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 창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상원 Sangwon Suh Aug 02. 2016

모방제품 속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

혁신 경쟁력 3부작: 1부

1부: 모방제품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
2부: 중간진입전략의 늪
3부: 실패와 독창성의 가치


들어가며

스위스의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은 매년 세계 140개국의 경쟁력을 분석해 순위를 매깁니다. 이중 우리나라의 혁신 부문 경쟁력을 보면 2009년 11위이던 것이 해가 거듭할수록 밀려나서 2015년에는 19위로 말레이시아와 비슷한 수준을 기록했네요.  

세계경제포럼이 평가한 우리나라의 혁신 경쟁력 세계순위 (출처: World Economic Forum: www.weforum.org)


한 국가의 혁신 경쟁력을 보여주는 척도 중의 하나가 '지적재산권 국제수지(balance of payment on intellectual property)'지요. 지적재산권에 대한 라이선스를 해외에 얼마 팔았고 해외에서 얼마를 사들였는지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지적재산권 국제수지는 매년 큰 규모의 적자로 2014년 기준 한해 6조 9,000억 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궂은일 열심히 해서 번 돈을 해외의 지적재산권자에게 송금해야 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Qualcomm이나 Microsoft와 같은 해외의 지적재산권자는 과거에 이룬 혁신으로 가만히 앉아 세계 각국에서 로열티를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R&D 분야 기업의 투자와 정부의 지원이 작아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가 2014년에 펴낸 'OECD 과학, 기술, 산업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의 매출액 대비 R&D 투자와 GDP 대비 R&D 투자 비율은 모두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많은 우리 기업들이 비슷한 매출의 외국 기업보다도 더 큰 규모의 R&D 투자를 하고 있고요, 현 정부도 R&D 투자를 대폭 늘려왔지요. 모두 혁신 분야 경쟁력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물론 세계경제포럼이나 지적재산권 국제수지와 같은 단기적인 지표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R&D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투자가 관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 경제의 혁신 경쟁력을 가로막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면 이를 하루라도 빨리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혁신 경쟁력에 대해 그동안 보고 느낀 짧은 생각들을 정리해 앞으로 세 꼭지에 걸쳐 나눠 보려고 합니다.  


혁신이 창조하는 高부가가치

혁신(innovation)이란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이지요.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이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높고 따라서 투자에 따르는 위험도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성공한다면 그에 따르는 보상은 기존 기술을 사용하는 제품보다 윌등히 높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나라처럼 마루 바닥을 선호하는 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수요가 상대적으로 적지만 미국이나 유럽처럼 카펫을 선호하는 나라에서 진공청소기는 생활필수품이 아닐 수 없지요. 이런 전동식 가정용 진공청소기는 20세기 초반 처음 선보인 이후 최근까지 기본적인 작동원리에 큰 변함이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터가 팬을 돌려 공기를 흡입하고 필터 역할을 하는 먼지 주머니가 먼지를 걸러 공기만 배출시키는 원리지요.

   

진공청소기에 먼지주머니가 장착되어 있는 모습 (Abbedabb. CC-BY-3.0)


네덜란드에서 1916년에 촬영된 전동식 진공청소기 운전 사진

진공청소기 관련 기술은 모터의 효율이라든가 필터의 탈착 방식과 같은 점증적 개선이 조금씩 이루어졌을 뿐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기술이 수 십 년간 나오지 않았던, 전형적인 '포화된 기술시장(saturated technology market)'이었죠.


그런데 진공청소기 시장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1974년 영국. 20대 후반에 별다른 수입 없이 집에서 지내던 James Dyson. 그는 집안 보수공사에 쓰려고 당시 시장 점유율 1위였던 Hoover社의 진공청소기를 구입합니다. 그런데 이 Hoover社의 진공청소기를 쓰다 보니 먼지주머니를 새로 교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주머니가 미세한 먼지층으로 뒤덮여 청소기의 흡입력이 감소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지요. 이를 개선하기로 마음먹고 그가 1979년부터 1984년까지 5년간 집안 작업실에서 만든 시제품만 무려 5,127개. 아무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술이 나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진공청소기 시장에 Dyson은 여러번의 실패 끝에 사이클론 방식을 이용한 신개념 진공청소기를 선보입니다. 그의 제품은 기존 제품보다 2배나 비싼 가격을 책정했음에도 불티나게 팔리지요.

