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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06. 2022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청춘 스케치 (부제 : 스무 살은 스무 살일 뿐)

  나란히 꽂힌 책들 사이에서 주우우우욱 기다랗게 시선을 두고 찬찬히 살피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제목이 있기 마련이다. 무작정 그냥 내가 고른 책을 읽고 싶어질 때는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책을 찾거나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처럼 책의 제목을 보고 고른다. 하얀 설탕도 갈색 설탕도 아니고, 흑설탕이라고 표기한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검은' 설탕. 어쩐지 좋았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고, 이다음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몰랐던 스무 살 여자애였다. 세상은 텅 비어 있었고 무엇을 해도 심심했고 아무것도 긍정할 수 없었다. 다만 아주 막연히 어딘가로 가고 싶었다.

  책의 첫 문단에서 주인공 '우수련'은 이야기한다. 화자의 말처럼 책의 내용은 모든 게 어리숙한 스무 살이 '퇴적층의 무늬를 만들며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운반'되는 내용이며, '스무 살은 스무 살일 뿐'이라는 걸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마음에 드는 두 대화.

 

  하나는 주인공과 친구 둘이 함께 나눈 대화.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서 초조한 주인공 우수련은 우리 모두를 보여주는 것 같다. 영신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초조해서 한껏 부산스럽다. 이게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건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건지,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심한 것과 초조한 건 달라. 초조한 건 말이야, 막연한 무위가 아니고 뭔가 해내야 할 일에 대한 강박"이라고 상경은 말한 후 '미경험'에 대해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경험을 했다 해도 마찬가지야. 초조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험을 해버리지만 여전히 초조해. 첫 경험 뒤엔 다음 경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라고 상경은 덧붙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역할도 임무도 많아진다. 어릴 땐 아장아장 걷는 것, 그거 하나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다들 생각해줬는데. 이젠 걷는 게 아니라 뛰는 것도 대단한 게 아니다. 100m를 9초에 뛰지 않는 이상. '한결같다'라는 건 참 힘들고 대단한 일인데, '시간은 흐르는데 나만 그대로'라는 느낌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달리기'에 빗대곤 한다. 상대는 나보다 적어도 2-30m는 앞서있는 것 같다. 불안해져서 힘껏 달려가 따라잡는다. 숨이 차올라 심호흡 몇 번 하는 사이 상대는 또 그만큼 멀어져 있다. 뛰면서도 심호흡을 하면서도 우리 모두는 초조한 것이다. 그렇다고 선두로 달리는 사람은 마음이 편한가? 그건 또 아니라는 게 문제다. '미경험'이 초조한 것처럼 '첫 경험'을 한 사람도 불안하다. 어쨌든 둘에게는 모두 '경험'이 계속해서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선두는 선두대로 힘들다. 불안해져 뒤돌아보는 사이 걸음은 늦춰지고, 방심하다가 따라 잡힐까 제대로 쉬지 못한다. 선두든 아니든 우리 모두는 초조한 것이다.

  결국 자신의 문제다. 뛸 때 뛰고, 쉴 때 쉬고, 자기가 자신의 페이스를 맞춰나가지 않으면 과부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뭔가를 해내야만 해, 남들보다 뒤처지면 안 돼,라고 타인에게 중심을 두고 자신을 윽박지르지 말 것. 뭘 하고 싶은지를 곰곰이 고민하고, 자신만의 보폭으로 우직하게 뚜벅뚜벅 나아갈 것. '나'를 중심에 두어야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나를 잊지 않고, 잃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심심'하지도 '초조'하지도 '강박'에 시달리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의 '중심'을 갖고 균형을 이룬 사람은 잠깐 비틀거려도 이내 자신의 힘으로 서있다.

 

  다른 하나는 환생에 대한 대화.

  주인공은 친구들과 사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카운터에 있던 마담이 환생에 대해 말한다. "지구 상의 사람들 육십오 퍼센트가 환생을 믿"고, "살아생전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라고. 거짓말 아니냐고 혀를 내두르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요?"라고 묻는 주인공에게 마담은 "그러면 다시는 안 태어나지."라고 답변한다.

  처음 이 글을 읽고, 오만상을 지었다. 전생에 나는 격하게 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음에 당황하고, 이번 생에는 정말 외모 지상주의를 온몸으로 실현해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 인간적으로 전생의 내가 키는 10cm 정도 더 큰 사람을 좋아했으면 지금의 나는 참 좋았을 텐데…….

