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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고나 May 12. 2021

우수리스크의 붉은 모자 소녀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 이야기 - 홍범도 장군의 유해 반환을 떠올리며..

우수리스크의 붉은 모자 소녀 

    

 러시아의 극동지역 우수리스크에는 붉은 모자를 좋아하는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소녀가 붉은 모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할머니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준 소중한 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붉은 모자는 여러 군데가 덕지덕지 기워져 있었습니다그래서 붉은 색깔이 고르지 않았지만소녀는 그 모자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소녀의 할머니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 살고 있습니다타슈켄트는 소녀가 살고 있는 우수리스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언젠가 우수리스크에 왔던 할머니에게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서 사는지 물었을 때할머니는 소녀의 물음에 입을 다물고는 빙긋 웃기만 했습니다.     


 소녀는 빙긋 웃는 할머니의 얼굴에서 무언가 이상한 걸 느꼈습니다할머니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할머니의 깊고 맑은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습니다소녀는 그 뒤로 대답하지 않는 할머니에게 더 이상 왜 멀리 떨어져서 사는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깊은 밤이었습니다소녀와 소녀의 엄마가 살고 있는 우수리스크의 집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그것은 할머니가 계시는 타슈켄트에서 걸려온 전화였습니다무슨 일인지 소녀의 엄마는 전화를 받고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소녀는 잠시 잠에서 깨어 분주히 움직이는 엄마를 보다가 다시 스르륵 눈이 감겨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소녀의 엄마는 급하게 할머니가 계시는 타슈켄트에 다녀와야 된다며 집을 나섰습니다소녀의 엄마는 타슈켄트로 떠나기 전 소녀에게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을 하고 있는 오빠가 저녁에 집에 올 테니 엄마가 없더라도 걱정 말고 있으라며 소녀를 안심시켰습니다하지만 소녀의 엄마는 도대체 왜 그렇게 급하게 떠나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소녀는 엄마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살짝 미소 짓는 엄마의 얼굴에서예전에 할머니의 얼굴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이상한 무언가를 느꼈습니다그래서 할머니에게도 그러했듯엄마에게도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습니다엄마는 소녀의 얼굴을 쓰다듬던 손을 천천히 거두더니급하게 떠났습니다.     


 엄마가 떠나고 집에 홀로 남게 된 소녀는 혼자라는 생각에 조금은 두렵고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이럴 때 든든한 아빠라도 곁에 있다면 좋겠지만아빠는 한국에 있는 부산이라는 항구도시에 돈을 벌기 위해 떠난 지 오래였습니다.     


 소녀는 무서운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 TV를 켰습니다소녀는 가끔 혼자 집에 있을 때 TV를 켜고 소리를 높였는데그러면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녀가 혼자 TV를 보고 있는데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혼자 있는 소녀는 너무나 놀랐습니다오빠 말고는 찾아올 사람이 없었는데오빠는 오늘 저녁에 온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소녀의 머릿속에 엄마가 했던 말이 번쩍 떠올랐습니다.     


혼자 있을 때절대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주면 안 된다.”     


 소녀는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TV는 계속 혼자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밖에서 몇 번을 더 두드렸지만소녀는 작은 손으로 입을 꾹 눌러 막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고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늘 이른 아침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합니다밖에 다닐 때 조심하세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이 말에 소녀는 깜짝 놀랐습니다이야기책에서나 봤던 무서운 호랑이가 마을에 나타났다는 말에 소녀는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언젠가 소녀는 엄마로부터 우수리스크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하지만그곳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먼 곳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더군다나 그렇게 먼 곳에 사는 호랑이들도 사람들이 사냥을 하는 바람에 이제는 거의 찾기가 힘들다고 했는데오늘 호랑이가 마을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하필이면 엄마가 떠나고 소녀가 홀로 집에 남아있는 오늘 말입니다.   

  

 소녀는 너무나 무서워 집에 있는 창문과 출입문 등 모든 문이란 문을 꼼꼼히 살피며 제대로 잠겨있는지 확인했습니다그렇게 문을 다 확인하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TV만 보며 집에만 있었습니다시간이 흐르고배가 고파진 소녀는 식탁으로 갔습니다식탁에는 엄마가 준비해 놓고 간 음식들이 놓여 있었습니다그것은 삶은 계란과 감자 그리고 먹기 좋게 잘라서 통에 넣어둔 식빵이었습니다소녀가 좋아하는 달콤한 꿀도 있었습니다배가 고픈 소녀는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가 있을 때 먹던 것과는 음식의 맛이 너무 달랐습니다평소에 소녀가 그렇게 맛있게 먹던 음식들이 오늘은 별로 맛이 없었습니다. 

