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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상원 Sangwon Suh Apr 20. 2016

달라도 괜찮아

우리는 우리와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관대한가?

It is not our differences that divide us. It is our inability to recognize, accept, and celebrate those differences.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서로 간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축복해 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오드리 로드 (Audre Lorde: 1934 –1992). 미국의 시인, 시민 운동가.


예전에 내 강의를 듣던 학생에게서 SNS를 통해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성실하고 똑똑한 데다 수업 중 토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잘 기억나는 여학생이었다. 그런데 그때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도무지 몰라 답장을 못 하고 말았다. 왜냐면 그 학생은 내가 강의할 때만 해도 참한 여학생이었는데 그간 성 정체성 변화를 겪은 후 이름을 남자 이름으로 바꾸고 머리도 짧게 깎은 낯선 모습으로 SNS 대문 사진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상 연락을 받고 사진을 보니 내가 종전에 알던 그 여학생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좀 난감해져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 결국은 답장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그러다 오늘 학교에서 몇 달 전부터 일정을 잡아놓은 필수 교직원 연수가 있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마지못해 참석했다. 연수는 ‘LGBTQ’라는 생소한 제목이었다. 알고 보니 LGBTQ는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and Queer의 약자로, 우리나라에서는 통틀어 ‘성 소수자’로 부르는 듯하다. 오늘 연수를 통해 성 소수자 학생들이 겪는 차별, 성 정체성 갈등으로 인한 고통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성 소수자들은 보통 10대에 성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 표면화된다고 한다. 그들은 한창 민감할 나이에 가족과 친구 관계는 물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갈등을 겪는다.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비교적 덜한 미국에서도 성 소수자 학생들의 자살률은 다른 학생에 비해 최대 6배까지 높다고 한다. 커밍아웃 이후 집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끊거나 기숙사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리는 일도 다반사다. 증오 범죄도 심각해 한해 미국에서 증오 범죄로 사망하는 미성년 성 소수자만도 20명이 넘는다고 한다. 몇몇 국가에서는 성 소수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범죄행위에 해당되며 심한 경우 사형에 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되었다.

각국의 성소수자에 대한 처벌 법제도 현황. 노란색: 징역, 주황색: 종신형, 빨간색: 사형 (wikimedia, CC-by-3.0)

더구나 인종이나 피부색으로 차별을 받았다면 가족이나 친구에게라도 하소연할 수 있을 텐데 성 소수자는 오히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게 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성 소수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도 당사자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많은 성 소수자들에게 우리 사회와 인간관계는 맨발로 걷는 가시밭길인 셈이다.


내가 만약 성 소수자로 태어났었다면 어땠을까?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용기를 내 커밍아웃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족과 친구가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 이런 생각들이 연수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는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오랫동안 핍박받던 역사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 자신을 차별의 가해자 보다는 피해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관대한가? 인종, 피부색, 믿음, 관습, 심지어는 말투나 음식까지도 ‘다르다’는 것은 그것이 상대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더라도 차별과 반목의 원인이 되곤 한다. 그 중에서도 성 소수자들은 그들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성 소수자로 태어나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들도 이 땅의 아이들이고 우리의 가족과 이웃이 아닌가?


다르다는 것을 소중한 것, 자랑스러운 것이 아닌 이상한 것, 창피한 것, 감춰야 할 것으로 본다면 나도 어느새 차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내가 그들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 그들이 느낄 고통에 대한 공감이 있다면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반목은 줄어들 것이다.


몇 년 전 SNS를 통해 연락해 온 그 학생을 다시 떠올려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학생은 큰 맘먹고 나와 SNS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알렸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 왜 나는 그 학생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했을까?


지금이라도 당장 답장을 해 봐야겠다. 달라도 괜찮다고.


서상원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


이 글은 <월간 에세이>에 제가 연재하고 있는 '아침 창가에서' 칼럼에 2016년 3월 게재된 내용을 편집한 글입니다. 브런치에도 게재를 허락해 주신 원종목 편집주간님고경원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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