  위의 첫 반응은 그냥 나의 웃긴 반응이다. 농담 반, 진담 밤의 반응이랄까.

  그래도 이 장면은 뭔가 '따뜻한 위로' 같았다.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전환될 때, 전환 전후의 에너지 총합은 항상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우리의 사후에도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건 '책임감'을 일깨운다.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 '신민희'라는 것의 흔적이랄까 에너지랄까 그런 어떠한 것이 존재한다는 건 참 신기하다. 두둥실 떠다니는 가루가 된다면 사람들에게 해로운 미세 먼지는 안 되었으면 좋겠다. 빗방울로 떨어져 내릴 거라면 가뭄 지역에 단비가 되길 바란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존재한다는 건 대단한 거니까. 그것만으로 대단하고 대견한 거니까. 정말 멋진 일임이 분명하다. 나의 무엇인가가 새겨지거나 남는다면 그게 이왕이면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기 위해 이 생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마담의 말을 듣고 '얼마나 애태웠으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로 태어날까…… 문득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라고 생각하는 화자를 보면서 나도 참 애틋해졌다. 생각해보면 그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눈, 코, 입, 눈썹, 콧구멍, 이, 속눈썹, 코털, 잇몸, 눈매, 콧등, 입술 색, 애교 살, 코뼈, 입꼬리……. 이외에도 이마 크기나 광대, 귀랑 턱, 그 모든 것들을 닮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는 건 정말 한 올 한 올, 한 땀 한 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쉽게 들기 어려운 생각 아닐까? 그건 그 외모가 좋았다는 게 아니라 정말 진짜 진심으로 사랑해서 그 모든 외모까지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를 만큼 사랑한 것이리라. 전생에 내가 지금의 내 얼굴을 한 나를 그렇게나 좋아해 줬다니 뭔가 내가 조금 엄청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전생의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를  충분히 예뻐하고 사랑해줄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그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하든 다른 감각과 이어지는 걸 좋아한다. 귀로 노래를 들을 때 어떤 장면이 그려진다든지, 책을 읽을 때 자동적으로 배경 음악이 들린다든지, 어떤 것을 음미할 때 누군가가 떠올라 전해주고 싶어 따뜻해진다든지, 뭐 그런 것들. 국어 시간에 지겹도록 들었을 '공감각'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전경린 작가의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을 추천한다. 문장이나 문단, 혹은 작은 단어만으로도 내 귓가에는 이미 노래가 재생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다정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즈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길이었다. 유원지의 맑고 한적한 길과 대형 트럭과 버스들이 달리는,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잎사귀가 공해에 검게 찌든 간선도로들, 좁고 긴 시장 길들, 오르막인 도시 언덕길, 길고 좁다란 골목길들, 변두리 어촌에서 바다로 가는 쇠똥이 퍼져 있는 뙤약볕 아래의 누런 흙길, 조개껍질들이 하얗게 띠를 두른 해변 모래길, 철길을 따라 나 있는 도시의 뒷길이나 높은 축대 위의 길, 화장터에 이르는 무덤 사이의 길, 계곡과 하천을 따가는 길들과 시외버스에서 내려 무턱대고 걷게 되는 낯선 소읍의 단층 상점거리들……
  세상에서 가장 관대한 것은 길이었다. 그것은 공기와 같이 지불을 청구하지 않았다. 길은 강처럼 이것과 저것 사이에 나 있었고, 나는 가끔 길과 강을 혼동해 도심의 거리 한가운데서도 소용돌이치는 물결에 떠내려가는 살마처럼 허우적거렸다.

가을 방학 - 속아도 꿈결

산책이라고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얽매인 데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갈 것

누굴 만난다든지 어딜 들른다든지 별렀던 일 없이 줄을 끌러 놓고 가야만 하는 것

인생에 속은 채 인생을 속인 채 계절의 힘에 놀란 채 밤낮도 잊은 채 지갑도 잊은 채 짝 안 맞는 양말로

산책길을 떠남에 으뜸 가는 순간은 멋진 책을 읽다 맨 끝장을 덮는 그때

 


  '얼마나 먼길을 헤매야 소년들은 어른이 되나-얼마나 먼바다를 건너야 갈매기는 쉴 수 있나-얼마나 긴 세월을 흘러야 사람들은 자유를 얻나-친구야 묻지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스무 살이란 원래 막막하라고 있는 나이 같았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있는 나이…… 어른들은 습관과 의무 속에서 살고 아이들은 충동과 잔소리 속에서 살며 나는 몽상과 도주의 욕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았다.

