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세대의 미국사회경험_05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해외를 가끔 나갈 때면 “이제 나도 옛날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해외에 나왔다는 이유로 한국에 있는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고, 그네들을 위한 선물들에 시선을 돌리곤 한다. 어떻게 하면 싼 가격에 체면치레를 할 것인가에 골몰하기도 하고, 가끔은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값비싼 것들을 부탁할 경우, 물론 돈을 받는 조건으로 요청하는 것이지만, 시간을 들여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고민스럽다. 성격상 대부분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최소한의 돈을 들여서 욕먹지 않을 정도의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여행의 기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이번 여행에는 미국의 Thanksgiving Day와 Blackfriday가 겹쳤다. 이제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대규모 할인행사를 하는 날로 인식하여, 국내 백화점이나 마트 등에서도 특별 할인행사를 여는 일이 당연시됐다. 사실 해외에 나갈 때 선물을 부탁하는 이들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을 부탁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구할 수는 있지만 가격 차이가 많이 나는 것들을 요청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여성용품들이 가장 대표적이고, 다음은 옷과 술이다. 쇼핑을 그다지 즐겨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연말 할인행사를 맞이하여 대형 몰이나 백화점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확실히 저렴한 가격에 좋은 물건들을 사는 경우가 많다. 한국과 비교해도 절반의 가격에 살 수 있는 물건들도 상당수가 있다. ‘직구족’이라고 표현되는 이들의 마음이 나름 이해 가는 부분이다.
이번 여행의 경우, 주변인들에게 말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이라 특별한 물건을 부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을 다녀오는 길에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부담감이 여행 내내 따라다닌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받는 사람들이 '즐거워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소비의 국가이다. 특별히 연간 소비의 대부분을 Thanksgiving을 기점으로 새해까지 이루어진다. 각 상점이 이때를 기점으로 ‘흑자’를 내기 때문에, 이날을 ‘흑자를 내는 날’ 또는 ‘흑자를 내기 시작하는 날’이란 의미로 블랙프라이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솔직히 미국인들의 소비 형태를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들이 많다. 어떤 이는 연말과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자신의 집을 꾸미는데 거액을 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반짝이는 전구를 집 전체에 두르는 것은 기본이고 여러 가지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와 인형들로 집 주변을 장식한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맞이하여 멀쩡한 가구들을 바꾸거나 하우스 파티를 여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모두가 상당한 돈이 소요되는 행사들이다.
미국인들의 소비가 얼마나 극단적인지는 그들의 은행 계좌에 얼마나 돈을 저축하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일단 미국 은행들은 정기적금과 같은 은행 상품이 없다. 돈을 모아서 무언가를 사거나 계획했던 일을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일단 돈을 빌려서 쓰고 갚아 간다는 생각이 정착되어 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신용 대출’이란 것이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농담 삼아 이야기한다. 평생에 세 번의 신용 대출을 갚고 나면 인생이 끝난다고들 한다. 그것이 학자금, 자동차, 그리고 집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와 비교해도 미국의 대출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신용만 확실하다면 100%에 가까운 대출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노후를 걱정하고 대비하는 이들은 연금을 들어 놓는다. 하지만 그 이외의 돈은 모두 소비한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미국인 69%에 달하는 이들이 자신의 은행 계좌에 120만 원($1,000)도 없다. 그만큼 소비를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하였고, 사람들도 그러한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올해 블랙프라이데이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코로나 사태로 예년에 비해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하기 위해 쇼핑을 기피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지출할 만한 돈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의 일상이 코로나 사태 이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의 이동 인구가 극도로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음식점과 상점들의 경우도 손님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카페 및 식당 내부에서의 식사를 제한하고 있기에 사람들의 이용 횟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 현실이다.
미국에서 오래 사신 지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하는 비즈니스는 주로 대면을 해야만 가능한 일이 많다. 한인 식당, 네일숍, 미용실, 뷰티숍, 그리고 세탁소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기에 비대면을 강조하는 지금의 현실에서 그들의 사업이 현상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가게를 정리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지만, 가게들이 매매가 되지 않아서 버티는 분들도 상당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 상황에서 모든 이들이 원하는 것은 코로나 백신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미국에서의 백신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코로나의 전염을 막아줄 수 있는 백신이 아닌 그들의 심리를 안정시켜 줄 수 있는 백신을 원하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코로나 병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코로나로 인한 경제활동의 위축을 더욱 무서워하는 눈치이다. 연일 20만 명의 확진자가 나오고 천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온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그들은 당장 내일 먹고 살 일에 더 걱정을 하곤 한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현재 미국의 현상에 대해 무엇이 더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하는지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예상치 못한 재난 중에 각 개인, 공동체, 그리고 국가가 그 사회에서 각자의 역할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를 한국과 비교해 볼 수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미국은 여전히 개인의 자유와 생존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국가이다. 하지만 코로나와 같은 공동의 위협에 대해 국가적 방역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큰 문제로 보였다.
우버 택시 운전사와 만남에서 그들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특히나 외부 사람들을 접촉해야 하는 것이 두렵지만, 생존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그들의 말처럼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든 듯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인지하고 있다. 미국이라는 초일류 국가의 현실 속에서도 코로나 세대가 존재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이번 재난을 계기로 더 큰 부를 축적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계획했던 시간이 다 되어간다. 미국에서의 3주간의 시간이 지루한 미국인들의 삶처럼 더디게 느껴졌던 여행이었다. 짐을 싸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단편적으로나마 미국이란 국가를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을 이어가는 미국인들과 한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나름 의미가 있었다. 어쩌면 나로 하여금 코로나 사태가 세상을 조금은 다르게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 같다.
언제쯤 다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코로나 시대의 이곳에서의 삶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