 자연을 접하고 생태계를 볼 줄 아는 심미안을 키워야 생태계에도 미래가 있다. 생태계의 가치는 자연을 보는 아이들의 심미안에 달렸다.
서상원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
이 글은 <월간 에세이> 2015년 1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브런치에도 게재를 허락해 주신 원종목 편집주간님과 고경원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