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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소 Jan 30. 2021

중고 신입

지원자분이 나이도 많고, 경력도 미천해서...

자가격리로 인해 두 달 넘게 못 만났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그것도 은밀하게 만날 수 있었다. 모두 가정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들이기에 마누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들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가족 이외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 일이다. 저녁 시간에 잠시라도 늦는다 싶으면 여지없이 휴대전화에는 벨이 울렸다. 술이 아닌 저녁만 먹고 간다고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치 빚진 사람처럼 마누라의 목소리가 담긴 전화기를 두 손 공손히, 머리까지 조아리며 받기 일쑤였다. 꼴 우스운 모습에 나는 한바탕 웃고 넘겼지만 그래도 집에서 기다리는 처자식이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지난 두 달 동안에 미국을 다녀오고, 자가격리를 하고, 취업 면접을 보기로 했다는 이야기에 모두가 신기해했다. 어제와 오늘이 비슷한 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나의 경험들이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방송과 뉴스로만 접했던 미국의 현실을 직접 다녀온 이에게 듣는다는 것은 쉬운 경험이 아니기에 입출국 과정부터 미국의 코로나 현상과 경제적 상황까지 모든 궁금한 것들을 나에게 빈틈없이 물어봤다.      


“지금 미국은 난리도 아니라며? 우리도 힘들지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냐?”   

  

“뉴스 보니까 죽는 사람이 하루에 몇 천명씩 된다면서, 미국 들어갈 때 아무런 문제없었냐?”     


이럴 때면 느끼는 거지만, 어떠한 이야기보다 가까운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이 더 강하게 와 닿는 것처럼 보였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뉴스와 신문 기사들보다 현실에서 직접 들려주는 증언 같은 생생한 이야기들이 그들에게는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무런 관심도 없던데, 심지어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열 체크도 안 하더라.”     


“자슥들, 그러니까 저 모양이지. 미국이 선진국이라는 이야기도 다 옛말이다.”     


이젠 모두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친구들의 대답을 듣고 있노라면, 그들에게서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기성세대로서, 그리고 중산층의 지위를 유지하며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아가는 그들이기에, 지금의 현실은 그들에게 큰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릴 적 가졌던 거인과도 같은 포부는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은퇴 이후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래에 대한 꿈보다는 현실의 문제에 집착하고 점점 불안해지는 전 세계적 현상들에 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피할 것인가?'를 먼저 궁리한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비슷해 보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행동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네들도 비슷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는 자수성가한 중소기업 사장으로 중견기업의 이사, 또는 부장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고 가정의 안정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기성세대들이다. 마치 우리가 사회 초년생 때 보았던 IMF 마냥. 그들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엿보였을 것이다.     

한편으론 그들 눈에는 자유로운 나의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다른 면으로는 정신 못 차리고 꿈만을 쫓아다니는 철없는 중년의 모습으로 비치어졌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기대하지 않았던 나의 취업 준비 소식에 친구들은 축하와 더불어 그동안 감춰왔던 속내를 하나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면접 남았다며, 출근하기로 한 거야?”     


“응, 전에 같이 일했던 친구 소개로 이력서 집어넣었어. 엔지니어들을 급하게 찾는 회사라서 출근할 것 같아. 최종 면접은 출근 전에 따로 보기로 했어.”  

   

“재주도 좋다. 이런 시기에 취업도 하고. 사실, 너 이렇게 비정규직 돌다가 은퇴하는 줄 알았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십 년은 넘길 수 있겠냐? 필요한 기술 빨리 배워서 사업체 차려. 네가 사장하면 죽을 때까지 벌 수 있잖아.”     


“야! 말도 마라 이자슥 ‘블루오션‘을 찾아 미국에 간다고 했을 때, 내가 기도 안 차더라. 차라리 금발의 미국 여자 만나러 간다고 했으면 미쳤다고 이해라도 하지. 하여간 잘 정리하고 잘 들어왔다.”   

