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시작
2016.12월 어느 추운 겨울 유엔 본부 지하 제5회의실(Conference Room 5).
“미스터 코디네이터, 원칙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 대표는 종이를 보지 않았다. 시선은 방을 훑었고, 마이크의 빨간 불은 고요하게 켜져 있었다. 그 고요가 오래갈 조짐이었다.
“원칙이라면, 간결하게 부탁드립니다.” 내가 말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간결’이라는 단어는 늘 칼날처럼 날아왔다.
“물론입니다.” 대표는 미소까지 붙였다. “하지만 이 안건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조직의 신뢰와 책임, 그리고 예산 규율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요?” 내가 재촉하지 않으면서 물어봤다.
나는 스톱워치를 쥔 채로 누르지 않았다. ‘원칙’은 끊기지 않는다는 신화가 있어, 먼저 듣는 척을 해야 했다.
대표는 숨을 고르고, 원칙을 늘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난 격년 기간 동안 지출의 탄성을 보았습니다. 여행, 컨설턴트, 장비—모든 항목이 스스로를 정당화했습니다. 이제는 다릅니다. 우리는 감축을 약속했고, 그 약속은 수치로 증명돼야 합니다.”
“어느 감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EU 쪽에서 마이크가 켜졌다. “총액의 감축입니까, 아니면 특정 비용항목의 감축입니까?”
“둘 다입니다.” 대표가 즉시 답했다. “우리는 구조적 절감을 말합니다. 임시방편이 아니라.”
G77 좌석에서 다른 마이크가 켜졌다. “미스터 코디네이터, 원칙은 동의합니다. 그러나 ‘구조적 절감’이라는 표현은 특정 부문의 희생을 전제합니다. 개발을 위한 지역 협력과 역량 강화는 실험 대상이 아닙니다.”
“그 의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표가 말했다. 부드러움이 더 단단했다. “다만, 의무는 무한한 자원이 아닙니다. 지금 논의하는 것은 아웃라인입니다. 여기서 원칙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엔 문장이 아니라 돈이 말하게 됩니다.”
내 왼쪽에서 사무국 직원이 메모를 밀어 넣었다. 아랍어 채널 지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연이 얼마나 됩니까?” 내가 속삭였다.
“십 초쯤요.” 직원이 말했다. “문장이 길어지면 더 벌어집니다.”
“그럼 다음 개입 때 속도를 요구하겠습니다.”
“원칙 발언에 속도를 요구하면, 그 자체가 쟁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필요합니다.”
통역 부스의 손이 빨라질수록, 방 안의 집중력은 얇아졌다. 한 문장이 반 박자씩 늦게 도착했고, 늦은 의미를 따라잡느라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놓쳤다. 누군가는 메모를 포기하고 표정만 유지했다. 마치 잠수함 안에서 공기가 줄어드는 것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가 마이크를 끄고 사무국 직원을 불렀다. 회의실에서 ‘마이크를 끈 채 부르는’ 것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권력이다. “지금 몇 분 째입니까?”
“7분이 넘어갑니다.”
나는 스톱워치를 누르지 않았지만, 내 안에는 이미 숫자가 있었다. 시간은 손목이 아니라 경험으로도 잴 수 있다. 내가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5분은 이미 지나갔네요.”
나의 눈이 명단을 스쳤다. 대기 버튼은 이미 셋, 출구 쪽으로 고개를 흘리는 사람들이 늘었다.
“미스터 코디네이터,” 뒤에서 짧게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시간 계획을 상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마이크를 켜지 않은 채 말했다. “우리 사무국 직원이 관리 중입니다.” 그 말은 ‘내가 당신을 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발언자 명단을 기록으로 남겨 주십시오.” 다른 대표가 말했다. “그리고 누가 대기 중인지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짧게 답했다. “직원이 명단을 공유할 겁니다.”
그 대표의 발언은 여전히 ‘원칙’이라는 보호막 안에 있었다. 그는 이제 예산 주기 개혁까지 끌어왔다. “그리고 예산 주기 개혁에 관해서도—우리는 연도별로 가는 시험을 시작해야 합니다. 격년은 느립니다. 느림은 낭비를 숨깁니다.”
