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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n 06. 2023

2023년 05월 25일

Glad to be alive!

안녕! 또 나야. 헤헤헤헤. 지금 나는 경상대 2호관 강당이야.

너랑 정문 근처 카페에서 크래미 샌드위치와 베이컨 치즈 샌드위치를 반씩 노나 먹고, 들어왔어.

너는 한라홀에 잘 도착했을까?

지금 강당 앞 빔에서는 강동원 송혜교 주연의 <두근두근 내 인생> 영화가 나오고, 내가 앉은 줄에는 맨 끝에 한 분씩 앉아서 공책에 계속 뭔가를 적고 계셔.

아직 특강 전까지 시간이 30분 정도 남아서 나도 너에게 마저 편지를 적으려고 아이패드를 꺼냈어.


“’죽을 생각이었다. 올해 설날 옷감을 한 필 받았다. 새해 선물이다. 천은 삼베였다. 회색 줄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여름에 입는 옷이리라. 여름까지 살아 있자고 생각했다.’* 정말 재미있지 않니? 이 글을 쓴 다자이 오사무란 사람은 대단한 코미디언인 모양이야. 이 농담을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다자이 오사무, 유숙자 옮김, 「잎」, 『만년』(민음사, 202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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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난번에도 이 구절을 보냈던 것 같은데,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 구절을 읽자마자 내가 이 구절을 좋아할 것 알았어. 잘 살아내고 싶어 졌거든.

다음 약속으로 이어가는 인생이라니. 정말 살만하지 않니?


“다음에 보자”, “시간 될 때 식사 같이 해요”.

누군가한테는 인사치레 같은 말들이 그럴 마음도 없는데 인사로 해본 적이 없어서 들을 때마다 그리고 말할 때마다 무거웠어.


그런데 너희들이랑 내년쯤 어디론가 여행을 같이 가고 싶다거나 동쪽 새로운 맛집에 같이 가자거나 그런 약속과 다짐이 나한테는 새해 선물로 받은 삼베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오늘 같이 추운 날에는 막연하게 더운 나라 해외여행을 약속하고, 한여름에는 겨울 오자마자 붕어빵과 호빵을 사 먹자고 꾀어내야지 그런 셈을 해봐.

롬든 조카들이 자라 블러 음반을 듣고 너처럼 좋아하게 될 때를 그려보거나, 내년에는 올여름에 못 간  바다 꼭 가보자고 다짐하기.


불확실하다는 게 빼도 빼도 나오는 생선 가시처럼 빨아도 빨아도 안 지워지는 얼룩처럼 싫었던 날도 많았어.

막연하고 아득한 것들과 최대한의 거리를 두며 지내고 싶었는데, 우리의 앞날에는 그런 것이 많았으면 좋겠어.

그럼 나는 올겨울을 뜨끈하고 나고, 씩씩하게 서른을 나고, 불혹도 지천명에도 멋지게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퇴근하고 먹는 야식이나 금요일 아침, 어머니와의 드라이브, 알알이 전구 같은 자동차 후미등, 고급진 방향지시등 소리, 반듯하게 깎은 손톱, 배스킨라빈스 31 민트초코, 한여름에 두 번 피는 능소화처럼 지나치다 싶게 구체적인 것들이었는데, 참 신기하다.


우와, 이제 특강 시작 10분 남았다. 내가 토끼처럼 귀 쫑긋 세우고 듣고 올게!

이따 만나 귀하고 소중한 내 팅구!!!!!


여기까지가 작년 가을 11월 22일 김애란 작가님 특강을 듣던 날의 편지.

내가 이런 아무 글이나 막 적을 때, 너는 카페에서 소철(로 추정되는) 엽서에 손편지를 적어주고 있었지.

집에 가는 길에는 깜짝 선물로 외도 꽃집에 들러 내가 좋아하는 하양으로 넘실거리는 꽃다발을 선물해주었고!

네가 준 엽서에는 “신기하게도 이름을 알게 된 것만으로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사랑하게 된다“고 적혀 있어.


그런데 ㅇㄹ아, 그것보다 더 신기한 게 뭔지 아니?

우리는 생일 때 서로 선물을 주고받지 않잖아. 그래서 그런가 나는 너한테 다발을 받는 이런 날이 또 하나의 생일 같다고 여겨지는 거야.

내 생일은 9월 24일 맞지만, 그냥 너랑 챙기는 올해 내 생일은 오늘이라고 정해둬.

왜냐면 정말 네가 내가 태어난 걸 축하해주고 있다는 걸 어느 때보다도 제대로 실감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너는 일 년에 몇 번씩이나 내 생일을 축하해주는 근사한 친구야.


그러다 아차 싶은 거지. 너도 나랑 있을 때 오늘이 생일이구나 싶은 날이 있을까 궁금한  거야.

나는 네가 있어서 좋은데, 네가 태어난 것만도 행복하고, 네가 내 친구라서 자랑스러운데, 너도 그럴까?

무려 스테고사우르스도 종이로 접을 수 있고, 나도 모르는 내 취향을 간파해버리고, 손수 감자 고로케도 해먹을 수 있고, 우쿨렐레로 작사 작곡까지 능통한 내 친구.

내가 사랑하는 시 구절처럼, 너는 내 자랑이고, 나는 너를 자랑으로 둔 사람 중 한 명인데, 너도 나와 같을까?


너를 바라볼 때, 네 이야기를 들을 때, 너한테 말을 할 때, 무언가를 선물할 때, 하다 못해 편지를 적을 때, 진심으로 태어나서 축복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을까?

100년도 못 사는 인생. 여기 이렇게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모두가 그리워한다는 20세기나, 봉오동이나 청산리 전투에 보탬이 될 수 있는 1920년대, 어디 저기 멀리 둘리가 엄마랑 사이좋게 지내던 빙하기가 아니어도 괜찮아?

나는 사실 언제 어디라도 좋아했을 것 같기는 해. 그래도 너희랑 함께였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해.


어쩌면 이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내게 주는 행복만큼 나도 너를 기쁘게 하고 싶다는 어린 바람이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래도 좀 귀엽게 넘어가주라.

앞으로 새해 선물로 받은 삼베 같은 약속과 다짐을 더 자주 해나갈게.

뜨문뜨문이라도 성실하게 각자의 삶에 각주처럼 남다 보면 어느 순간 너도 나로 인해 내 옆에 이렇게 일 년에도 몇 번씩 생일 같은 날 오지 않을까.


나는 너한테 이렇게 편지를 쓰는 지금도 태어나서 참 다행이라고 살아 있어서 기뻐. 생일 같단 말이야..

네 생일을 내가 내 손으로 축하해줄 수 있잖아! 꼬부랑 나이 들어 눈도 침침해지고 손도 덜덜 떨면 그때 나 편지 못 쓸 수도 있다ㅠㅠ

혹시 내가 먼저 하늘나라 가면 손편지 대신 하늘에다가 네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복슝 오빠 모양으로 구름 만들어줄게.

나 없어도 귀여운 구름 보면 내가 너 축하해주는 줄 알고 기뻐해야 한다. 알겠찌이~?

물론 당분간은 네 곁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구. 후후후후.


내가 또 지금 엄지발가락부터 새끼발가락까지 웨이브 타도록 기쁜 게 뭔지 아니?

그건 바로 우리가 이번 주말에 만난다는 사실이지. 만나서 또 구두로 축하를 전하겠어, 마이 후렌즈.

스윗 드림~! 그리고 그 꿈보다 더 달콤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만나자.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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