    

 소녀는 음식을 조금 먹다가 말고 컵을 꺼내서 물을 부어 마셨습니다그리고는 다시 TV 앞에 가서 앉았습니다. TV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다가 한참 후에야 우수리스크에 나타난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나왔습니다. TV에서는 우수리스크의 외곽 지역에 호랑이가 출몰했고그것은 멸종된 줄 알았던 우수리스크의 호랑이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방송은 아주 짧게 나왔을 뿐이었습니다 

    

 소녀는 TV에서 했던 말이 무슨 말인지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우수리스크의 외곽지역이라는 곳이 이 마을을 뜻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왜냐하면 TV에서 가끔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자신이 살고 있는 이 마을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TV에 동네 모습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창밖이 어두워지자 소녀는 점점 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소녀는 두려운 마음을 몰아내려고 집에 있는 모든 전등을 다 켰습니다집이 환하게 밝아지자 소녀의 마음이 조금은 안심되었습니다 

    

 밤이 점점 깊어갔지만저녁에 온다던 소녀의 오빠는 아직도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소녀는 오빠가 빨리 집에 오기를 바라며 소파에 앉아서 오빠를 기다리다가 스르륵 눈이 감기며 잠이 들었습니다 

    

 소녀는 잠결에 창문이 덜커덩 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눈을 떴습니다그것은 세차게 부는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소리였습니다잠에서 깬 소녀는 깜짝 놀랐습니다분명히 TV를 켜놓고전등도 다 켜고 잠이 들었었는데, TV도 꺼져있고집에 있는 전등도 모두 꺼져서 집이 깜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녀는 혹시 자기가 잠든 사이에 오빠가 집에 도착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오빠가 아니면 누구도 전등을 끄고  TV를 끌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소녀는 거실에 불을 켜기 위해서 스위치를 눌렀지만 전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소녀는 스위치가 고장이 났다고 생각하고는 다른 등을 켜려고 다른 등의 스위치를 눌렀지만이번에도 전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밖에서는 세찬 바람이 창문을 흔들어 요란한 소리를 냈습니다소녀는 두려운 마음으로 오빠가 왔는지 방을 살펴보았지만오빠는 집 어디에도 없었습니다소녀의 오빠는 아직 우수리스크에 도착을 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창밖에는 하얀 눈이 이리저리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어두운 밤 전등도 켜지지 않는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두렵고무서웠습니다깜깜한 어둠 속에서 마치 유령이라도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습니다소녀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습니다소녀의 심장이 얼마나 크게 뛰는지 소녀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어두운 집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습니다.   

  

 소녀는 요란하게 울리는 심장소리를 듣고 유령이 나타나 어둠 속에서 자신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작은 손을 포개어 올려 덮고조심스럽게 숨을 쉬었습니다그런데도 소녀의 귀에는 심장소리가 쿵쾅거리며 여전히 크게 들려왔습니다.  

   

 소녀는 불이 꺼진 집에 혼자 있기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집 밖으로 나가기는 무서웠지만 그래도 유령이 나올지도 모르는 어둡고 깜깜한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소녀는 불이 꺼진 집에서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마중을 나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소녀는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갔습니다잠금장치를 열고손잡이를 돌리며 문을 밀자 삐그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순간 천천히 열리던 문이 갑자기 누군가 밖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차게 열렸습니다소녀는 깜짝 놀라며 잡았던 문손잡이를 놓쳤습니다문을 세게 잡아당긴 것은 사람이 아니라 세차게 부는 바람이었습니다활짝 열린 문으로 눈보라가 집안으로 몰아쳐 소녀의 몸을 덮쳤습니다소녀는 온몸에 눈이 쏟아지자너무 추워서 몸을 한껏 웅크렸습니다소녀는 몸을 웅크린 채 활짝 열린 문의 손잡이를 잡고 힘껏 당겨서 겨우겨우 문을 닫을 수 있었습니다.     


 소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눈보라가 몰아치는 집 밖으로 나가려니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4월 초다른 곳에서는 봄이 찾아오는 시기라고 하지만소녀가 있는 우수리스크에는 아직 겨울이 떠나지 않고 남아서곧 찾아오게 될 봄을 샘내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무언가 어두운 곳에 숨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집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그때 부엌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그것은 쥐가 음식을 찾아 헤매는 소리였습니다소녀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소녀가 유령만큼이나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쥐였기 때문입니다소녀는 망설임 끝에 다시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폭풍처럼 몰아치던 바람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잠잠해진 것이었습니다.   

