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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06. 2022

안나 카레니나

좋지 아니한가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당신이 쓴 소설의 첫 문장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회고될 것을 레프 톨스토이는 알았을까. 『안나 카레니나』라는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이 소설의 첫 문장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 문장인 것이다. 나 또한 이 문장을 통해 처음으로 『안나 카레니나』라는 소설을 알게 되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특히 소설가들이 좋아하는 소설인 것 같다. 내가 읽은 책만 보더라도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인용하거나, 이 소설을 언급한 책이 꽤 있다.

 

  공지영 작가의 『즐거운 나의 집』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구절처럼 '행복한 집은 고만고만하게 행복하지만 불행한 집은 가지가지로 불행하다.'라는 말은 그러고 보니 틀린 것 같았다. 행복도 불행도 가지가지다, 가 더 맞는 것 같았다. 사람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

  바바라 오코너 작가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소설 《안나 까레리나》의 첫 구절이다.

 

  밀란 쿤데라 작가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녀가 토마시의 아파트로 오던 날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던 소설 첫머리에서 안나는 브론스키를 이상한 상황에서 만난다. 그들은 방금 누군가가 열차에 치여 죽었던 역의 플랫폼에 있었다. 소설 끝에서 열차 아래로 몸을 던지는 사람은 바로 안나다. 처음과 끝에 동일한 테마가 등장하는 이러한 대칭 구성은 대단히 '소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소설적이라는 말이 '꾸며 낸', '인공적인', '삶과는 유사성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란 이런 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의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이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한다.


   2015년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감상했다. 외국 항공을 이용했기 때문에 한글 자막이 없었다. 자막 하나 없이 봤기 때문에 내용 전체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계단 층계를 사이에 두고 브론스키가 안나를 올려보고, 안나가 그 눈빛을 피하기 전 잠깐의 그 묘한 감정과 분위기가 생생했다. '키이라 나이틀리'라는 여배우가 더 좋아진 영화이기도 하고, '사랑'이 뭔지, '결혼'이 뭔지, '여자'에 대해, '어머니'라는 역할에 대해, 생각해봤다.

 

  더불어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잠』이라는 소설을 며칠 전에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소설 속 화자는 잠이 오지 않는 밤 동안에 혼자서 여러 차례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다. 그러는 동안에 자신이 좋아하던 독서를 즐기지 않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슬퍼하고, 이토록 열정적으로 책을 읽던 게 언제였는지를 회고한다. 이 소설을 통해 나는 더욱 『안나 카레니나』가 읽고 싶어졌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안나 카레니나'라는 소설의 제목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은 '안나 카레니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의 시작은 안나 카레니나의 친오빠인 '오블론스키'이고, 끝은 '레빈'의 깨달음으로 맺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소설의 '시작'을 안나가 기차역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끝'을 안나가 기차역에서 자살하는 장면으로 기억한다. 이는 사람들이 그만큼 소설 속 여러 인물 가운데 '안나 카레니나'라는 인물을 눈여겨보았으며, 안나의 삶과 죽음이 인상 깊게 남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사실 소설을 읽다 보면 비중 상으로는 안나보다 '레프 톨스토이'가 많이 투영된 '레빈'이라는 인물이 상당하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안나만큼이나 레빈이라는 인물의 고뇌와 삶이 매력적이었다. 영화를 볼 때는 잘 몰랐는데, 소설을 읽을 때는 레빈과 레빈의 형 '코즈니셰프'와의 대화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안나 카레니나라는 소설은 단순한 로맨스 소설도 아니요, 한 여성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이 소설은 '사랑', '결혼', '삶', '정치', '종교', '진리', 뭐 하나 손꼽아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레프 톨스토이'라는 사람을 찬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톨스토이는 하나의 세계이자 인간이며, 톨스토이를 읽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문화인이라고 할 수 없고, 러시아를 아는 인간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 - 막심 고리끼
톨스토이의 소설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삶의 파편이다. - 매튜 아놀드
나는 서슴없이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회 소설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 토마스 만
만일 세상이 스스로 글을 쓸 수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쓸 것이다. - 이사크 바벨


  앙드레 지드는 "톨스토이가 큰 산인 줄 알았는데, 조금 물러나서 보니 그 뒤에 아스라하게 뻗어있는 거대한 산맥은 도스토예프스키였다."라고 이야기했다. 그 이유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걸작 『죄와 벌』이라는 작품이 설명해준다. '권선징악'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모두가 말하던 그 '진부한 주제를 하나도 진부하지 않게' 표현하는 능력. 그것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모두가 최고로 꼽는 이유이리라. 앙드레 지드의 의견에 살짝 내 의견을 말하자면 이렇다. 문학의 어떤 부분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누가 '러시아 문학'의 선구자냐는 질문에 각기 다른 답이 나오겠지만, 나는 톨스토이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진부한 것을 진부하지 않게 그려낼 줄 아는' 천재라는 것이다.


  확실히 『안나 카레니나』는 읽으면서 많은 생각과 감정을 일으킨다.

