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지가지한다. 그렇지?”
“그래도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3차 유행이라고 주변에서 난리지만, 정작 14일 격리되는 놈은 주변에서 네가 처음이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다. 사십이 넘은 아저씨들끼리의 실없는 농담이었지만, 친구는 나의 2주간의 자가격리가 조금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꼭, 14일간의 격리를 모두 지켜야 하냐?’는 물음을 여러 번 던지고 나서야 이것이 현실임을 알아차린 듯싶었다.
코로나 보균자와의 밀접 접촉이 있었거나 접촉이 의심되는 사람 또는 외국을 다녀온 사람의 경우에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자가격리의 대상이 된다. 입국 다음 날 보건소를 찾아 코로나 검사를 받고 음성 판정을 받았음에도 14일간의 자가격리는 온전히 지켜져야 한다.
한 달 전, 미국에 도착해서 애틀란타 공항을 빠져나올 때는 어떤 검사나 조치도 없었다. 다만 비행기 내에서의 마스크 착용에 대한 주의 사항만을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올 때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4곳의 체크 포인트를 거치면서 검사에 필요한 요건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체온 검사, 문진표 작성, 휴대폰에 어플 깔기, 그리고 군인들로 보이는 요원들과의 대면 확인까지 거쳐야만 입국 심사대로 향할 수 있었다. 출국 전부터 입국 시에 까다롭게 코로나 검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이어지는 모든 과정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외국인들의 경우 당황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짐을 찾아 나온 이후에도 입국자들은 자유롭게 공항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경찰들의 인솔 하에 일정한 구역으로 이동하였고, 집까지의 이동 수단도 그들이 지정해 주는 범위 내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는 관계로 나는 어쩔 수 없이 방역 버스를 선택했다. 방역 택시의 경우 서울까지 팔 만원이 넘는 요금이 책정되어 있어서 비싸다는 생각에 이만 원이 안 되는 방역 버스를 2시간 동안 기다리기로 했다. 버스의 경우 집 앞에까지 데려다주지 않고 관할 보건소 또는 구청 앞까지만 데려다준다. 어쩔 수없이 지역 보건소 앞에서 공무원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저녁 9시가 다 돼서야 도착한 보건소에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기다리는 공무원분들이 있었다. 몇 푼 아껴보자고 이용한 버스였는데, 괜히 여러 사람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 내에서 거의 잠을 못 잔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어차피 새벽에 깰 것을 감안해 정리 못한 짐은 아침에 정리하기로 했다. 시차의 문제로 새벽 3시 반에 일어난 나는 비로소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무겁게 가져온 짐을 풀고 내 물건들과 선물을 구분해서 방바닥에 펼쳐 놓았다. 빨랫감은 바로 세탁기로 던져졌고, 정리해야 할 것들은 기존의 위치로 하나하나 옮겨졌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지만, 아직 시간은 채 5시가 되지 않았다.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한들, 잠들기는 힘들 것 같았다. 몸의 생체리듬을 강제로 끌어당겨서 현재의 시간에 맞추려고 노력해봤자 몸에 무리만 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깨어있기로 했다. 어차피 2주간 이곳에서 혼자 지내는 나에게 밤과 낮의 뒤바뀜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책상에 앉은 나는 컴퓨터를 켜서 일정을 만들어 보았다. 2주간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를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 마냥 시간별로 계획을 잡기 시작했다. 이루어지기 힘든 계획인지 알면서도 모든 것을 다 해내겠다는 의지를 담아 시간별로 촘촘하게 시간을 짜고 내용을 집어넣었다. 그동안 못했던 컴퓨터 프로그램 공부, 영어공부, 그리고 글쓰기 등등. 모든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은 없었지만, 계획을 만들어 가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이룬 사람처럼 만족감이 생겨났다. 그렇게 나의 2주간의 자가격리가 시작되었다.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몰랐던 나의 자가격리, 그러나 한국의 시스템은 생각보다 촘촘했다.
오전 9시가 되자 지역 보건소와 구청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나를 담당하는 공무원은 2주간의 생활지침과 아침저녁으로 보고해야 하는 온도 체크 등에 대한 설명을 보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을 따라서 나의 코로나 테스트에 관한 설명을 보냈다. 그리고 오후가 돼서야 말로만 듣던 테스트를 받으러 보건소로 향했다. 1시간 정도의 기다림 이후 난생처음 말로만 듣던 검사를 현실로 받게 되었다.
컨테이너 안에 설치된 검사실은 한 사람씩 들어갈 수 있었고, 검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내부와 외부 손잡이의 방역을 진행했다.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갔던 방역실에서 잠시 기다린 후, 검사관과 대면 하게 되었다.