사이클론 방식을 이용한 Dyson의 DC37 (Пылесос Dyson DC37. By компания. CC-BY-3.0)

그가 세운 Dyson Ltd社의 매출액은 2015년 기준 17억 4천만 파운드(우리 돈 약 2조 5000억 원), 영업이익은 4억 5천만 파운드(우리 돈 약 6,600억 원)로 매출액의 26.4%가 영업이익입니다. 업종과 규모가 달라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우리나라의 LG전자의 경우 같은 기간 매출액은 56조 5,090억, 영업이익은 1조 1,923억 원으로 매출액의 2.1%가 영업이익이었고, 삼성전자의 경우 같은 기간 매출 200조 6,500억 원, 영업이익 26조 4,100억 원으로 매출액의 13%가 영업 이익이었습니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Dyson 社의 제품이 시장에서 높은 매출과 영업이익을 낼 수 있는 비결 중 하나가 바로 혁신을 통한 경쟁우위 선점입니다.


포켓몬고가 뜨니 뽀로로고?

그런데 우리나라 뉴스를 보다 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출시도 안됐다는데 우리나라에선 벌써부터 '포켓몬 고(Pokémon Go)'의 열풍이 뜨거운 모양입니다. 이곳 미국에서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스마트폰을 쥐고 포켓몬을 찾으러 다니는 신종 사냥꾼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포켓몬 고에 대한 우리나라 게임업계의 반응은 이렇더군요:

기사는 '뭐 발 빠르게 잘 대응했네' 이런 분위기랄까요? 제작사는 개발 동기도 자신 있게 적고 있습니다.

최중구 아이코닉스 전무는 “포켓몬 고의 성공을 보고 개발에 나섰다”며...

이것이 매출액 세계 랭킹 4위라는 우리 게임업계의 상상력인가요? '포켓몬 고'와 같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먼저 내놓지는 못하고 남의 성공을 지켜본 뒤에서야 뭔가 비슷하게 해보려는 생각. 혁신의 가치를 높히 사고 남을 모방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는 기업문화라면 좀 달랐겠지요.


기업의 모방 문화

이 같은 현실은 비단 게임업계만의 상황은 아닙니다. 블로그에 중국산 짝퉁 사진이 올라오면 이를 비웃으며 중국의 국민성 운운하는 댓글을 가끔 보는데, 우리가 마음 편히 남을 비웃을 처지는 아닌 듯합니다.


작년엔 잠시 일본에 머물면서 주변에 괜찮은 비타민 제제를 물어봤는데 '아리나민(アリナミン)'이라는 제품을 추천해 주더군요. 찾아보니 1954년부터 판매됐고 비타민 B군에 비타민 E가 첨가된 복합 비타민 제제로 우리나라에서 1963년 출시된 일동제약의 '아로나민 골드'와 이름과 성분이 너무나 흡사합니다. 성분이야 약리효과를 위해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이름까지 비슷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1954년 처음 판매된 '아리나민(アリナミン)'

1971년 출시되어 '국민 스낵'이라 불리는 농심의 '새우깡'은 어떤가요? 1964년 시판된 일본의 '갓바 에비센(かっぱえびせん)'과 판박이지요. 1984년 발매된 롯데제과의 '빼빼로'는 1966년 선보인 일본의 '포키(ポッキー)'와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두 제품 모두 원제조사와 아무런 라이선스 계약이 없다고 합니다. 그냥 우연일까요?

1964년 시판된 일본의 '갓바 에비센(かっぱえびせん)'
1966년 선보인 일본의 '포키(ポッキー)'

어릴 쩍 에버랜드(당시 자연농원)에서 지금은 없어진 '지구 마을'이라는 놀이기구를 탔던 기억이 있습니다. 1976년 개장 때부터 운행됐다고 하는데요 보트를 타고 세계 각국의 전통의상을 입은 인형들의 춤과 합창을 감상하는 기구지요. 이것을 타면서 많은 아이들이 '나도 언젠가는 저 나라들을 여행할 수 있을까?'하는 꿈을 꿨을 겁니다. 저처럼요.

1985년 당시 자연농원의 지구마을 광고

저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디즈니랜드에 와보고서야 '지구 마을'을 타고 즐거워하고 있을 우리나라의 아이들에게 참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1964년 처음 선보였다는 디즈니랜드의 'It's a small world'와 컨셉부터, 내용, 분위기까지 완전 판박이였기 때문이지요.

It's A Small World at Disneyland. CC BY-SA 2.0. photography: Ken Lund

과자부터 놀이 기구까지 우리가 이제 것 온통 짝퉁의 틈에서 자라났다는 서글픈 사실. 짝퉁인지도 모르고 마냥 좋아라 했던 저 자신의 어릴 쩍 기억이 갑자기 바래 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일종의 배신감마저 들더군요. 대기업들이 만든 모방상품이 버젓이 팔리고 있는 것을 보며 자란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늦었지만 우리도 이런 짝퉁 상품들을 시장에서 단호히 퇴출시켜야 합니다. 어렵더라도 독창적인 아이디어라야, 온전히 내 것이라야 자신 있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그런 문화가 우리 시장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저위험-저수익 사업의 유혹

그런데 위에 나열한 모방상품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이들 제품을 판매한 기업들은 당시 이미 상당한 자본력이 있는 기업이었고 이후 모두 각 업계를 대표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는 점.