  

 세차게 불던 바람은 잠깐 사이에 어디로 떠나가 버렸는지 없었고송이송이 하얀 눈만 하늘에서 나풀거리며 춤을 추듯 내려오고 있었습니다신기하게도 눈이 내리는 하늘에는 달이 환하게 떠 있었습니다밤하늘에 커다랗게 떠 있는 달은 내리는 작은 눈송이 하나조차도 잘 보일 정도로 밤을 밝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소녀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습니다오히려 눈이 내리는 밤마치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포근함이 느껴졌습니다이상한 일이었지만소녀에게는 다행이었습니다소녀는 오빠를 마중 나가기로 했습니다     


 버스정류장은 집에서 제법 멀었습니다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길에 있었는데그곳 근처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습니다차들이 다니는 도로 옆에 버스정류장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그 주위에는 자작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습니다소녀의 오빠는 소녀에게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가는 동안 자작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져있다고 했습니다소녀는 아직 블라디보스톡까지 가본 적이 없었지만오빠의 말을 듣고는 차들이 다니는 길이 블라디보스톡까지 연결이 되어있고그곳까지 자작나무 숲이 이어져 있을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깊은 밤마을에는 듬성듬성 희미한 가로등이 몇 개 켜져 있을 뿐모두가 다 잠이 들었는지 모든 집들의 불이 다 꺼져있었습니다소녀는 바닥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밝으며 걸어갔습니다눈을 밟을 때마다 폭신한 솜을 밟는 기분이 들었습니다소녀는 혹시 하늘의 구름을 밟으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소녀는 한 걸음 한 걸음 구름을 밟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눈을 밟으며 걸어갔습니다.    

 

 어느덧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끝나고 버스정류장으로 이어지는 숲길이 나타났습니다그곳엔 길을 밝혀주는 가로등이 없었습니다까마귀의 깃털처럼 새까만 숲 사이로눈 덮인 길이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마을을 벗어나 숲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처음엔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계속 걷자 두려운 마음도 금세 사라졌습니다달빛은 밝았고 눈은 포근히 내렸습니다소녀는 조금씩 기분이 좋아져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습니다그렇게 걸어가다가 마을과 버스 정류장의 가운데쯤 왔을 때였습니다어두운 숲 속에서 뭔가 번쩍이는 것을 소녀는 보았습니다그것은 커다랗고 푸른 불덩어리처럼 보였는데하나도 아니고 두 개였습니다두 개의 푸른 불덩이는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가끔 엄마와 함께 밤길을 걸었던 소녀는 그것이 산짐승의 눈에서 나오는 불빛이라는 것을 엄마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밤이면 눈에 불이 켜진다는 것이 소녀는 너무나 신기했습니다그런데엄마와 함께 있을 때는 그렇게 신기하고 재밌게 봤던 불빛이 지금 혼자가 되자 너무나 무섭게 보였습니다.     


 소녀는 문득 오늘 나타났다는 호랑이가 생각났습니다콧노래를 흥얼거릴 만큼 좋아졌던 기분은 금세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소녀는 발걸음을 빨리했습니다소녀는 그 불빛이 쫓아오지 않을까 무서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습니다하지만 불빛은 그 자리에서 이리저리 흔들릴 뿐 소녀를 쫓아오지는 않았습니다소녀는 불빛이 멀어지자 발걸음을 천천히 했습니다조금 더 걸어가자 마침내 정류장이 나타났습니다.   

  

 소녀는 정류장 의자에 앉았습니다소녀는 가쁜 숨을 쉬며 정류장 의자에 앉아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습니다다행히도 조금 전 어둠 속에서 보았던 푸른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얼른 오빠가 탄 버스가 도착하기를 바랐습니다오빠가 언제어떤 버스를 타고 올지는 몰랐지만빨리 오기만을 바라며 정류장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렸습니다소녀는 가만히 앉아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습니다밤하늘엔 하늘하늘 내리는 눈을 비추는 밝은 달과 반짝이는 별이 떠 있었습니다소녀가 밤하늘의 달과 별 그리고 내리는 눈을 보고 있는데 멀리서 불빛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왼쪽 오른쪽 두 곳에서 밝은 빛을 뿜어내는 그것은 버스가 틀림없었습니다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며 다가오는 버스가 소녀는 너무나 반가웠습니다소녀는 그곳에 오빠가 분명히 타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불빛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소녀는 들뜬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불빛이 조금씩 더 가까워질수록 소녀는 오빠를 만날 거란 생각에 기쁘고마음이 든든했습니다오빠만 있다면 어두운 밤길도불 꺼진 집도 더 이상 무섭거나 두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드디어 불빛이 소녀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소녀는 불빛을 향해 한걸음 다가갔습니다한걸음 다가간 소녀는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셨습니다소녀는 너무 눈이 부셔서 잠시 눈을 꼭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눈을 떴습니다소녀가 눈을 뜨자 버스의 환하게 밝게 빛나던 불빛이 차츰 줄어들더니 두 개의 푸른 불빛으로 변했습니다그것은 아까 정류장으로 향하던 길에 숲에서 봤던 바로 그 푸른 불빛이었습니다소녀는 심장이 멎을 만큼 깜짝 놀랐습니다그곳에는 소녀가 기다리던 버스는 없고 푸른 두 개의 불빛만 있었습니다   

  

 소녀의 심장은 쿵쾅거리며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두 개의 푸른 불빛에도 밝은 달빛이 비쳤습니다. 달빛에 서서히 몸을 드러낸 그것은 바로 커다란 덩치의 호랑이였습니다소녀는 호랑이를 보고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습니다.     