보고만 있기에도 부담스러운 가늘고 긴 면봉은 처음에는 목구멍 깊숙이 들어가 측면의 살을 부벼 대더니 빠르게 빠져나왔다. 그러나 문제는 콧구멍 안을 검사하는 것이었다. 주사를 맞거나 주사기로 피를 뽑을 때와 같은 느낌으로, 고개를 살짝 들고 칸막이 너머에 보이는 특정한 사물을 아무 생각 없이 주시하였다. 검사 요원분은 이미 숙달된 손놀림으로 가볍게 면봉을 내 콧구멍 깊숙이 집어넣었고 주삿바늘을 찌르듯이 콧속 깊은 살갗을 한번 훑고 나왔다. 어떤 이들은 콧속을 검사할 때 상당한 불쾌감이나 고통을 느꼈다고 했지만, 나의 경우는 다른 이들의 말과는 달리 어떤 불쾌감도 없이 간단히 검사를 마칠 수 있었다. 사실 내 마음속엔 잠깐의 검사보다는 앞으로 있을 14일간의 격리가 더 큰 고통으로 느꼈던 것 같다. 아무리 인터넷을 하고 영화를 본다고 해도 몸이 한정된 공간에 갇힌다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일이다.
범죄자들이 사회에서 중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수용되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죗값을 치른다’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 사회과목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의 말씀은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범죄자들의 교도소 수용을 설명하였다.
사실 사회 구성원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점에서는 이해가 되었지만, 범법자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서 사회와 분리를 시킨다는 것이 어린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지금의 팬데믹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자가격리를 하는 이유는, 내가 보균하고 있을지 모를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격리 기간이 며칠 지난 지금 나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분명 자가격리의 첫 번째 목적은 나로 인한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한 기본적인 수단이다.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사회로부터 공식적인 인증을 받기 위한 기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부에서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자가격리 기간을 14일로 정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자가격리를 한 사람들에게는 사회로 돌아올 수 있는 인증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 간의 합의 사항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일부 사람들의 인식은 지금의 사태와 동떨어져 보일 때가 있다. ‘나만 아니면 돼! “라는 식의 인식과 행동을 보이거나, 자신의 불만과 불편함을 이웃과 사회를 상대로 표출하는 이들이 있다.
”별거 아닌 걸로 나라가 호들갑이야. 괜히 사람들 겁줘서 싫은 소리 못하게 하려고 정부에서 가짜 뉴스를 만든 거라고. “
”이 병 걸려서 죽을 것 같으면 벌써 다 죽었겠다. 안 죽어 걱정하지 마! “
주변인에 대한 배려뿐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사랑도 잊어버린 듯하다. 또한 정작 자신은 코로나로 인한 영향이 거의 없다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주변에 있다. 그들은 코로나로 인한 자가격리나 치료를 받지 않았을뿐더러, 금전적인 손해가 발생하지도 않았음을 강조한 것이다. 코로나에 걸린 이들은 자신의 부주의로 인한 잘못이거나 운이 없어서 걸린 것이기 때문에 각자의 잘못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답답한 마스크를 하루 종일 써야 하고, 동료나 친구들과 커피 한잔하지 못하는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다.
그들이 느끼는 안일한 감정은 지금까지 이어져온 코로나 상황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과 잘못을 자신이 있는 공간 밖에서 찾으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익숙함과 책임의 전가가 현재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다른 이의 고통, 무엇보다 코로나 세대들이 겪고 있는 고통마저 ‘저들이 짊어져야 할 운명’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기성세대들의 무관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회라는 공동체를 벗어나 살아가기가 어려운 존재들이다. 그러나 범죄로 인한 분리든, 전염병으로 인한 격리든, 아니면 군 복무와 같은 의무든 간에 각자가 누려야 할 자유가 억압되는 경우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이런 모든 것이 나만의 손해로 받아들여졌다.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다가왔고, 그것을 강요하는 사회가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현상을 조금은 넓은 의미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자유의 억압이 모두를 위한, 그리고 결국 나를 위한 행동이라고.
어린 시절 운동권 서적과 노래에 빠져 살던 나에게 당시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설명해주시던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분명 선생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지금의 상황과는 다를 것이다. 당시에는 이 말이 사회문제를 외면하는 ‘용기 없고 비겁한 기성세대의 변명’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현실에 나의 삶이 길들여지는 것이 아닌, 고통스럽더라도 현실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코로나 세대가 운이 없어서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성세대들은 그들을 운이 없고 불행한 세대라고 말한다. 코로나에 걸린 이들은 몸도 힘들지만, 주변의 시선으로 인해 더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지금의 사태를 두고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다가 싸움까지 번지는 경우를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모든 현상이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라 생각이 든다. 과거와 비교해서 불행한 세대, 과거에는 없었던 역병, 과거의 정치인들은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과거지향적인 시선들이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방송에서 들었던 어느 경제학자의 말처럼, 코로나 이후 우리는 과거와는 너무도 다른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 같다. 그러기에 용기를 가지고 지금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마스크를 끼고,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이유는 결국 나의 미래를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격리 기간을 보내기 위해 세운 계획이 얼마나 잘 지켜질지 모르겠지만, 알찬 자가격리의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