“느림이 낭비만 숨기는 건 아닙니다.” 뒤쪽에서 누군가가 차갑게 말했다. “느림은 숙고를 지킵니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협의 시간을.”
“숙고는 환영합니다.” 앞서 그 대표가 즉시 답했다. “하지만 무한한 숙고는 결정 회피입니다.”
“그건 당신의 해석입니다.” 작은 도서국 대표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우리에게 ‘추가 주말’은 사치가 아닙니다. 수도로부터 지침을 받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정을 정한 겁니다.” 대표가 말했다. “일정은 약속이고, 약속은 책임입니다.”
그가 ‘책임’이라고 말하자, 몇몇 얼굴이 굳었다. 이 방에서 책임은 대개 ‘상대의 비용’으로 들린다.
내 뒤에 있는 동료가 입술만 움직였다. “오늘도 길게 가네.”
“원칙은 길어야 안전하거든.” 내가 답했다. “짧아지면, 본심이 드러나.”
“그럼 언제 끊어?”
“끊을 명분이 생길 때.”
“지금 10분입니다.” 그가 다시 속삭였다.
“알고 있어.”
“그럼 언제?”
“그가 ‘명확히’라고 말하는 순간부터는, 원칙이 아니라 절차가 시작된다.”
대표는 ‘명확히’라는 단어를 꺼내며, 원칙을 실질 제안으로 미끄러뜨렸다. “명확히 말씀드리면, 우리는 특정 표현을 삭제해야 합니다. ‘요구한다’가 아니라 ‘권고한다’로—”
그 순간, 마이크의 불빛이 늘어났다. 버튼이 눌리는 소리는 작았지만, 방은 그 소리에 즉시 반응했다. 펜이 멈추고, 고개가 들리고, 통역 부스의 손이 더 빨리 움직였다. 삭제는 원칙이 아니라 거래다. 거래가 시작되면, 모두가 자신의 지분을 확인한다.
“미스터 코디네이터,” EU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아웃라인입니다. 표현의 강도를 이 단계에서 바꾸는 것은 과도합니다.”
“과도한 건 지출입니다.” 그 대표가 맞받았다. “표현은 의지를 반영합니다.”
“의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G77 쪽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약속의 언어가 약화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박혔다. 누르면 심판, 안 누르면 방이 나를 대신 계량한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문장은 짧았지만, 방의 중심이 그쪽으로 이동했다. “미스터 코디네이터, 제가 하나만 확인하겠습니다. 방금 제안은 원칙 발언입니까, 아니면 협상 문안 제안입니까?”
“둘 다입니다.”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원칙이 없으면 문안은 흔들리니까요.”
“문안이 흔들리면,” 그가 말했다. “우리 예산도 흔들립니다.”
“그건 위협처럼 들립니다.” 누군가가 작게 말했다.
“현실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실 한쪽에서 마이크가 켜졌다. 버튼이 눌리는 소리, 그리고 짧은 영어가 통역을 타고 번졌다.
내가 사무국 직원을 마이크 없이 불렀다.
“네, 미스터 코디네이터.”
“이건 응답권 요청인가요?”
“그렇습니다. 순서 문제로 번질 수 있습니다.”
“그럼 합의한 절차를 상기시키세요.”
“바로 하겠습니다.”
“지금입니다.”
“I request the floor to respond.”
내 목 뒤가 뻣뻣해졌다. 스톱워치의 차가움이 손바닥에서 심장 쪽으로 옮겨왔다.
나는 우리가 ‘선합의’로 묶어 둔 절차가, 이제 처음으로 실제 전투에 투입되는 순간임을 느꼈다. 나는 그 문장이 정치적 반박이 아니라, 순서와 시간의 반박이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첫 균열은 내용이 아니라 절차에서 시작된다. 내 엄지가 주머니 속 스톱워치를 찾았다. 아직 누르지 않은 버튼이, 방 안의 다음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조용히.
(사진 출처: 개인소장)
Disclaimer - This post was prepared by Sang Yeob Kim in his personal capacity. The opinions expressed in this article are the author's own and do not reflect the view of his empl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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