몽니 - 소년이 어른이 되어

소년이 어른이 되어 사람을 알아갈 때에 뜻하지 않던 많은 요구와 거친 입술들

소년이 어른이 되어 세상을 알아갈 때에 하얀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지겠지

나의 오늘이 흘러가면 서글픈 추억들 중에 작은 조각이 되겠지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라지듯 나를 스쳐가네  

 

 

 방 찾기를 포기하자 아무 계획도 없었다.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다. 그 시절, 언제나 나를 괴롭힌 것은 무한한 양의 시간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밤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을 때도 시간의 무한함 속에서 의지 없이 표류하는 느낌은 한결같았다.

처진 달팽이 - 말하는 대로

나 스무 살 적에 하루를 견디고 불안한 잠자리에 누울 때면 내일 뭐하지 내일 뭐하지 걱정을 했지

두 눈을 감아도 통 잠은 안 오고 가슴은 아프도록 답답할 때 난 왜 안 되지 왜 난 안 되지 되뇌었지

 

 

  마리는 침대에 눕고 나는 걸터앉았다.
  "우리도 언젠가는 남들과 비슷하게 살게 될까?"
  언뜻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해는 되었다.
 "언젠가는 그럴 거야. 남들과 다르게 살아도 결국 별다르지가 않은 거야. 그걸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
  나 역시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나도 아이를 둘쯤 낳고 분유와 기저귀를 사들이고 동네 빵가게에 빵을 사러 가고, 남편의 생일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러 시댁에 가서 전을 부치는 그런 삶을 살게 될까…… 때론 그전에 너무 멀리 가버릴까 봐 두려워. 서른 살이 되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잖아. 나도 가끔 그 부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해."
  너무 멀리 가도, 얼마 가지 못해도, 서른 살이란 어차피 난처한 나이일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영신과 상경과 나, 모두들 가지고 있는 스무 살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아니면 서른 살이란 소녀들로선 상상력의 종말인지도 모른다. 서른 살에 대해선 상상의 질료가 아직 없는 것이다.

토이 - 취한 밤

언제부턴가 말이야

먹고 살아가는 문제, 돈을 번 친구들, 아이들 얘기

우리 참 달라졌구나

언제부턴가 말이야

농담에 숨어서 삼켜 버린 맘, 술에 취해 서성대는 밤

그런 내가 익숙해져

그렇게 우린 변해가고

시간은 멋대로 흐르고  

 


  "스무 살이 인생이 되게 하지는 말아라. 스무 살은 스무 살일 뿐이야. 삶으로 끌고 가지는 마."

병살 - 사라질 것들

어찌 됐건 살아지고, 또 결국엔 다 사라져

우린 누군갈 만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와는 갈라져

my friend, don't be afraid, 우린 서툴고 또 미흡해

오늘 밤 막잔을 비울 때쯤엔 자책은 제발 하지 말아줘

누가 알아?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아무도.

인생이란 건 창 밖의 날씨 같지

난 누워서 그저 바라볼래

thunder or rain, or sunrise or wind

오늘 밤 그 길을 나와 함께 가볼래?  

 


  ……그날 밤 너는 나를 놓아버렸니? 그래서 내가, 네가 당겼던 그 힘만큼 무섭도록 빠르게 검은 우주 한가운데로 밀려난 거니? 이곳엔 별이 빛나지 않아. 얼음과 먼지 뭉치인 검은 별들, 빙산 같은 결빙의 별들을 난 지나고 있어…… 네가 가 있는 곳은 어떠니? 우린 다시는 서로 소식을 전할 수 없게 되겠지. 모든 것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지, 지난 일이 벌써 꿈같아. 이상해. 무엇보다도 너의 제비초리가 선명하게 기억나니 말이야. 너에 대한 기호처럼. 언젠가 그런 제비초리를 가진 애를 만나면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겠지. 안녕. 작별의 말은 참 짧은 거구나. 안녕.

페퍼톤스 - 검은 우주

돌이킬 수 없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은 흘러가고

뒤틀린 기억 기나긴 밤 속을 언제까지라도 달려

그 언젠가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이곳은 검은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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