 호랑이는 동그랗고 커다란 눈으로 소녀를 가만히 쳐다보았습니다소녀는 호랑이가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이리저리 살피는 중이라 생각했습니다소녀는 갑자기 엄마와 오빠가 생각났습니다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떠난 아빠의 얼굴은 잘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소녀는 다시는 엄마와 오빠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눈물이 났습니다소녀의 깊고맑은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습니다호랑이는 눈물을 흘리는 소녀 앞에 다가섰습니다소녀는 호랑이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호랑이의 콧바람이 소녀의 머리카락을 살랑거리며 흔들었습니다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그때 호랑이가 소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혓바닥으로 핥아 주었습니다소녀는 거친 호랑이의 혓바닥이 자신의 눈물을 핥자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습니다호랑이의 번뜩이던 불빛의 눈은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소녀는 호랑이의 눈에서 문득 할머니와 엄마의 눈에서 보았던 그런 슬픔을 보았습니다소녀는 호랑이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습니다가만히 호랑이를 쳐다보던 소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호랑이의 얼굴을 쓰다듬었습니다소녀의 손길이 호랑이의 얼굴에 닿자 이번에는 호랑이가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소녀는 호랑이가 더 이상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호랑이가 뿜어내는 하얀 콧김에서는 포근함이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호랑이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더니 다시 푸른 불빛을 일렁이며 소녀를 바라보았습니다소녀는 호랑이의 눈에서 다시 푸른 불빛이 일렁이자 몸이 움츠러들며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호랑이는 소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돌아서 앉았습니다소녀는 호랑이가 왜 등을 보이고 앉았는지 몰랐습니다소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호랑이가 슬쩍 뒤로 돌아보았습니다 

    

 호랑이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소녀는 그것이 자신의 등에 올라타라는 의미라는 것을 눈치챘습니다소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아직 오빠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오빠를 기다려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하지만 호랑이의 등에 오르지 않으면 호랑이가 화를 낼 것만 같았습니다그리고 호랑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호랑이의 등에 올랐습니다손에 닿은 호랑이의 털은 푹신하고 따뜻했습니다소녀가 등에 오르자 호랑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달리기 시작했습니다소녀는 호랑이의 등에서 떨어질까 봐 호랑이의 털을 꼭 붙잡았습니다호랑이는 엄청나게 빠르게 달렸습니다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소녀는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소녀가 가장 아끼는 빨간 모자가 바람에 휙 날아가 버렸습니다날아간 모자는 멀리 바닥에 툭 떨어졌습니다소녀는 얼른 돌아가 모자를 줍고 싶었지만호랑이가 너무 빨리 달려서 등에서 내릴 수도손을 놓을 수도 없었습니다소녀는 돌아오는 길에 꼭 다시 모자를 주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호랑이는 한참을 달렸습니다그렇게 달리고 있는데어느 순간 갑자기 밤이 낮으로 바뀌었습니다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호랑이가 도착한 곳은 어떤 기차역이었습니다그곳이 어느 곳에 있는 기차역인지 소녀는 알 수 없었지만아주 많은 사람들이 기차역에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마치 오늘 기차를 다 함께 타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주 많은 사람들이 기차역에 몰려있었습니다     


