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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소 Sep 20. 2020

이민 사회의 계급

IMF 세대의 미국사회 경험_01

누군가는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의 삶을 꿈꾸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미국 생활의 경험이 있다. 그것은 이상을 좇아 미국을 간 것도 아니고 미국을 너무 사랑해서 간 것도 아니다. 현장에서 경험한 두 번의 사고가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IMF가 지나고 이리저리 전전하던 계약직을 그만두고, 뜻이 맞았던 몇몇의 과거 동료들과 함께 조금만 건설회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파산을 맞이하게 된다. ‘배운 게 도둑질’이란 말처럼 나는 다시 노가다 현장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계약직 일들을 알아보게 되었고, 인생에 있어서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할 힘든 노가다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하수도 관로를 점검하고 맨홀 내부의 상태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다행이라면 내가 맡은 일은 새롭게 정비된 하수관로를 시험하고 내부를 촬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도 만만치 않았다.      


맨홀 안에서 물을 다루어야 하는 일인데, 그해 겨울은 왜 그리도 추웠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영하 10도가 넘게 떨어지는 기온에 온몸이 물에 젖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 일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한 사건은 따로 있었다. 

     

거친 노가다 아저씨들의 욕설을 못 이기고 급하게 들어갔던 맨홀에서 2번이나 죽음에 이르는 사고가 날뻔했다. 지방 하천 주변에 하수관로는 지역의 오수(주방이나 화장실에서 쓰고 버리는 물)를 모두 모아 하수 종말처리장으로 이동시키는 라인들이다. 내부 콘크리트 배수관의 지름이 1.8m이고 물의 양도 상당하다. 이런 곳에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들어갔다가 불어난 물에 쓸려 내려갈 뻔한 사건, 그리고 지방도로 사거리에 설치된 맨홀에 급하게 들어갔다가 지상으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내 눈 30cm앞에 자동차 타이어가 보이는 아찔한 순간이 그것이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나와 함께 일했던 반장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는 현장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 사업주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고 했다. 다만, 그들은 도의적인 책임만을 질뿐이었다. 말 그대로 개죽음인 것이다.      

결국, 이런 사건들이 내 생각과 삶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노가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힘없는 자들 간의 갑질과 강압이 너무도 싫었다. 그리고,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보자’라는 오기도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다니던 회사를 급하게 그만두고 미국에 유학 중인 친구에게 연락했다. 최대한 빨리 내가 미국에 갈만한 방법을 친구에게 알아보았다. 그 친구가 알려준 방법은 학생 비자를 받고 가는 방법이었다. 그 친구가 다니는 학교를 통해 어학연수용 학생비자를 두 달 만에 받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내가 이민 사회를 정작 경험하게 된 것은 미국에서 취업에 성공하면서부터였다. 직장을 갖기 위해 한인들이 많은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생활할 집을 알아보면서 미국 사회의 한인 이민자들을 접하게 되었다.      

직장을 얻으면서 만나게 된 집주인 아저씨가 내가 만난 이민 1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아저씨는 한국에 대한 추억을 많이 간직한 분이셨다. 대학을 한국에서 졸업했고 건축을 전공했으며, 서울에서 놀기도 많이 놀았다고 했다. 옛날 한국노래 음반을 모으고, 고가의 진공관과 스피커를 보여주면서 자랑하는 것이 그가 가지는 취미였다.    

 

하지만 주인집 아저씨와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분이 가지고 있는 한국과 한국인에 관한 서운함이 말끝에 묻어 나왔다.      


“왜, 한국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는 거야? ‘미국와서 왜 고생하냐’는 등, ‘한국이 미국보다 살기 좋다’라는 등. 지네들이 뭘 안다고.”     


“아무리 한국에서 서울대를 나오면 뭐하나! 여기서 자란 애들한테 영어도 안되고, 일 처리하는 효율성도 떨어지면서. 미국에서는 한국대학 나온 것 쳐주지도 않아.”     


“김씨도 한국 여자 만나서 고생하지 말고, 한번 다녀왔더라도 이곳에 사는 시민권자 만나서 결혼해. 그게 훨씬 나아.”     


나에 대한 걱정에 눈물 나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정작 아저씨가 내 결혼 문제를 이야기한 것은 그의 외아들에 관한 자랑을 하고 싶어서였다.      


