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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06. 2022

호텔 선인장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에쿠니 가오리는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함께 일본 3대 여류 작가로 불린다. '여자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불리기도 한다. 처음 에쿠니 가오리 작가를 알게 된 게 『반짝반짝 빛나는』인지,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초'는 희미하지만, '최고'는 확실하다. 바로 『호텔 선인장』이다.

  이 책을 펴면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가장 먼저 보이는 글이 바로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이다. 이 문구에 얼마나 가슴이 찡했는지, 지금도 얼마나 먹먹한가를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다. 자연의 신비라는 건 실로 대단해서 "덥다, 더워."를 남발하며 선풍기 앞에서 입을 벌리고 '아아아아'하고 소리를 내고 있다가 어느새 도톰한 수면 바지를 입고 전기장판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불볕더위도, 매서운 한파도 흔적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계절이란 그런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을 조금 슬프게 지난다. 이런 기분을 항상 느꼈는데, 뭐라고 표현할 길을 몰랐었다. 그런데 이 책의 시작 글을 읽고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숫자 2, 오이, 모자다. '호텔 선인장'이라는 아파트의 각각 1층, 2층, 3층에 거주한다. 저녁이면 2층 오이의 방에 모여 각각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도 나누고 음악도 듣는다. 큰 사건이나 사고 없는 일상의 나날이지만 그렇다고 평소와 마찬가지인 그런 매일은 아니다. 세 캐릭터는 조금씩 서로를 부러워한다. 나 또한 대화와 생각을 읽으면서 멋지다고 생각한 적이 꽤 많았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화를 낼 줄 아는 숫자 2, 태양 아래서 일하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오이, "내 알 바 아니지만."이라고 습관처럼 말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다정한 모자. 이들은 서로가 알고 있는 사이라는 것에 감사할 줄 안다. 이제 어디에도 없는 그리운 아파트 '호텔 선인장'에서 나와 이제 매일 밤을 함께 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

  어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2학년 말이었다. 우유 냄새가 싫다고 항상 제티를 가지고 다니던 초등학교 시절, 하늘색 하복 상의가 잘 어울리던 중학교 시절, 혼자 자취하면서 자주 나한테 자고 가라고 했던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회색 반팔 티셔츠에 청 스키니를 입고 하얀색 미니 크로스백을 멘 어제의 친구 모습이 생생하다. 10살 때 처음 만나 이제 우리는 23살, 대학교 졸업반 학생이다. 1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냈고, 서로를 모르고 지낸 날보다 알고 지낸 날이 더 많다. 내가 백 살까지 산다면 내 인생의 열에 아홉은 이 친구와 함께인 것이다. 그 친구가 없던 열에 하나의 시절은 정말 많지 않다.

  어제 친구랑 카페에 있을 때, 친구가 이력서를 적은 병원에서 합격 문자를 받았다. 두 곳에 지원했는데, 두 곳 다 합격이었다. 다음 달 7월에는 면접을 보러 간다고 한다. 이 친구가 증명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이력서용 메이크업을 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줬을 때도 그렇게 생경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인적성 검사와 면접을 봐야 해서 떨린다고 하고 있다. 내가 키운 자식도 아닌데, 워낙 어릴 때 만나서 그런지 이 친구가 면접을 본다니 대견하고, 간호사복을 입은 모습을 떠올리기가 아직 어색하다. 10년 넘게 친구로 지낸 다른 단짝 친구 둘은 이미 올해 초부터 직장인이다. 나만 빼고 모두 다 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돌아가면서 비밀 일기장을 썼던 친구들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처음 같이 본 친구들이, 사복보다 교복 입은 모습이 더 익숙한 친구들이, 제 몫의 어른 노릇을 하고 있다. 기분이 참 묘하다. 내 눈에 아직 한참 어린데, 언제 이렇게 컸나 싶다.

  호텔 선인장을 읽으면서 이 친구들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정말 많은 일상을 나눈 우리의 시간이 또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점점 더 만나는 횟수가 줄어드는 걸 알고 있다. 만날 때마다 자주 못 만나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앞으로는 더 보기 힘들 것 같다며 울상을 짓는다. 소설 속 캐릭터들처럼 매일을 함께 하다가 그러지를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서운하다기보다 그냥 보고 싶고, 불안하다기보다는 아쉽다. 나한테는 또 하나의 가족이다. 매일 보지 못하더라도 그 존재가 내 안에서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별 말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도 편안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는 건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있음을 안다. 이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주름을 걱정하고, 흰머리를 염색하고, 짧은 파마를 하고, 트로트를 부르고, 등이 굽고, 손자와 손녀를 예뻐하고, 눈이 침침하고, 뭐 그렇게 조금씩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다. 지금이 좋기도 한데, 그게 또 기대가 된다. 우리가 회상할 추억이 더 많기를 바라기에 앞으로도 쭉 많은 걸 함께 하고 싶다.

  누군가와 함께 한 날의 풍경의 냄새, 거리의 자동차들, 가로수의 그림자, 하늘의 구름, 카페에서 흐르던 노래, 맛집이라고 갔다가 실패했던 메뉴, 휴대폰에 새롭게 저장된 사진들, 순식간에 온 얼굴에 번지던 친구의 표정, 어느 순간 익숙해진 친구의 무의식적인 습관마저도. 눈을 떴을 때보다 눈을 감고 떠올릴 때 실제보다 더 선명하게 펼쳐지고, 떨어져 있는 순간에 더 단단해지는 것들이 있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친구가 즐겨 부르던 가수의 노래가 나오면 어느샌가 연락을 보내고 있기도 하고,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볼 때면 처음 중학교 교복을 받고 친구 집에 다 같이 모여 교복을 입었던 날을 떠올리기도 하고,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야 한다면서 약속부터 잡아두자던 친구의 호기롭던 말투가 떠올라 웃음 짓기도 한다. 모든 것은 내 안에 있으니 이렇게 꾹꾹 눌러 담아 언제고 꺼내 봐야지. 나의 숫자 2, 오이, 모자야, 오늘도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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