 소녀는 엄마에게 기차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소녀의 엄마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작하는 대륙횡단 기차여행은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여행으로아주 낭만적이고여유롭고즐거운 일이라고 했습니다그래서 기차역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즐거울 거라고 소녀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소녀가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즐겁고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오히려 사람들의 모습은 우울하고 슬퍼 보였습니다그들의 곁에는 그들을 감시하는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를 타는 사람들의 등에는 많은 짐이 있었습니다그것은 여행을 떠나기에는 너무나 크고무거운 짐들처럼 보였습니다아주 작고 여린 어린아이들조차 등에 뭔가를 메고 있었습니다사람들은 긴 줄을 서서 기차에 차례로 올라탔습니다그때 멀리서 소녀가 너무나 아끼는 붉은 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멀리 있었지만 소녀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소녀는 그 빨간 모자가 보이는 곳으로 가까이 가고 싶었습니다호랑이는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빨간 모자가 보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신기하게도 사람들은 호랑이와 소녀가 보이지 않는지 어떤 누구도 호랑이와 소녀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소녀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작은 남자아이가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남자아이는 지금의 소녀보다도 훨씬 더 어려 보였습니다남자아이가 머리에 쓴 빨간 모자는 아이에게 커서 헐렁했습니다그 옆에는 한 소녀가 있었는데 호랑이의 등에 탄 소녀는 그 소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그 소녀는 다름 아닌 바로 그녀의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의 어릴 적 모습을 소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지금 눈앞의 어린 여자아이가 할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소녀의 할머니는 헐렁한 빨간 모자를 쓴 남자아이와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할머니는 오빠로 보이는 조금은 큰 소년과할머니의 엄마로 보이는 한 여자 그리고 빨간 모자를 헐렁하게 쓴 작은 아이와 함께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에는 앉을자리가 없어서 비어있는 짐칸의 바닥에 사람들이 다 함께 웅크리고 앉았습니다너무나 사람이 많아서 옆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습니다할머니와 할머니의 엄마할머니의 오빠 그리고 할머니의 동생은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그곳엔 지독한 냄새도 났습니다그래서 얼굴을 찌푸리고 코를 막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꽉 차자기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기차는 덜커덩거리며 달렸습니다사람들은 모두 침울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없이 앉아있었습니다.     


 기차가 제법 달렸을 때기차에 타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배가 고프다며 먹을 걸 달라고 부모들에게 보챘습니다어린 할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할머니는 할머니의 엄마에게 배가 고프다며 먹을 걸 달라고 보챘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보따리를 한참 주섬주섬거렸습니다주위의 사람들은 할머니의 보따리를 슬그머니 쳐다봤습니다할머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등을 돌려 보따리를 보이지 않게 숨기고는 보따리에서 삶은 감자 세 알을 꺼내어 할머니의 동생과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오빠에게 하나씩 건넸습니다할머니는 감자 한 알을 받고는 기뻐서 입이 크게 벌어졌습니다소녀는 할머니가 그렇게 감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평소 할머니는 소녀가 감자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뿐, 잘 드시지 않았게 때문이었습니다소녀는 어린 할머니가 감자를 아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다음에 할머니를 만나면 꼭 삶은 감자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는 삶은 감자를 너무나 맛있게 먹었습니다하지만 할머니의 동생은 깨작깨작거리다가 말고는 감자를 쥔 손을 천천히 내렸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그런 어린 소년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습니다할머니의 오빠도 감자를 안 좋아하는지 만지작 거리기만 할 뿐 먹지 않고 있었습니다할머니의 오빠는 감자를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반으로 쪼개어 할머니의 엄마에게 건넸습니다그런데 할머니의 엄마도 감자를 좋아하지 않는지 할머니의 오빠가 건넨 감자를 받지 않았습니다할머니는 열심히 감자를 먹으며 할머니의 동생과 할머니의 오빠 손에 있는 감자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습니다어느새 할머니의 손에 있던 감자가 모두 사라졌습니다할머니의 오빠는 할머니의 엄마에게 건넸던 감자 반쪽을 할머니에게 주었습니다할머니는 아주 즐거워하며 오빠가 주는 감자를 받아서는 또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그것도 금세 할머니의 입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때 할머니의 동생이 할머니의 어깨를 툭툭 쳤습니다. 할머니가 동생을 돌아보자 할머니의 동생은 깨작깨작 맛만 보다가 남긴 감자를 할머니의 얼굴 앞에 내밀었습니다할머니가 입을 크게 벌리고 기뻐하는데갑자기 할머니의 엄마가 무서운 얼굴로 할머니를 야단쳤습니다.

      

 할머니는 할머니 엄마의 호통에 얼굴이 빨개져서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할머니 동생의 곁에 바싹 다가앉아서 감자를 먹이려고 했지만할머니의 동생은 얼마 먹지를 못했습니다 

    

 밤이 되어도 기차는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밤이라 그런지 기차는 많이 추웠습니다사람들의 입에서는 하얀 연기 같은 입김이 나왔습니다모두가 추위에 떨면서 잠이 들었습니다그런데 할머니의 엄마는 남들이 다 잠이 들었는데도 잠을 자지 않고 있었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할머니 동생을 품에 안고 얼굴을 쓰다듬고이마를 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할머니의 동생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할머니의 동생은 이렇게 추운 밤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마치 금방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가쁘게 쌕쌕거리고 있었습니다.     