“자식놈이 뉴욕에서 S전자 다니잖아. 영어랑 한국어가 모두 완벽하거든, 생긴 건 또 어떻고, 그런데, 내 걱정은 자식놈이 빨리 여자를 만나서 결혼해야 하는데, 아직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문제야.”     


“뉴욕이면 한국에서 유학 온 괜찮은 친구들 많을 텐데요. 어쩌면 좋은 사람 만날 기회가 더 많지 않겠어요!”     


나름 맞장구를 쳐준다. 하지만 아저씨에게 돌아오는 답은 단호했다.     


“안돼, 한국에서 온 것들 영 싸가지가 아니야.”     


내가 느꼈던 것은 그가 내뱉은 거친 언사보다도 처음 느꼈던 이민자들의 이질감이었다. 

그가 느끼는 한국인들에 대한 그의 감정이 ‘싸가지’라는 단어로 함축된 듯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슷한 경험들이 더 많이 쌓여 갔다. 그들의 모습은 내가 한국에서 간접적으로 듣고 느꼈던 모습과는 너무도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도 한국에서 경험했던 꼰대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경험한 나의 사장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먼저 그에게 여러모로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다른 이민자 사장들과는 달리 월급이나 신분보장에 있어 원칙을 갖고 나를 대해 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부터 몸에 밴 습관들과 꼰대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는 이민 1세대이다. 그는 한국에서 지방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취업하였다. 그의 속마음을 깊이 있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그가 겪었던 학력에 관한 차별을 극복하고 외국에서의 경험을 갖고자 당시 유행했던 미국으로의 유학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더욱 자신에 대한 확신과 절대성을 자신 스스로뿐만 아니라 직원들에게 보이고자 노력했다. 

그와의 최초의 문제는 ‘메모’라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어느날, 내가 야근을 마치고 남긴 메모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을 보았다.     


“넌 한국에서 일을 어떻게 배운 거야!”     


“네! 무슨 말씀인지...?”     


“어디서 싸가지 없이 윗사람에게 메모를 남기고 난리야!”     


“작업에 대해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일부러...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사과했다.     


“야, 됐다. 됐어. 회사에서 뭘 배운건지... 요즘 한국에서는 이래도 되는 모양이지!”     


뒤끝 장렬이었다.     


-아! 지랄도 풍년이다. 그럼 문자도 하지 말라고 하지. 왜!      


나도 기분이 몹시 상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겠다고 했던 나의 행동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마음속에서는 그를 향한 비아냥과 욕설이 난무했다.     


-너는 그런 꼰대짓 어디서 배운거냐?     


미국 생활 초창기 시절에 이러한 이민자들의 모습을 경험하면서 점점 그들의 이면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미국 이민자들의 모습, 그리고 이민자들이 바라보는 한국과 한국인들의 모습. 내가 바라본 가장 큰 특징은 한국에서 느꼈던 사회의 분위기가 미국의 한인사회에서는 더 함축적이고 더 선명하다는 점이다. 그것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큰 특징은, 미국에서 오래 산 이민 1세대일수록 한국의 보수적인 사람들보다 더 보수적이라는 점이다. 

그들 생각에 자신들은 한국에서 이민을 왔지만, 이미 미국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무척 강하다. 그 자부심의 근원은 미국이란 국가에서 ‘나는 자수성가 했다’라는 점과 ‘우리는 1등 국가 시민이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인종에 대한 차별이라고 하기에는 심하지만, 그들 사이에 인종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책적인 차이가 뭔지를 잘 모른다. 하지만 한국 이민자들의 입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야기가 ‘나는 공화당이 집권해야 한다고 봐.’였다. 그 이유는 민주당이 집권하면 세금을 더 많이 걷고, 흑인과 히스패닉(대표적으로 멕시코인들)같이 게으르면서 못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한국인 이민자들은 미국 백인과 같은 일등 시민은 못돼도 최소한 이등 시민의 대우는 받을 수 있다는 그들의 자신감과 우월감이 그들의 말에서 표현된 것이라 본다. 그래서 그들은 2세들과의 관계 속에서 언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생각의 차이, 정치적 성향에 따른 차이를 크게 경험하게 된다.    

