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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소 Nov 27. 2020

시차 적응

IMF 세대의 미국사회 경험_04

1년 8개월 만에 다시 인천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다시금 미국으로 가야만 했다. 미국 취업을 위해 가지고 있던 비자의 체류 기간이 만기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올 때는 빠른 시기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계획했었지만, 올해(2020) 초 코로나 감염의 확산이 시작되면서 모든 일정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시기를 지켜보던 나는 일정을 계속해서 늦춰야만 했고, 지금에 와서야 마지막 선택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이런 시기에 꼭 미국을 가야겠니? 바이러스가 다시 확산되는데...”     


모든 이들의 걱정처럼 미국을 방문해야겠다는 결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언제 어디서 걸릴지 모르는 역병과 그로 인한 주변 사람들의 불편함을 모두 감수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이번 기회를 굳이 고집한 이유는, 다른 조건 없이 입국이 가능한 이 시기를 그냥 놓쳐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을 기약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 입국에 따른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만큼 여유롭지도 열정적이지도 못하다. 또한, 미국을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와 달리, 지금까지의 미국에서의 삶을 매듭짓기 위한 여행이기에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가는 거라 많이 설레겠다.”     


“아니, 그냥 빨리 정리하고 올 생각이야. 코로나 때문에 어디 가지도 못해.”     


일반적인 여행의 경우도 며칠의 준비와 계획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의 경우 아무런 기대도 없이 최소한의 일정만을 준비한 채 옷가지들과 아는 분들에게 나눠줄 국산 마스크만을 준비한 후, 하루 전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잠시나마 미국을 다녀오는 일이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어서, 당일 아침 나 혼자 조용히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어쩔 수 없이 외국을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뉴스를 접한 나는 공항이 이전과 달리 조금은 붐빌 것으로 예상했다. 거기에다 공항에서 여러 검사나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에, 비행기 탑승 전, 무려 6시간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공항은 마치 음식점이나 가게의 영업 시작 전의 모습처럼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간간이 지나가는 보안요원들과 청소하는 분들만이 보였고, 비행기를 이용할 손님처럼 보이는 사람은 나 이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새로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조금은 불안한 마음에 내가 타야 할 비행기와 시간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사실 주말까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에 파묻혀서 정신없이 몇 주를 보낸 상태였다. 비록 짧은 기간의 프리랜서 업무였지만 밤과 낮의 구분 없이 회사와 어두운 호텔에 갇혀서(?) 17시간이 넘는 시간을 일에 매진해야만 했다. 이렇게 일하고 가면 시차 적응도 필요 없을 거라는 동료들의 농담에 피식 웃고 넘어갔지만, 일에 대한 몸의 반응은 예전과 달라서 조금은 몽롱한 상태로 공항에 있었다.      




한산한 대기 공간에 머무르다가 비행기에 올랐다. 텅텅 비어있는 기내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 미국을 향하던 과거의 나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당시에는 비어있는 자리가 한 자리도 없었을뿐더러 몸을 움직이기도 만만치 않은 비좁은 비행기를 경험했었다. 13시간에 가까운 긴 비행시간이었지만 처음이라는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한숨도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친구 집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거의 이틀간을 온전히 깨어 있었고, 피곤함도 느낄 수 없었다.     


“긴 시간 비행기 타고 오느라 수고했다. 

초행길이라 많이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부터 하나하나 준비하자.”     


친구의 말처럼 잘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저녁 식사 후 곧바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낯섦과 불편함에 새벽에 눈을 뜨고 말았다. 시간대 변경에 따른 시차 적응을 처음 경험하게 된 것이다. 생체 리듬과 지역 시간이 맞지 않아 생기는 불편함이 가장 먼저 외국에 왔음을 실감케 했다. 

꿈나라에 있어야 할 시간에 너무도 맑은 하늘이 너무 불편했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려서야 현지의 시간에 적응할 수 있었고, 밤과 낮이 뒤바뀐 생체 리듬으로 인해 마치 몸이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여행은 그때와 다른 감정을 갖게 한다.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 내가 겪어야 할 모든 환경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누구나 경험해야 할 통과의례처럼 가볍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이번 여행은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서 새로운 환경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익숙해지는 경험들 속에서 나는 한 편의 불안함이 느껴졌다. 어느 때부터 나의 삶에 대한 감정이 무감각해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익숙함이 편안함으로 그리고 그 편안함이 무감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돌들 사이로 이끼들이 끼듯이 점점 내 삶에 무감각에 따른 게으름이 들러붙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 먹고살아야 할지’에 대한 현실적인 삶의 문제마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쉽게 결정지어 버리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에 두려움이 생겨났다. 


누구는 나이를 먹어서 그렇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불안한 삶에서 오는 현실도피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두 가지 모두가 맞는 말이다.      

경험에서 오는 안도감에 쉽게 정착하는 면도 있지만, 내가 의지적으로 변화시키거나 관리할 수 없기에 지금의 현상들이 부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그것에 쉽게 길들여진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지금의 코로나 사태도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나의 삶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인 양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언제쯤 이 재난이 끝날지 모르겠다. 다만 그때까지 나의 감각과 생각을 깨워서 지금의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노력해 보고자 한다.      


“아직은 지치지 말자. 나의 의지를 꺾지 말자!”


오늘도 시차 적응에 실패한 나는 이른 아침부터 깊이 다짐해 본다.



[그림은 심재국 화백님의 '장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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