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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상원 Sangwon Suh Jul 22. 2016

한 시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인 미국 정부

개정 독성물질 관리법(Toxic Substance Control Act)

지난 6월 22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새로 개정된 독성물질 관리법에 서명했다. 1976년 동 법이 공표된 지 40년 만이다. 이 역사적인 무대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소개한 사람은 유명 정치인도 고위 관료도 아닌 리사 유게닌 (Lisa Huguenin)이라는 한 시민. 그녀는 어떤 인연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일까?

지난 6월 22일 오바마 대통령을 소개하고 악수를 나눈 후 연단을 내려가려는 리사 유게닌

유게닌의 아들 해리슨은 생후 14개월까지만 해도 40-50 단어를 말할 줄 아는 활동적인 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18개월에 접어들면서 말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엄마’, ‘아빠’도 말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화기 장애, 음식 앨러지, 천식, 자가면역질환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해리슨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 기준치 이상의 납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져 전량 회수된다. 납 섭취가 발달장애를 유발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

지난 2007년 납이 검출되어 회수된 토마스 더 탱크 엔진 장난감(Daily Mail 2007년 6월 19일자 신문: http://www.dailymail.co.uk/)

얼마 후 장난감용 플라스틱 구슬을 아기가 섭취할 경우 체내에 ‘감마 하이드록시뷰티레이트 (gamma-hydroxybutyrate)’라는 물질로 전환된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된다. 이 성분은 기억력 상실, 인지능력 저하를 일으켜 소위 ‘데이트 강간’에 악용되는 물질. '빈디즈(bindeez)' 또는 '아쿠아 닷츠(aqua dots)'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던 해당 제품들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전량 회수된다.


그러나 미국의 기존 화학물질 관리법 아래서는 제조자가 제품에 포함된 화학물질의 안전성을 입증할 책임이 없다. 법률적으로 따지면 입증책임(burden of proof)이 원고에게 있는 것이다. 즉 제조사가 화학물질의 안전성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나 정부가 위해성을 입증해야 하는 구조다. 그러나 유게닌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들 물질과 해리슨이 앓고 있는 증상과의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 규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유게닌은 기존의 화학물질 관리법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그 결과  2010년 미 의회에서 프랭크 로텐버그(Frank Lautenberg) 상원의원이 주관했던 청문회에 참석해 화학물질 관리법의 개정을 촉구하는 증언을 하게 된다. 10년간에 걸친 한 엄마의 끊임없는 노력은 오바마 대통령이 개정된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개정된 법안에 서명하는 오바마 대통령(백악관 공식 사진)

미국의 기존 화학물질 관리법에 따르면 제품에 함유된 화학물질은 그 유해성이 증명되기 전까지 무해한 것으로 간주된다. 다만 특정 화학물질의 위해가 의심될 경우 정부가 독성시험이나 위해성 평가를 명령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절차가 워낙 까다로워 신고된 총 84,000가지의 화학물질 중 지난 40년간 독성시험이나 위해성 평가가 수행된 물질은 단 200건뿐이고, 그 결과 제조와 판매가 금지되거나 제한된 화학물질은 단 6건에 그친다. 미국 정부가 1급 발암물질로 분류된 석면조차 판매를 금지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에 비해 새로 개정된 미국 화학물질 관리법은 시판되고 있는 화학물질의 안전성 검토를 의무화하고 새로운 화학물질의 경우 시판 전에 안전성에 대한 정보를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제품도 화학물질 관리법 적용대상이라면 동법을 준수했다는 증명이 필요하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이후 우리나라의 화학물질 관리법과 제도가 미국에 비해 너무 허술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러나 개정 전 까지만 놓고 본다면 미국의 화학물질 관리법이 우리나라의 그것보다 나을 것도 없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은 미국의 화학물질 관리법보다 엄격한 부분이 더 많다. 문제는 제도 자체보다는 제도를 운영하고, 관련 용역을 시행하며, 화학물질을 생산하는 주체가 각자 제 역할을 충실히 해 내느냐, 또한 유게닌과 같은 시민의 목소리에 정부와 기업이 얼마나 귀를 기울이느냐에 달려있지 않나 싶다.


서상원 (캘리포니아대학교 환경과학경영대학원 교수)

지난 6월 22일 오바마 대통령이 개정된 TSCA에 서명하고 나서 유게닌이 아들 해리슨에게 키스하고 있다 (REUTERS/Kevin Lamarque)

커버 사진: 백악관 공식 사진(Official White House Photo by Pete Souza)


이 글은 지난 7월 15일 자 일간 <아시아투데이>에 같은 제목으로 올린 칼럼입니다. 브런치에도 게재를 허락해 주신 <아시아투데이>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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