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명단·종료시각 확정(스톱워치 첫 등장)
2016.12월 어느 추운 겨울 유엔 본부 지하 제5회의실(Conference Room 5).
“미스터 김, 지금 들어가실 겁니까? 회의 시작은 5분 뒤입니다.”
“아직요.” 나는 대답하면서도 복도 끝 벽시계를 일부러 외면했다. 제5위원회 복도에서 ‘5분’은 시간 단위가 아니라 협상의 온도 단위였다. 빨리 시작하면 준비가 덜 됐다는 항의가 나오고, 늦게 시작하면 ‘효율’이 등장한다. 그 사이에서 코디네이터(간사)는 표정을 유지해야 한다. 표정이 흔들리면, 절차가 흔들린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복도는 낮은 소음으로 가득했고, 카펫은 발걸음을 삼켰다. 대표들은 서류철을 끌어안고 지나갔다. 그들 사이에서 내 서류철 속 한 장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List of Coordinators/Facilitators’ 133(a) 아래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회의실 문 옆의 작은 사무공간으로 들어갔다. 창문 없는 방, 프린터의 온기, 종이와 커피 냄새. 무대 뒤 배선실 같은 공간이었다. 천장 형광등은 잔잔한 윙윙거림을 냈고, 그 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절차’라는 단어와 함께 같은 주파수로 울렸다. 합의는 조명 아래에서 발표되지만, 결함은 이런 방에서 먼저 드러난다.
책상 위에 시나리오를 펼쳤다. 개회 멘트, 발언 순서, 예상되는 ‘추가 발언’ 지점. 나는 표시 위에 점을 하나 더 찍었다. ‘추가 발언 요청’이 나오면, 회의는 내용에서 절차로 넘어간다. 절차 싸움은 한 번 불붙으면 쉽게 꺼지지 않는다.
“참석자 확인됐습니까?” 내가 옆의 사무국 직원에게 물었다.
“주요 그룹은 다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짧게 말했다. “G77, EU, Like-minded… 그리고 그쪽도요.”
그 ‘그쪽’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방 안의 무게를 바꾸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명단을 훑으며 사람들을 분류했다. 원칙을 길게 말하는 사람, 절차를 방패로 쓰는 사람, 조용히 중재하는 사람, 그리고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
종료 시각을 확정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종료 시각은 ‘언제 끝내느냐’가 아니라 ‘누가 포기하느냐’를 결정한다. 오늘 의제—Proposed programme budget outline for the biennium 2018–2019—는 숫자보다 문장이 길어지는 종류의 안건이다. 프레임을 잡는 쪽이 이긴다. 그리고 프레임은 대체로 ‘마지막 한 문장’에 숨어 있다.
“의장실은 13시 전 종료를 원합니다.” 직원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12시 45분.” 내가 숫자를 내뱉었다. 충분하지 않은 시간. 그러나 충분한 척할 수 있는 마감. 누군가는 이 시간표를 ‘관리’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압박’이라고 부를 것이다.
문이 열리더니 제5위원회 의장 보좌관이 얼굴을 내밀었다. “코디네이터, 시간 계획 확정하셨습니까?”
“확정했습니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12시 45분 종료로.”
“좋습니다. 개회 멘트에서 시간 계획을 분명히 해 주십시오.” 보좌관은 말끝을 흐리지 않았다. “추가 발언은 관리가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더 많은 말을 삼켰다. 공식 언어는 늘 덜 정확한 방식으로만 진실에 접근한다.
보좌관이 나가자 직원이 낮게 말했다. “시간을 그렇게 못 박으면, 바로 ‘발언권 침해’라고 나올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절차를 먼저 합의시키는 겁니다.” 나는 시나리오 첫 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목적, 절차, 시간계획—이 세 가지를 먼저 묶어 두면, 누군가의 불만도 ‘내 판단’이 아니라 ‘회의의 합의’와 충돌하게 된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대표부’라고만 떠 있었다.
“상엽, 지금 어디야?” 팀장 목소리가 들렸다.
“회의실 옆입니다. 시간표 확정했고, 명단도 정리 중입니다.”