둘째, 이들은 모두 해외여행이 제한되어 있던 시절에 도입되었다는 점입니다. 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까지만 해도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해외 출장도 소속된 회사의 매출액에 준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당시 일반인이 해외에 나갈 수 있는 기회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죠 (아래 링크: 1988년 4월 4일 MBC뉴스. 손석희 앵커가 해외여행 자유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셋째, 국내에 모방 상품이 시판된 시기는 원조격 제품들이 이미 해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 상품은 성공이 어느 정도 보장된, 투자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상품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종합하면 해외여행이 제한되었던 시절 자본력이 막강했던 특권층이 외국을 드나들며 해외 히트상품을 베껴 내수시장에서 손쉽게 돈을 번 케이스들이지요. 과거 내로라 하는 우리 기업들은 별다른 아이디어 없이도 남의 제품을 보고 베껴서 어렵지 않게 수익을 창출하고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따라서 독창성에 대한 가치를 높히 사는 문화적 토양이 우리 산업계에서 빨리 자리잡지 못했던 것이지요. '적당히 따라해도 잘 팔리는데, 굳이 뭘...' 이런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과거 우리 기업들이 국내 부동산 사업이나 정부주도의 개발사업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여건에 있었기 때문에 규제나 개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관계 로비에 치중하느라 혁신은 뒷전이 된 탓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고 무조건 과거 이들 기업의 행태를 비난만 할 수는 없습니다. 회사 오너의 입장에서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런 저위험 사업을 선호하기 마련이지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성공해 고부가가치의 상품과 건실한 수익구조를 실현한 기업들도 있지만 남들이 시도하지 못한 신상품 개발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고는 수익을 내지 못해 결국 문을 닫은 기업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수출입이 자유화되고 세계시장에서 경쟁이 이루어지는 요즘엔 남의 제품을 베껴서는 더 이상 수익을 창출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적재산권이 과거에 비해 엄격히 보호되고 특허괴물들이 툭하면 시비를 거는 요즘에는 과거처럼 대놓고 남의 제품을 베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지요. 외국 기업이 한국 기업을 상대로 낸 지적재산권 관련 소송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공한 제품의 지적재산권을 교묘히 피해가며 비슷하게 따라 함으로써 위험을 줄이려 시도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남의 제품을 따라 하는 전략으로는 투자위험을 줄일 수는 있을지언정 Dyson Ltd社와 같은 高부가가치 창출은 힘듭니다. 시장 선점에 따른 프리미엄은 커녕 제살을 깎는 가격경쟁을 해야 하는가 하면 낮은 수익률 때문에 차기 사업에 대한 과감한 R&D 투자는 더욱 어렵게 되기 때문이지요. 저위험-저수익 구조에 민족 해야 하는 악순환에 갇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방으로는 안되는 시장문화

기업들에게 혁신할 것을 강조하면서 시장에서는 남의 제품을 베낀 대기업 상품들이 버젓이, 또 아주 잘 팔리고 있는 이 상황. 또 기업이 본업은 제쳐놓고 부동산 장사만 잘 해도 큰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이라면 어떨까요? 어느 기업이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혁신을 하려 하겠습니까? 이러한 시장 분위기에서 혁신은 알맹이 없는 구호 밖에는 안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모방상품이 시장에서 발 붙일 수 없고, 혁신 제품들이 시장에서 대우받는다면, 또 본업에서 성공하지 않고는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수익 창출을 기대할 수 없다면, 기업들은 혁신을 위해 사활을 걸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짝퉁 제품을 구매하지 않고 독창적인 혁신제품의 가치를 높이 사는 시장. 남을 따라하는 기업이 문을 닫고 혁신하는 기업이 번창하는 시장. 아이들이 우리 기업이 개발한 독창성 있는 제품을 직접 체험하고, 혁신기업이 대박나는 것을 보며 성장하고, 혁신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꿈을 키울 수 있는 시장. 그런 시장문화가 정착돼야 혁신 경쟁력에도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 글, '2부: 중간진입전략의 늪'에서는 199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도왔던 우리나라 R&D 정책의 미래를 생각해 보고, 그 다음 글, '3부: 실패와 독창성의 가치'에서는 혁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기업과 사회의 문화적 토양에 대한 생각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서상원 (캘리포니아대학교 환경과학경영대학원 교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