 

두 번째 특징은, 한국 이민자 내부에 계급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내가 느꼈던 것은 대략 네 개의 계층으로 나눠진다. 이것은 미국에서 어떠한 신분으로 살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가장 낮은 계층은 불법 신분으로 미국에서 버티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유형들이 있다. 미국에 유학 와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버티는 유형이 가장 대표적이다. 비율로 보면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다고 알려졌다. 다음은 어학연수로 들어왔다가 이곳에 남아 잡다한 일을 하면서 버티는 사람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한국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대부분 이러한 타입에 속한다. 다른 유형은 어려서 부모를 따라 미국에 왔지만, 부모가 불법 신분이 되면서 같이 불법 신분을 받는 경우다. 몇 년 전 트럼프 대통령이 이들을 모두 본국으로 쫓아내겠다고 해서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7년 통계로 보면, 한국인들은 숫자 면에서 전체 중에 6위이며, 아시아 국가 중에 1위였다.(https://www.uscis.gov/sites/default/files/document/data/daca_population_data.pdf)


두 번째로 낮은 계층은 학생비자나 워킹비자를 받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길게는 4년 정도의 안정적인 삶을 미국에서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그들의 신분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보통 워킹비자를 받은 사람들은 1년 안에 영주권(그린카드)을 신청하고 그중에 일부는 그린카드를 취득하지만, 학생비자의 경우 대부분이 영주권을 받지 못한다. 아무리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우수한 학생일지라도 미국 회사에 취업이 되고 회사에서 그들의 신분을 보장해줘야 워킹비자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한국 학생들의 경우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음은 영주권자이다. 영주권만 받아도 대부분의 한인 이민자들은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본다. 영주권을 쉽게 받은 사람들의 경우 2년 만에 받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평생을 준비해도 못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여기서부터 한인들의 계급에 관한 차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영주권을 받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민권으로 옮겨간다. 결국, 마지막은 시민권자이다. 영주권 취득 이후에 5년이란 시간만 미국에서 버티면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고, 특별히 잘못된 점만 없다면 대부분이 시민권을 취득하게 된다. 하지만 영주권 이상의 자격이 없는 이들의 경우, 한인사회에서 겪는 많은 갑질과 차별에 힘들어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에 반해 이미 그 사회에서 적응한 영주권 이상자들의 경우,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이러한 차별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시스템에 그들이 ‘잘 적응하고 있다’라고 믿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과 그들이 대하는 한국인들에 관한 생각이다. 

한국에서 미국에 사는 이민 사회를 바라볼 때, 그들이 모두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 사람들의 정을 다시 느끼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착각이다. 상당수의 한국인 이민자들은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그리 크지 않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된 한국이라는 국적을 그들의 한 가지 장점으로 이용할 뿐이다. 각각의 주마다 또는 큰 도시마다 존재하는 한인회는 자신들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한 정치 조직처럼 사용된다. 일부 한인들은 한인회 회장이 되기 위해 많은 돈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포를 대할 때의 모습은 그들이 미국인들에게 당했던 모습 그대로 대한다. 즉, 돈이 결부되지 않으면 어떠한 도움도 그들에게 바랄 수 없다. 그들이 한인들을 대할 때 쓰는 면죄부 같은 말이 있다.


 “미국에서는 원래 다 이렇게 해.”     


어쩌면 내가 미국 이민 사회에 대해 너무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면만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민 사회의 모두가 내가 이야기한 모습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소개한 그들의 모습들도 미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만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모습이 우리가 갖고 있던 미국식 ‘Cool’한 느낌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민 1세대들이 미국의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채, 다시 한인사회 또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일로 돌아온다. 아무리 아이비리그를 졸업했다고 해도 어느 순간에는 한인사회에 발을 붙이고 살게 마련이다. 한국인들이 많이 하는 보습학원, 네일샵, 도넛가게, 세탁소, 부동산, 보험 그리고 한인들을 상대로 한 교회 등등. 

그곳에는 여전히 한국에서 느꼈던 가식과 꼰대의 행동들이 만연했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어느 순간에는 미국인처럼 또 어느 순간에는 한국인처럼 행동한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이다.      


언제까지 ‘한국 사람들은 영원한 한국인‘, ’누가 한국인 피가 섞였데‘와 같은 국뽕에 젖어 한국인들 또는 검은 머리 외국인을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부터 ’Cool‘해져야 할 것 같다. 



[대문에 걸린 그림은 심재국 화백님의 '가을' 입니다.]

https://www.facebook.com/jaekuk.s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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