 새벽이 되어 날이 조금씩 밝아왔습니다아직 할머니는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그런 할머니의 엄마를 할머니의 오빠는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습니다할머니 엄마의 품에 안긴 할머니의 동생은 마치 하얀 밀가루를 얼굴에 바르기라도 한 것처럼 하얬습니다그리고 조금 전까지 나오던 하얀 입김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아저씨가 할머니의 엄마에게 다가와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자 할머니의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소리를 쳤습니다그러자 또 다른 아저씨와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왔습니다그들은 할머니의 엄마를 향해 처음엔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소리를 질렀습니다그 소리에 어린 할머니는 잠에서 깨어나 부스스 눈을 떴습니다그들은 할머니의 엄마에게 한참 소리를 질렀지만 할머니의 엄마는 할머니 동생을 품에 꼭 끌어안고 펑펑 울기만 할 뿐이었습니다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갑자기 할머니 엄마의 품에 있는 할머니 동생을 억지로 뺏으려고 했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소리를 지르며 할머니의 동생을 더욱 꽉 끌어안았습니다할머니의 오빠가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가 한 아저씨에게 두들겨 맞아 바닥에 쓰러져버렸습니다.     


 기차 칸의 아줌마들은 할머니 엄마를 붙잡았고아저씨들은 할머니 동생을 잡아당겼습니다. 창백한 얼굴의 할머니 동생은 마치 물건처럼 공중에서 사람들의 손에 붙들린 채 달랑거리며 흔들렸습니다어린 할머니는 그런 사람들을 말리고 싶었지만 너무나 무서워 눈만 꿈벅거리며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할머니의 동생을 결국 할머니 엄마의 품에서 빼앗았습니다그리고는 할머니의 동생을 달리는 기차의 문으로 들고 갔습니다사람들은 달리는 기차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차가운 바람이 기차 칸으로 훅 몰아쳤습니다할머니 동생의 빨간 모자는 떨어질 듯 머리에 걸려있었습니다사람들은 기차의 열어놓은 문 앞에서 할머니의 동생을 들고서 잠시 망설이는 듯 서로의 눈을 쳐다봤습니다그들은 할머니의 엄마를 잠시 쳐다보았습니다그리곤 창백한 할머니의 동생을 기차 칸 바닥에 툭 놓았습니다할머니의 엄마를 붙잡고 있던 아주머니들이 할머니의 손을 놔주었습니다     


 할머니의 엄마는 울면서 기차 칸 바닥에 누워있는 할머니의 동생에게 다가갔습니다하지만 조금 전처럼 품에 꼭 끌어안지는 않았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할머니 동생의 얼굴을 울면서 쓰다듬다가 떨어질 듯 걸려있는 빨간 모자를 벗겼습니다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서 벽에 기대어 눈을 꼭 감았고사람들은 할머니의 동생을 달리는 기차 밖으로 던졌습니다어린 할머니는 사람들의 행동에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어린 할머니의 동생이 밖으로 던져지고 나자할머니의 엄마를 꼭 붙들었던 아주머니들이 할머니의 엄마에게 다가와 꼭 안아주었고할머니의 엄마는 아주머니들의 품에서 펑펑 울었습니다한참 후 할머니 엄마의 울음소리가 줄어들자 아주머니들이 하나 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할머니 동생의 머리에 써져있던 빨간 모자를 어린 할머니의 머리에 꼭 씌어주었습니다할머니 동생의 머리에서는 헐렁하던 그 모자가할머니의 머리에는 꼭 맞았습니다어린 할머니는 할머니 엄마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꼭 끌어안으며 함께 울었습니다할머니의 오빠는 벌렁 드러누운 채 가만히 눈을 감고서는 신기하게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눈물만 주르륵 흘리고 있었습니다.  

   

 기차는 한참을 달렸습니다그러는 동안 할머니의 동생처럼 달리는 기차 밖으로 던져지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었고기차가 잠깐 멈췄을 때 기차가 멈춘 그곳의 땅에 급하게 묻어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차의 틈으로는 바람이 많이 들어왔습니다밤에 바닥에 흘린 물은 아침이면 꽁꽁 얼어있었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좁은 기차가 갑갑하고더운 것인지 바람이 들어오는 틈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덥고 갑갑하면 외투를 벗으면 될 텐데또 그러지는 않았습니다바람이 쌩쌩 들어오는 곳에 앉은 할머니 엄마의 머리카락은 마치 태극기가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흔들리며 날았습니다좁은 기차 칸에서 어린 할머니는 할머니 엄마의 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부지런히 달리던 기차가 갑자기 섰습니다그러자 할머니의 엄마와 할머니는 급하게 기차에서 내렸습니다할머니의 오빠는 짐을 지켰습니다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가 기차에서 다급하게 내렸습니다그런데 사람들이 내리는 곳은 기차역이 아니었습니다그곳은 허허벌판이었습니다사람들은 들판을 뛰어서 풀숲으로 가 대소변을 봤습니다     


