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합의
2016.12월 어느 추운 겨울 유엔 본부 지하 제5회의실(Conference Room 5).
“미스터 코디네이터, 마이크는 켜졌나요?” 사무국 직원이 내 귀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네. 마이크 이상없네요. 참, 통역 부스는 준비됐고, 명단은 확인했지요? 오늘은 outline이에요. 다들 예민해요.”
나는 대답을 하면서 스톱워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플라스틱 몸체가 회의장의 흰 조명 아래서 과하게 반짝였다. 어떤 물건은 존재만으로도 사람의 태도를 바꾼다. 스톱워치는 그런 종류였다. 제5위원회 회의실은 늘 비슷했지만, 그날은 유독 ‘시간’이 가구처럼 느껴졌다. 카펫의 두툼한 결, 헤드셋의 파란 플라스틱, 각국 대표단의 명패가 줄지어 선 자세. 그 모든 것이 “이제부터는 말이 돈이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 자리는 대표단이 아닌 조정자라는 이름의 애매한 의자였다. 공식적으로는 Coordinator. 결의안 문안 협의를 위해 임시로 세워지는 권한은 얇고 책임은 두꺼운 역할. 나는 주유엔칠레대표부의 정책보좌관이 아닌 제5위원회 조정자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오늘 다루는 것은 Proposed programme budget outline for the biennium 2018-2019—모두가 ‘5.4’라고 줄여 부르던 숫자의 윤곽선이었다. outline. 본문이 아니라 윤곽. 그런데 유엔에서 윤곽이란 결국 본문을 결정하는 칼자국이다.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나는 노트의 첫 줄을 다시 확인했다. Purpose—Procedure—Time plan. 세 단어가 날카롭게 붙어 있었다. 오늘의 ‘선합의’는 실무자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문장에 들어가기 전에, 문장이 태어날 방식부터 합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의는 곧장 ‘추가 발언 요청’이라는 괴물에게 먹힌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드물다. 대신 손이 든다. 그리고 그 손은 대개 “one more point”로 시작한다. 그 한 번이 시간을 두 번 훔친다.
나는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빨간불이 켜지며, 방 안의 속삭임이 한 박자 늦게 가라앉았다. 통역 부스 유리 너머로 여섯 개의 얼굴들(서반아어, 영어, 중국어, 불어, 러시아어, 아랍어)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은 피곤했고, 피곤함은 곧 문서의 형태로 나타난다—각주, 괄호, 대괄호. 어떤 대표는 종이보다도 먼저 헤드셋을 착용했다. 이 방에서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여러 언어로 옮겨지는 비용이었다.
나는 개회 멘트를 천천히 꺼냈다. 공식적인 인사말과 달리, 이 멘트는 상황을 규정하는 문장이었다. 목적을 먼저 밝혀야 했다. 우리에게는 ‘무엇을’ 논의할지보다, ‘무엇을 논의하지 않을지’가 더 중요할 때가 많았다.
“대표 여러분, 오늘 비공식 협의의 목적은 안건 133(a) 관련 초안 결의안의 문안을 정리하고, 가능한 한 브래킷을 줄이는 것입니다. 현시점 기준 텍스트는 A/C.5/71/L.17입니다.”
누군가 뒤쪽에서 짧게 확인 질문을 던졌다. 같은 문서인지, 같은 페이지인지, 같은 세계인지 확인하는 듯한 어조였다. 나는 문서번호를 다시 반복해 주었다. 대표단들은 숫자를 들으면 안심한다. 의미는 각자 다르게 해석해도, 숫자는 동일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절차였다. 절차는 규칙이 아니라 신뢰의 대체재였다. 신뢰가 충분하다면 절차는 얇아진다. 신뢰가 부족하면 절차는 두꺼워지고, 그 두께가 결국 시간을 잡아먹는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두께를 먼저 제시했다.