  몇 가지를 꼽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안나

  '자신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한 번도 봐주지 않았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카레닌을 사랑할 수 없자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라도 가정을 유지하려고 자신이 얼마나 애썼는지 아냐고, 기다랗게 적어나간 안나의 고백은 절절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에 사교계에 대한 부푼 가슴을 안고, 사랑 없이 결혼을 한 여자는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사무치게 후회한다. '사랑' 없이 한 결혼에 그렇게도 힘들었는데, '사랑'이라 생각하고 미칠 듯 빠져들었던 브론스키와의 연애도 결국 '자살'로 끝이 나고 만다. 자존심 강한 안나는 타인에게 약한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부단히 자신을 다잡으며 누가 봐도 우아하고 품격 있는 여성으로 지내고자 노력했다. 자신에 대해 너무나 철저했던 그녀가 왜 중간에 카레닌이 진심으로 이혼을 해주려 했을 때 그저 브론스키와 떠나기만 했는지는 의문이다. 카레닌 곁에 두고 온 자식 생각에 매일 전전긍긍하는 '강한 모성애를 지닌 어머니'였지만, 브론스키의 무관심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상의조차 하지 않는 '상처받기 싫어하는 여자'이기도 한 안나.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준 브론스키이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브론스키인데, 왜 기대지 않고, 기대하지 않은 것일까. 자신이 고민하고 걱정하는 만큼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을 것을 미리 염려하여 그 사람이 반응을 보일 기회조차 빼앗아버리다니. 물론 브론스키가 안나를 실망시켰을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안나를 사랑하고 걱정하여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려고 노력했을 수도 있었다. 안나는 자존심과 독립심은 강했지만, 자존감과 자기애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한 그저 한 인간이었던 걸까. 하지만 이 또한 나의 섣부른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 누구도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속을 지레짐작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나는 한 아이의 엄마도 아니고, 사랑하지도 않는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해 보지도 않았고, 8년이나 자신의 존재를 닫고 지내지도 않았고, 자신도 모르는 채 행복한 척 익숙하게 연기하지도 않았고,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런 운명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을 경험하지도 않았으니까.

 

  둘째, 사랑과 신뢰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게 사람이고, 사랑인 것 같다. 이 소설이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레빈'과 그의 부인 '키티'의 연애는 그야말로 고달프다. 키티밖에 모르는 '키티 바보'인 레빈과 키티는 서로의 마음을 통하는 과정도 길고 험난했다. 그렇게 원하던 결혼을 한 후에도 서로의 외도를 걱정하며 끊임없이 질투하고, 그런 자신을 후회하고, 싸웠다가 풀어졌다가, 지독하게 사랑의 과정을 영위한다.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음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아내의 외도를 단지 자신에게 튄 흙탕물쯤으로 치부하는 카레닌의 태도도 심각하지만, 레빈과 키티는 서로 그렇게 좋아하는데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매번 상대방을 의심하고 질투하는 게 안타까웠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원래 그런 걸까.

 

  셋째, 시민의식과 선

  사람에 따라 지루하거나 생뚱맞다고 느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레빈의 형 코즈니셰프는 소위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투철한 정치의식과 사람들을 계몽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기나긴 소설 속에서 중간중간 보인다. 덕분에 레빈은 자신의 세계와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몽매함을 느끼고, 책의 결말에서는 '선'에 대한 궁극적 의문에 다다른다. 자신이 생각하는 '선'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지속되는 자신의 삶 속에서 '선'이라는 것을 행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선'이라는 게 무엇이라고 모두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단어로 딱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모두가 저마다의 '선'을 추구하며 산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루고 싶은 나의 선을 내가 잘 지킬 수 있을까. 물론 열린 결말의 레빈처럼 내 삶도 열려있다. 나 또한 계속되는 내가 만들어가는 삶 속에서 나의 선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내가 정치의식이 아니라 시민의식이라고 작은 타이틀을 단 이유가 있다. 소설 속에서 동생 레빈에 대한 형 코즈니셰프의 행동은 가르침보다는 안타까움이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너로 인해 세상이 나아질 수 있는데 행동하려고 하지 않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아니라 자신의 구미에 맞는 부분만 찾는 동생이 코즈니셰프는 안타까웠을 것 같다. 자신이 생각하는 더 넓은 시야를 동생에게 주고 싶었기에 동생과 끊임없이 대화하려던 것 같다. 코즈니셰프의 경우 '정치의식'이라는 것에 특히 초점을 맞춘 것에 비해 나는 '정치'라는 한 분야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갖길 바랐다. '보수'와 '진보'라는 양 측에서 일편도적인 정치의식을 갖는 게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조금은 눈여겨볼 줄 아는 '시민의식'이 있기를 바랐다.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기보다 주울 줄 알고, 자신이 누리는 것이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노고로 이루어진 것임을 감사하고, 스스로의 존재로 인해 이 세상이 조금은 나아질 수 있기를 바라고, 소설 속 형제의 대화를 보면서 그런 의식을 나를 포함한 모두가 가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레프 톨스토이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소설 쓰기를 중단한 톨스토이가 어느 날 서재에서 아무 책이나 한 권 꺼내 중간부터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 재미있어서 표지를 보았더니 자신이 쓴 『안나 카레니나』였다는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보니 정말 소설의 어느 부분을 읽어도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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