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 거대한 해체

거래적 현실주의 시대, 중견국은 어떻게 생존하는가

자동 정렬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더 까다로운 요구다. 기술로서의 외교, 실천으로서의 균형이다. 세계는 이제 “어느 편이냐”를 묻지 않는다. “무엇을 가져왔는지, 그리고 언제 움직일 줄 아는지”를 묻는다.


안녕하세요. UN과 중남미로 세상을 이야기하는 유엔이방인 김상엽입니다. 2026.1.7.(수) 백악관이 내린 결정은 단순히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규칙은 남아 있지만 구속력은 약해졌고, 정렬은 요구되지만 자동적이지 않은 세계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가장 큰 질문에 직면한 주체는 강대국도 약소국도 아닌, 바로 칠레와 같은 중견국들입니다. 오늘은 이 새로운 국제 환경 속에서, 중견국들이 어떻게 ‘편을 고르는 외교’가 아니라 순간을 선택하는 외교, 다시 말해 거래적 현실주의의 세계에서 외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는지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2026.1.7. 국제 정치 지형에 지각 변동이 일어난 날로 기록될 것이다. 단 한 장의 대통령 각서로 백악관은 미국 정부 부처와 기관들에게 수십 개 국제기구에 대한 참여와 재정지원을 중단하고, 미국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탈퇴 조치를 이행하라고 지시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회원권은 더 이상 ‘상속된 의무’가 아니다. 이제 그것은 성과가 증명될 때만 갱신되는 계약이다.


이를 고립주의라고 부르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그 해석은 지금 벌어지는 일을 놓친다. 이는 권력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행사되는 지점을 재배치하는 과정이다. 워싱턴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레버리지—안보, 예산, 집행, 표준—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제도적 군더더기(institutional clutter)를 정리하고 있다. 국내정치는 인내심이 줄었고, 전략 경쟁은 더 노골적이다. ‘회원국’이라는 부드러운 약속은 ‘측정 가능한 수익’이라는 딱딱한 논리로 대체되고 있다.


이를 ‘거대한 해체(The Great Unbundling)’라고 부를 수 있다. 과거에는 한 덩어리로 묶여 있던 약속들이 이제 선택적으로 분해되어, 각각의 항목이 다시 협상 가능한 조건부 조항으로 바뀌고 있다.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라이벌의 조직 언어가 형성되고 있다. 상하이협력기구(SCO)의 톈진 선언은 주권적 평등, 비차별, 그리고 에너지·공급망 회복력 같은 키워드를 앞세워, 서구식 조건부 규범 없이도 작동하는 협력의 전제를 제시했다. 핵심은 어느 플랫폼이 다른 플랫폼을 ‘대체’하느냐가 아니다. 핵심은 세계가 다극화로 가는 동시에, 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다자주의는 약화된 상태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여러 무대, 여러 규칙, 그리고 분절된 집행이다.

로버트 코헤인(Robert Keohane)

수십 년 동안 국제질서는 안심되는 거래를 제공해 왔다. 규칙을 존중하고 제도에 참여하며 시장을 개방하면 안정과 성장, 발언권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특히 중남미의 중견국들에게 이 약속은 구호가 아니라 작동하는 전략이었다. 군사력이 부족한 대신, 이들은 법과 무역, 평판에 투자했고 그 선택은 성과로 돌아왔다. 그러나 로버트 코헤인(Robert Keohane)이 저서 『패권 이후』에서 논했듯, 패권 이후에도 협력은 지속될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남아 있는 행위자들의 차가운 이익을 만족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그 조건이 이제 점점 더 자주 깨지고 있다.


규칙은 남아 있지만 구속력은 얇아졌다. 정렬은 여전히 요구되지만 자동적이지 않다. 경제정책은 효율의 언어가 아니라 안보의 문법으로 더 자주 쓰인다. 조약의 우아한 문장들은 공급망, 핵심광물, 기술 통제라는 무딘 어휘와 경쟁해야 한다. 제도는 살아남았지만, 행동을 안정적으로 고정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힘의 균형을 반영하는 경우가 늘었다.


이 변화는 초강대국이나 취약국보다 중견국에게 더 잔인하게 작동한다. 중견국은 규칙을 만들 힘은 없지만, 규칙이 휘어질 때 가장 먼저 노출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론은 단순하다. 영향력은 규칙 준수(compliance)에서 레버리지(leverage)로 이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시스템을 잘 따르는 국가’가 신뢰를 얻었다면, 이제는 파편화된 지형에서 길목(초크포인트)을 쥔 필수 파트너가 되는 국가가 발언권을 얻는다.

파리드 자카리아(Fareed Zakaria)

여기서 ‘다중 정렬(multi-alignment)’은 도덕적 모호함이 아니다. 그것은 규율의 기술이다. 목표는 동맹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배타성(exclusivity)을 거부하는 것이다. 제도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도구로서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전략적 자율성은 거리를 두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포획되지 않으면서 관여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중남미는 이 변화의 시험장이다. 핵심광물을 보자. 리튬과 희토류는 더 이상 단순한 원자재가 아니다. 그것은 교섭의 칩이다. 자원 접근을 기술 접근, 정제·가공 역량, 공급망 표준과 결합할 수 있는 중견국은 기동 공간을 확보한다. 요점은 단기 임대료(rent)를 얻기 위해 후견국을 서로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파트너도 미래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거래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또 다른 길목은 물류와 치안이다. 항만, 전력망, 데이터 인프라는 전략 자산이 됐다. 집행 역량도 그렇다. 조직범죄 리스크는 이제 조세정책 못지않게 투자 신뢰도를 ‘가격’으로 매긴다. 이런 조건에서 가장 ‘안전해 보이는’ 선택—경직된 정렬—이 오히려 가장 위험할 수 있다. 후견국의 국내정치가 흔들리는 순간, 그 정렬의 조건 자체가 다시 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길은 공짜가 아니다. 다중 정렬은 높은 외교 역량과 국내적 일관성을 요구한다. 작은 실수는 배신으로 읽히고, 침묵은 동의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유동적인 체제에서 경직은 더 큰 비용을 낳는다. 거래적 현실주의는 배타적 충성을 지속적인 보호로 바꿔주지 않는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국제법과 제도는 여전히 중요하다—다만 역할이 달라졌다. 그것은 도덕적 피난처가 아니다. 협상의 도구다. 이해가 맞을 때는 지렛대가 되고, 맞지 않을 때는 기준점이 된다. 변화하는 체제를 정확히 읽는 중견국은 규범, 절차, 연대를 활용해 과잉을 제약하는 ‘연성 균형’을 구사할 수 있다.


다가오는 질서는 향수나 허세를 보상하지 않는다. 변화를 일찍 인식하고, 환상 없이 대응하는 국가를 선호한다. 강대국에게는 선택과 집중의 시대이고, 도전자에게는 새로운 구조를 짜는 시기다. 중견국에게는 규율의 시험이다.


자동 정렬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더 까다로운 요구다. 기술로서의 외교, 실천으로서의 균형이다. 세계는 이제 “어느 편이냐”를 묻지 않는다. “무엇을 가져왔는지, 그리고 언제 움직일 줄 아는지”를 묻는다.


2026년, 중립은 공백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과 파트너, 국내정치가 상시 감사하는 고위험 퍼포먼스다. 생존은 진영을 고르는 자가 아니라, 순간을 선택하는 자의 몫이다. 그리고 그 관련성은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 한다.


(사진 출처: 개인 소장)


Disclaimer - This post was prepared by Sang Yeob Kim in his personal capacity. The opinions expressed in this article are the author's own and do not reflect the view of his empl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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