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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소 Feb 11. 2022

기술자의 서비스

중고 신입의 열한 번째 이야기

책상 위에 있는 한 뭉텅이의 도면과 꼬여있는 이어폰 줄을 보고 있자니 아침부터 심란해진다.      


‘일들이 얼마나 꼬일는지?’     


어제 현장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부장을 피해 옥상으로 향했다. 일단은 그와의 대면을 피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어제 협의 내용을 전달하는 아침 미팅이 너무도 하기 싫었다.      


”뭐가 얼마나 변경됐을는지?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나의 말에 같은 프로젝트를 공유하고 있는 어린 동료가 말을 거든다.     


“그러게요. 이번에는 얼마나 바뀌었을지 겁부터 나네요. 프로젝트 시작한 지도 벌써 6개월이 넘어가는데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첫 미팅에서부터 빠른 마무리를 요구하던 발주처(건물주)는 건설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도 없이 ‘무조건’이란 단서를 달고 나섰다.      


“Fast track방식(설계, 시공 동시발주 방식)으로 진행하시죠? 

시공사에 문의해 보니까 이 방법 이외에는 저희가 제시한 일정까지 공사를 마무리할 수 없다고 하던데요?”     

“일정에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계 변경사항이 많이 나오는 게 일반적이라, 말씀하신 ‘동시 발주방식’을 진행하기에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발주자 측 간부가 조금은 고압적인 톤으로 우리 측 의견을 제압한다.

     

“시공회사가 된다고 하는데, 엔지니어 회사가 안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몇 번의 공방과 설득이 오갔지만, 회사 측 사람들은 막무가내였다.      

더는 무의미한 협의라 생각한 우리 측 이사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한 채로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Fast track방식으로 일을 진행하려면, 계획 변경이 없어야 합니다. 저희가 제시한 일정에 맞춰서 계획들을 결정해주시고 이후로는 변경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장이란 것이 뻔한데 바꿀게 뭐가 있겠어? 

이거 금방 한다니까? 공장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경험이 많은 전문가인 양 내뱉는 회사 측 인사들의 말에 내 마음속 밑바닥에서는 두려움과 분노가 동시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봤던 만화에서처럼 달려오는 기차가 빤히 보이는 철길에 꽁꽁 묶여 있는 심정이랄까, 협의에 나선 각 회사 담당자의 모습에서 어찌할 수 없는 나의 미래가 보였다..

  

일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다.

언제나 그랬지만, 옛날 노래 가사처럼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마무리에 들어가야 할 일들이 아직 정리가 안 된 채로 시작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자마자 건축주가 제시한 일정을 맞추기 위해 야근뿐만이 아니라 주말 근무까지 마다하지 않고 일정을 소화해 왔다. 일할 수 있는 인원도 나 외에 1년이 안 된 신입사원과 둘이서 일을 진행했다. 간신히 관공서로부터 일을 진행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고, ‘착공신고’, 실제로 건설 현장에서 일을 진행해도 좋다는 내용까지 마무리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업무는 실제 공사가 시작된 시점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1차 목표가 마무리된 시점부터 실질적인 설계가 진행된다. 발주처(건축주)와의 몇 차례의 회의를 거치면서 모든 설계가 뒤집혔다. 기존의 배치와 계획은 모두 지워지고, 재설계가 진행되면서 추가적인 일들을 수행해야만 했다. 마지막까지 결정되지 않는 장비의 사양과 위치로 인해 공장 내부의 여러 실이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기 시작했다.  

   

“자꾸 이렇게 바꾸시면 일을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뭘 자꾸 바꿨다고 난리야? 그리고 사용자 측에서 필요한 사항이라서 바꿔 달라는데 뭐가 문제냐고?”   

  

사실, 그들이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 쓰는 실의 위치나 용도를 변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식당의 위치를 2층에서 1층으로, 임원실을 한쪽 끝에서 중앙으로, 계단의 위치를 그들이 쓰기 편한 곳으로 그리고 그러한 권한이 그들에겐 있다.

다만, 추가 업무에 대한 것들을 당연한 서비스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금전적인 것도, 일정도 변경 없이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반영해 줘야 한다는 점이 문제다.


이미 현장은 변경 전 도면을 가지고 땅을 파고, 파일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건물주와 회사 관계자들은 자신의 욕망과 타협을 못 한 상태로 자신의 욕심을 회의 때마다 매번 표출하고 있다.     


그들 입장에서 아이디어를 내고 변경을 요구하는 것은 더 나은 결과를 위한 과정이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작은 변경에도 많은 후속 작업이 뒤따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조율하고 반영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과 인원이 소요된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기술자들의 모든 추가된 업무가 그들에겐 단순히 서비스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역시나 잠시 후 부장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옥상에서 내려왔다. 가지고 올라갔던 커피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예상대로 부장은 변경사항을 주절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질책성 잔소리까지 이어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꿈틀대던 나의 두려움과 공포가 어느덧 나의 목구멍 앞까지 치솟아 올랐고, 결국 참지 못한 나는 감정적인 한마디를 던지고 말았다.

     

“제대로 좀 하십시오! 이게 뭡니까? 최종안을 받아 와야지, 매번 바꿔달라고 바꿔주면 언제 진도가 나가냐고요?”     


나의 말에 조금은 당황한 부장이 말을 멈칫한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경험이 많은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계속해서 자신의 말만을 내뱉었다.     


“요청하면 무조건 해야 되는 거야. 거꾸로 이야기해서 안 해주면 어떡할 건데?”     


“최종안 받아오세요. 이런 식이면 더 일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감정 섞인 말들이 오가고, 언성이 높아져 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또다시 변경안들을 끌어안고 늦은 밤까지 야근을 하고 말았다. 아무리 나의 감정을 쏟아 낸다고 한들, 현실의 문제들이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회사를 박차고 나가지 않는 한 맡겨진 일은 해야만 하는 것이 기술자의 업인 것을.      


오늘도 그렇게 먹다 남은 삼각김밥 한 개와 베지밀 한 병이 오랫동안 책상 위에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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