“제가 제안드리는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안은 문단별로 위에서 아래로 진행합니다. 특정 문구에 이견이 있으면 즉시 브래킷으로 표시하고, 이유는 한 문장으로만 남깁니다. 브래킷이 누적되는 문단은 ‘주차’한 뒤, 마지막 세션에서 다시 모아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주차 목록을 별도 페이지에 적어 두었다. 주차가 늘어날수록, 회의는 도로가 아니라 주차장이 된다. 그래서 ‘주차’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방 안의 온도가 약간 내려갔다. 특히 큰 공여국 쪽의 대표단이 그랬다. 나는 그를 속으로 ‘모굴’이라 불렀다. 돈을 가진 사람은 돈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principle을 말한다. 그의 몸짓은 늘 단정했고, 단정함은 종종 경고의 또 다른 형태였다.
“Parked issues have a habit of staying parked,” 모굴이 짧게 말했다. “We should be realistic.”
“그래서 시간 계획을 제안드립니다.” 나는 감정을 싣지 않고, 숫자만 꺼냈다. “오늘 회의는 12시 30분에 종료합니다. 10시부터 11시까지는 전문과 일반 원칙, 11시부터 12시까지는 operative, 12시부터 12시 30분까지는 주차 목록. 각 대표단의 개별 발언은 가능하면 2분 이내로 부탁드립니다. 동일 쟁점은 제가 묶어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몇몇 대표들이 웃었다. 웃음은 동의가 아니라 긴장 해소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 흔적이 필요했다. 웃음이 없으면, 절차는 곧 통제처럼 보인다. 통제는 반발을 낳고, 반발은 결국 발언 시간을 늘린다. 나는 웃음을 받아 두되, 방치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합의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였다. 누군가 이견을 제기했을 때, 그 이견이 문장을 멈추게 하지 않도록 설계해야 했다. 나는 그 문장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반대가 없으면 브래킷을 남기고 이동한다. 지나간 문단은 다시 열지 않는다. 다시 여는 순간, 회의는 뒤로 걷기 시작한다. 뒤로 걷는 회의는 늘 더 크게 넘어지기 마련이다.
“이의가 없으시면, 브래킷은 남기고 다음 문단으로 이동합니다. 이미 지나간 문단의 재개는 제가 마지막 ‘주차 세션’에서 요청할 때만 하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나는 방 안을 한 바퀴 훑었다. 명패들 사이로 시선이 오갔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아무 표정도 아니었다. 유엔에서 가장 강력한 동의는 침묵이다. 반대가 아니면 합의다. 그가 손을 들지 않았다. 대신 펜을 들어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그 움직임은 조건부 승낙의 서명이었다.
“¿Alguna objeción?” 나는 서반아어로, 의식처럼 말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통역 부스의 불빛이 한 번 깜빡였고, 누군가 헤드셋을 귀에 더 깊게 밀어 넣었다. 그 침묵이 방 안에 얇은 막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그 막이 찢어지기 전에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야 했다.
“그럼, 목적·절차·시간계획에 대한 선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내 앞의 문서 첫 페이지에는 ‘윤곽’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무거운 표현들이 떠 있었다. 격년 합계, 감축 폭, 그리고 ‘시험적 전환’이라는 문장—연도별 예산 주기로 바꿔 보자는 그 표현은 한 줄로는 가벼워 보이지만 각 대표단의 수도에서는 각기 다른 정치적 비용으로 환산될 것이다. 내가 다루는 것은 숫자 자체가 아니라, 숫자를 둘러싼 체면과 불신, 그리고 그 불신을 잠시라도 접어 두게 만드는 진행의 리듬이었다.
나는 스톱워치의 스타트 버튼 위에 엄지를 올렸다. 버튼은 평범했고, 그 평범함이 오히려 위협적이었다. 누군가의 하루를 바꾸는 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작고 딱딱한 버튼 하나일 때가 있다. 나는 버튼을 눌렀다.
00:00:00이 00:00:01로 바뀌는 순간, 회의장의 공기는 더 이상 ‘말할 준비’가 아니라 ‘결정할 준비’로 변했다. 마이크의 빨간불이 하나씩 켜지고 꺼졌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통역을 거쳐 다른 언어로 되돌아왔다. 그 사이, 내 앞의 작은 화면에서 숫자는 차갑게 계속 달렸다.
(사진 출처: 개인소장)
Disclaimer - This post was prepared by Sang Yeob Kim in his personal capacity. The opinions expressed in this article are the author's own and do not reflect the view of his empl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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