 어린 할머니와 할머니의 엄마를 지켜보던 소녀는 깜짝 놀랐습니다소녀는 지금껏 화장실이 아닌 곳에서 볼일을 보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가끔 술에 취한 아저씨가 화장실이 아닌 길거리에서 볼일을 보는 것을 볼 때면 엄마는 얼굴을 찌푸렸습니다그리고 소녀에게 절대로 저런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단단히 일렀습니다그런데 지금 소녀의 눈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화장실이 아닌 풀숲에다가 아무렇게나 대소변을 보고 있었고그런 사람들 중에는 어린 할머니와 할머니의 엄마도 섞여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엄마와 할머니가 급하게 볼일을 보고 다시 기차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짐을 지키고 있던 할머니의 오빠가 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할머니의 오빠가 풀숲에 가서 소변을 보는데기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더니 서서히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소변을 보던 할머니의 오빠는 깜짝 놀라며 바지춤을 추스르고 기차로 뛰어왔습니다할머니의 오빠는 달리는 기차를 아슬아슬하게 붙잡아 겨우 다시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소녀가 올라탄 호랑이는 지치지도 않는지달리는 기차를 부지런히 쫓아갔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기차가 또 천천히 느려지기 시작했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습니다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천천히 느려지던 기차가 마침내 섰습니다그러자 이번엔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더니 잔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불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할머니의 엄마도 불을 피울 나뭇가지들을 모았습니다어린 할머니는 작은 나뭇가지들을 모아 할머니의 엄마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불을 붙이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다른 사람들은 벌써 불을 붙였는데할머니의 엄마는 아직 불을 붙이지 못했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결국 다른 사람에게 가서 불이 붙은 나뭇가지 하나를 얻어서 왔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끝에 마침내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습니다불이 붙자 물을 올려놓고 할머니의 엄마는 뭔가를 아주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그것은 어떤 가루 같은 것이었습니다할머니의 엄마가 그것을 소중하게 다루는 것을 보니 아주 중요한 것이 분명했습니다그것을 냄비에 담긴 물에다가 넣었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쪼그리고 앉아 냄비 뚜껑을 닫고는 냄비 아래에서 춤추는 불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할머니 엄마의 눈동자에 타오르는 불길이 일렁거렸습니다할머니 엄마의 옆에서 할머니도 쪼그리고 앉아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냄비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로 피운 불길이 그리 세지 않아서 그런지 물이 끓는데 한참이 걸렸습니다할머니 엄마의 냄비에는 이제 물이 끓기 시작했는데다른 사람들은 피웠던 불을 흙으로 덮어 다 끄고 있었습니다할머니 엄마가 냄비의 뚜껑을 여는데동시에 기차에서 기적소리가 울렸습니다할머니 엄마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사람들은 급하게 기차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급한 마음에 서둘러 냄비를 가져가려고 무심코 맨손으로 냄비를 잡아들다가 비명을 지르며 잡았던 냄비를 떨어뜨렸습니다냄비가 떨어지면서 안에 있던 음식이 모두 바닥에 엎질러졌습니다할머니의 엄마와 할머니는 모두 울상이 되어 바닥에 엎어진 냄비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그때 기차에서 짐을 지키고 있던 할머니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할머니의 엄마는 할머니 오빠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헝겊으로 냄비를 잡고다른 물건들도 챙겼습니다하지만 어린 할머니는 여전히 슬픈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잡아서 벌겋게 변한 할머니 엄마의 손이울상을 짓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잡았습니다할머니의 엄마와 할머니는 급하게 다시 기차에 올랐습니다.     


 그날 밤바람이 들이치는 기차 안에서 할머니와 할머니의 엄마그리고 할머니의 오빠는 늦게까지 눈을 뜨고 있다가 깊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습니다.     


 기차에서는 매일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그렇게 40번의 해가 뜨고, 40번의 해가 질 무렵 할머니의 오빠와 어린 할머니그리고 할머니의 엄마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차에서 내렸습니다이번에는 평소와 다르게 많은 짐을 들고 내렸습니다그리고 기차가 기적소리를 울리고 천천히 출발을 하는데도 다시 기차에 오르지 않았습니다마침내 기차는 떠나버렸습니다사람들은 그들이 도착한 그곳의 이름을 우즈베키스탄이라고 불렀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밤이 찾아왔습니다그래도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습니다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추위에 몸을 덜덜 떨었습니다그때 한 곳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녀는 그게 무슨 소린지 궁금해서 호랑이와 함께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가까이 가보니 어떤 아저씨와 아줌마가 작은 언덕에서 돌멩이를 들고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땅이 딱딱해서 잘 파지지 않았지만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열심히 땅을 팠습니다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뾰족한 돌멩이를 찾아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할머니의 엄마도 뾰족한 돌멩이를 들고 땅을 팠습니다할머니의 오빠와 할머니도 모두 함께 땅을 팠습니다한참 동안 팠지만땅은 얼마 파지지가 않았습니다거친 돌을 손으로 붙잡고땅을 찧는 할머니 엄마의 손에서는 피가 흘렀습니다     


 약을 바르고반창고를 붙여야 할 정도로 손이 많이 찢어졌는데도 할머니의 엄마는 이를 악물고 계속 땅을 팠습니다어두운 밤 기차에서 내린 모든 사람들이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열심히 땅을 팠습니다.     