“12시 45분, 맞지?” 그는 내 결심을 확인하듯 물었다.
“네. 그 시간으로 갑니다.”
“좋아. 오늘 문구가 프레임이야.” 팀장이 낮게 말했다. “나중에 보고서 문장 한 줄로 정리될 거다. '권고한다.' 같은 단어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책상 위 문서 기호들을 잠깐 바라봤다. 건조한 문장들이 사람들의 피로와 양보를 눌러 담는 방식이 떠올랐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회의가 끝난 뒤의 장면이 먼저 떠올랐다. 누군가 단상에 올라 위원회가 예산 개요 결의안 채택을 총회에 권고한다고 읽는다. 문서 번호와 단락 번호가 정확히 불리고, 반대 버튼이 눌리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합의의 증거로 남는다. 회의장에서 격렬했던 논쟁은 그 한 문장 안에서 깔끔하게 증발한다. 나는 이미 여러 번 그런 증발을 봤다. 어떤 날은 Chair가 부드럽게 회의를 몰고 가고, 어떤 날은 Rapporteur가 변경사항이 곧 문서에 반영될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갈등을 종이 속으로 눌러 넣는다. 그러고 나면 남는 건 서늘한 제목뿐이다. Proposed programme budget outline. 그리고 그 아래, 각국이 서로를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단어를 포기했는지에 대한, 누구도 읽지 않는 기억들이다.
“추가 발언 요청 들어오면?” 팀장이 물었다.
“대기자 명단에 올리고, 시간은 동일하게.” 내가 말했다. “선합의를 계속 상기시키겠습니다.”
“너무 날카롭게 자르지 마.” 팀장이 덧붙였다. “적을 만들면, 다음 안건에서 우리도 손해를 봐.”
“하지만 너무 부드러우면, 회의가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받아쳤다.
팀장은 짧게 웃었다. “그러니까 네가 거기 있는 거지. 끊되, 욕 먹지 말고.”
통화가 끊기자 방 안이 더 조용해졌다. 나는 종이 가장자리를 정리하며, 오늘 내 역할이 ‘허용’이 아니라 ‘종료’에 가깝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재킷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끝에 닿았다. 스톱워치. 나는 그것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작은 물건이 방 안의 공기를 바꾸는 걸 느꼈다.
직원이 숨을 삼키듯 말했다. “이걸로 시간을 재면… 대표들이 화낼 텐데요.”
“화낼 겁니다.” 나는 버튼 위에 엄지를 올렸다가 내렸다. “그래도 누군가는 시간을 공정하게 보이게 해야 하니까요.”
“누르실 겁니까?” 그녀가 물었다.
“누르지 않으면, 누군가가 계속 누를 겁니다.” 나는 내 목소리를 너무 차갑지 않게 조절했다. “추가 발언 버튼으로.”
복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유와 확신이 섞인 웃음. 나는 문틈으로 그 사람의 어깨선을 보았다. 급할 이유가 없는 걸음. 그 대표는 잠깐 고개를 돌려 스톱워치를 봤고, 시선이 내 얼굴로 올라왔다. 말은 없었다. 대신 ‘당신이 뭘 하려는지 안다’는 표정이 남았다. 나는 스톱워치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차가움이 손바닥에 남아 장갑처럼 감겼다.
문밖에서는 통역 부스의 불빛이 켜지고, 경비원이 출입 명단을 다시 확인하는 소리가 들렸다. 회의실 안쪽에서 마이크 테스트가 이어졌다. 하나, 둘, 셋—기계적인 숫자들이 인간의 문장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나는 넥타이를 한 번 만져 매무새를 고쳤다. 이런 사소한 동작이 나를 진정시키는 게 아니라, 내가 진정한 척하게 만들었다.
나는 한 번 더 숨을 골랐다.
이제 문을 열면, 나는 칠레라는 국가의 사람이 아니라 절차의 사람이 된다.
(사진 출처: 개인소장)
Disclaimer - This post was prepared by Sang Yeob Kim in his personal capacity. The opinions expressed in this article are the author's own and do not reflect the view of his empl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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