  

비자발적인 프리랜서의 길을 마감하고 정규직 일자리를 갖게 된 나를 모두 축하하면서도 내심 불안함이 느꼈던 모양이다. 그들의 반응에 감사하면서도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점점 불안해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나를 담당할 간부와의 면접이 있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생활해온 터라, 한국에서 정규직으로 일자리를 가졌던 것은 십 년이 훌쩍 넘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미국으로 가기 전, 내가 가졌던 마지막 정규직이 전에도 소개했던 지방 소도시를 돌아다니며 오수관로(오물이 흘러 내려가는 하수도)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새로 생긴 오수관을 점검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지만 기존의 맨홀과 연결되는 부분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오래된 맨홀에 몸을 집어넣어야만 했다. 여름에는 상상하기도 싫은 악취로 고생했고, 겨울에는 몸을 에는 추위를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십 년 만에 한국에서 갖게 된 직업이 기존에 해오던 건설 엔지니어로서의 일이다. 한국에서의 경력이 부족한 데다 지난 칠 년이라는 미국에서의 시간이 송두리째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서의 취업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더군다나 새로운 기술들이 매년 소개되면서 나이 든 경력자들보다는 기술을 빨리 익혀서 사용할 수 있는 젊은 친구들을 선호하는 것이 엔지니어 시장의 현실이 되어 버렸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품을 팔아가면서 새로운 기술들을 공부했지만, 세상의 시선은 그리 온화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출근하기로 한 지금의 사무실에서도 취업 면접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지원자분이 나이도 많고, 경력도 미천해서...”      


면접을 진행하던 전무는 내 삶의 일부를 ’미천‘이란 단어로 갈음해 버렸다.

’나 없이는 살았어도, 미천하게 살지는 않았는데.‘ 조금은 짜증 섞인 감정이 바닥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 조금만 참자. 다 끝나 간다.‘ 나름 이 바닥에서 버텨온 노하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좀 큰 프로젝트 해보신 것 있으세요?”     


그의 물음에서 내가 그들의 입맛에 맞는 엔지니어는 아니지만, 나름의 가능성을 찾고 싶어 하는 눈치란 것을 알 수 있었다. ’ 그래 어쩌겠냐. 찾는 사람이 없으니 나라도 써야지. 있을 때 잡아라. 이마저도 찾기 힘들다.‘

틈새를 읽은 나는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를 가득 담아 포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관공서에서 발주하는 작은 일들을 주로 했습니다. 대신에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대기업들과 협력해서 대규모 공장시설 시공업무에 참여했습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부장이라는 직책을 앞세운 그네들 앞에서, 나는 신입사원 면접 때와 같은 긴장된 모습으로 나를 팔아보겠다고 처절하게 애를 쓰고 있었다. ‘저를 뽑아만 주신다면’이란 전제를 깔고 그들이 내뱉는 꼰대스러운 말투와 단어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환한 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모습이 너무도 가증(?)스러웠다. 조금 다행스러운 것은 코로나로 인해 직접 대면 면접이 아닌 온라인 면접을 봤다는 점이다. 화면을 통해 보이는 그들의 말투나 행동이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서 제한적으로 전달된다는 점과 면접자들의 모습이 전파를 통해 한번은 걸러지기 때문에 긴장감이 훨씬 덜하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팔았고, 그들은 나를 샀다. 물론 나를 팔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만큼 ‘프로’로서의 모습을 새롭게 보여줘야 한다.     

 

중고 신입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나의 모습이 앞으로 어떨지 스스로도 궁금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이, 경력 그리고 직급이라는 여건이 다시 시작되는 조직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겠다. 그리고 과거와 같은 권위주의적인 직장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면접을 마친 후, 친구들이 염려했던 것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그들이 지나간 길을 내가 가겠다고 했을 때, 그들의 기억 속에 떠 올랐던 과거 자신들의 모습이 나를 통해 보였던 것 같다. 더군다나 늦은 나이에.     


하지만 운명은 각자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과 행동에 운명은 반응할 것이고, 그로 인해 미래는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운명이란 개척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미 우리 사회는 흙수저와 금수저의 논란처럼 많은 이들이 이미 주어진 운명에 갇혀 사는 경우가 많다. 운명도 주어진 운명 안에서 그것을 어떻게 개척하느냐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나의 경우도, 활짝 열린 고속도로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갈 운명이 아니라면, 험준한 산을 두 발로 걷고 바위의 틈새를 온몸으로 빠져나가는 운명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산이 나를 받아준다면 이 또한 즐거운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어쩌면 오지에 고립되는 자연인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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