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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Nov 03. 2022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찬란한 가을의 빛을 담아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두 손 두 발 보태도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하루에도 숱하게 들어왔다가 나가는 게 마음이라서 ‘들었다’라는 표현이 틀린 말도 아닐 거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내 속에는 잘 빚어진 그릇이 있다. 이 그릇에는 내가 살뜰하게 주워 담은 것들이 그득하다. 가장 최근의 것들을 꼽자면, 좌망우현 언니들이 만들어준 새우장과 곰탕, 영화 <헤어질 결심>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생일 선물로 받은 어그 부츠와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찻잔 문진.

  짙은 커피에 각설탕을 타듯 하나씩 넣을 때마다 찰랑찰랑. 기분 좋게 출렁거리다 오늘 이번 가을 나온 백수린 작가님의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신간 산문집을 읽다 넘쳐버렸다. 사랑해 마지않는 마음이 기어코 차고 넘쳤다. 속으로 ‘엄지척’이나 ‘좋아요’로 끝낼 수 없다. 기어코 “너! 무! 좋! 아! 요!”라고 이렇게 글까지 적게 만든다.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지난달 3일 동안 출판사 창비 공식 인스타그램은 보통날 올라오던 피드와 조금 달랐다. 계절을 전하고, 안부를 물었다. 여느 때보다 긴 질문 댓글들이 달리고, 질문보다 더 긴 대답이 게시글로 올라오던 3일이었다. 백수린 작가님께서 산문집 출간을 앞두고 창비 인스타그램을 3일 동안 운영하셨던 거였다. 마지막 날에는 백수린 작가님께서 라이브 방송을 켜서 책 속 일부를 읽어주시기도 하셨다.

  뭔가를 챙겨 먹어야 하는 날이 다가오면 <친애하고, 친애하는> 속 할머니를 떠올리고, 별이 쏟아지는 여름밤에는 <여름의 빌라>를 떠올리고, <다정한 매일매일>을 읽고 나서 <종이 동물원>도 읽었으면서 이번 라이브 방송을 통해 직접 백수린 작가님의 호흡으로 책을 읽고 나서야, 그제서야 겨우, 나는 이번 책을 수린 작가님의 목소리와 높낮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인스타 라이브 방송에서 읽어주셨던 이번 신간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38쪽에 다다랐을 때 수식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수린 작가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신기했다. 내 두 눈으로 읽고 있는데 내 귀가 더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전에 없던 경험. 그리고 이건 분명한 기쁨이다!

작가님의 시선으로 작가님의 동네를 그리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 기뻤다. 그것만도 좋았는데, 작가님의 숨표와 빠르기로 작가님의 글을 읽을 수 있던 경험은 더했다. 손이 추워 겨울마다 외투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던 내가 쥐색 장갑을 만나 신세계를 얻었던 것과 같다(이제 나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추운 날에도 얼마든지 밖에 있을 수 있다. 야호!). 작가님의 목소리로 읽는 작가님의 집과 동네는 “쓸모와 효용”을 떠나 분명하게 아름다웠다. 한 번 가본 적 없고, 아마 가보지도 못할 비탈진 골목길을 내가 뛰어다녀본 듯 숨이 가쁘다가도 한양 사대문 안 그 어디든 짧게라도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옛날의 성곽을 눈앞에 선명히 그리고 있었다.


  수린 작가님의 신간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를 읽는 동안 느낀 나의 ‘행복하다는 느낌’을 보탠다. 73쪽을 읽으면 대저토마토에서 “눈부신 여름을 기다리는 봄의 어린 잎사귀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와 “남쪽의 햇살과 소금을 품은 바닷바람, 봄이 깊어갈수록 부풀어 오르는 흙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아직도 난다. 여름맛 향기. 킁킁. “쉬지 않고 먹을 것을 내오고”, 찾아갈 때마다 뭔가를 들려 보내는 E 언니를 볼 때는 나의 좌망우현 언니들이 떠올라 반가웠다. 우리가 함께 먹은 숱한 밥상들은 나를 얼마나 보살펴주었던가.

204쪽에서 206쪽에 걸쳐 읽을 때에는 전에 없던 오지랖을 부렸다. 다시 날이 추워지고 있는데 우리 작가님 수도관이 얼지 않아야 할 텐데, 하고. ‘내 몫의 수고로움을 스스로 감당하며 살아내는 것이 값진 일이라는 걸’ 나도 모르지 않지만, 그게 너무 오래거나 고되지 않았으면, 하고 말이다.

  그런가 하면, 146쪽에서는 읽을 때는 미안함과 슬픔이 밀려왔다. 작년 친구 E의 반려견이 무지개 다리를 건넜고, 제대로 상실을 경험한 적이 없던 나는 친구의 슬픔에 조금도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복숭 오빠는 크기에 비해 겁이 많았고, 친구 까만 외투마다 털을 남겨 본인의 존재감을 확실히 했었다. 작가님은 하얀 구름을 보며 봉봉을 발견했다던데, 내 친구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으로 복숭 오빠를 만났을까. 그때마다 너는 혼자서 많이 힘들었겠지..


  아, 물론 언제나 그렇듯 새 책에서 배운 새 가르침도 있다.

하나, “삶에는 수많은 구멍들이 뚫려 있”고, “그 틈을 채우는 일은 우리의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두울. “사는 건 자기 집을 찾는 여정”이다. “타인의 말이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과 평화롭게 있을 수 있는 상태를 찾아가는 여정.”

세엣.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게으름의 면죄부가 되어선 안 되겠지만 완벽한 것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결국 그 누구도 행동할 수 없게 만드는 나쁜 속삭임”이다. 실패할지라도 쉽게 포기하지 말 것.

네엣. “희망에 대해 조금 더 말하고”, 한 해의 “첫 프리지어를 만나면” “반드시 꽃을 사서 누군가에게 선물”할 것.

다섯. “‘내’가 전부이지 않은 세상이 좋다.”


  앞서 말했던, 3일간의 창비 인스타그램 운영 동안 댓글 이벤트를 열었다. 감사하게도 당첨되어 수린 작가님 친필 사인이 적힌 책이 내게로 왔다. 분홍 첫 장에는 검은색 펜으로 “서로 안의 고독과 연약함을 가만히 응시하고 보듬으면서…”, 바로 다음 하얀 페이지에는 반짝거리는 여름 바다색 펜으로 “찬란한 가을의 빛을 담아”라고 적혀 있다. 생면부지 독자의 고독과 연약함을 챙겨주시는 작가님께 나도 찬란한 가을빛 안부를 전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올가을은 고독하지도 연약하지도 않습니다. 파란 하늘 두둥실 흰 구름을 닮은 봉봉이가 가르쳐준 사랑이 제게도 깃들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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