 그때 소녀가 탄 호랑이가 자세를 살짝 바꾸자 소녀는 떨어질 것 같아 깜짝 놀라 호랑이의 등에 엎드리며 털을 움켜잡았습니다소녀가 다시 호랑이의 등에서 몸을 세우자 어느새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땅을 파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작은 언덕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습니다그것은 언젠가 소녀가 해봤던 두더지 잡기 게임과 비슷해 보였습니다소녀는 그것들이 도대체 뭔지 궁금해서 들여다보려는데 그 속에서 갑자기 사람의 머리가 쑥 튀어나왔습니다     


 머물 곳이 없던 사람들은 밤 동안 굴을 파서 차가운 바람을 피해 그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아침이 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구멍에서 밖으로 나왔습니다그렇게 하루를 지나는 동안 또 추위에 몇몇 사람이 땅에 묻혔습니다한쪽에서는 땅에 사람을 묻고한쪽에서는 끼니를 때울 죽을 끓였습니다.   

    

 그들은 아픈 사람들이건 멀쩡한 사람들이건 모두 죽을 먹었습니다그들은 아침을 다 먹고 나서도 추위에 떨며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마치 그들 주위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빙 둘러서 막아 놓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한참 후 몇몇의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그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갔습니다.     


 그곳에는 다 쓰러져가는 나무로 된 집이 몇 개가 있었습니다그곳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곳이었는데돼지우리에서 나는 것 같은 지독한 냄새였습니다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소녀는 가까이 다가가다가 냄새가 나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지만사람들은 기뻐하며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그렇게 냄새나는 집도 충분하지 않아 사람들은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은 옥신각신해가며 하나둘씩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호랑이는 다시 달렸습니다소녀가 눈을 잠시 감았다 뜨니 커다란 농장처럼 보이는 곳이 있었습니다어린 할머니와 할머니의 오빠 그리고 할머니의 엄마는 그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할머니와 할머니의 오빠는 우즈베키스탄의 농장에서 무럭무럭 자랐습니다할머니의 가족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하루하루 지나면서 농장이 발전할수록 할머니 가족들의 살림도 조금씩 나아졌습니다할머니의 오빠는 열심히 일을 해서 우수한 일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어린 할머니는 이제 어엿한 아가씨로 성장해서 할머니의 오빠처럼 우수한 일꾼으로 인정받는 건실한 청년을 만났습니다소녀는 그 청년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그 사람은 언젠가 할머니가 사진으로 보여주었던 할아버지였습니다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결혼을 하기로 했습니다결혼을 앞두고 할머니의 엄마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땅으로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할머니의 엄마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얼마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결혼을 했습니다

     

 그렇게 농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사랑을 꽃피우며 할머니는 아이를 낳았습니다소녀는 첫눈에 그 아이가 엄마라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소녀의 엄마는 농장에서 태어나고 또 농장에서 자랐습니다.  

   

시간이 금세 흘러소녀의 엄마도 할머니처럼 어엿한 아가씨가 되었고농장에서 일 잘하는 우수한 일꾼을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아빠의 얼굴에 대한 기억이 흐릿했지만청년을 본 순간 한눈에 아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얼굴은 분명 똑같은 모습인데 소녀가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과 지금 엄마를 만난 아빠의 모습은 무척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우수리스크의 소녀가 흐릿하게나마 아주 어린 시절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은 언제나 불안한 모습어딘가 불만에 차 있고 엄마와 다투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빠가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소녀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소녀가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의 아빠는 아주 당당하고여유로운 모습이었습니다엄마와 아빠가 결혼하는 날 할머니의 엄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결혼할 때 했던 그 말을 또 하셨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땅으로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     


 얼마 후 할머니의 엄마는 돌아가셨습니다비록 할머니의 엄마가 돌아가셨지만할머니의 가족은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갔습니다   

  

 호랑이가 자세를 바꾸자소녀의 눈에 TV가 보였고 그곳에서는 소련의 연방 해체, 붕괴 등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왔습니다아무런 이유 없이 할머니의 오빠그리고 할아버지까지 농장에서 쫓겨났습니다할머니의 오빠와 할아버지뿐만이 아니었습니다그곳의 많은 사람들그중에서도 머리가 까맣고까레이스끼 또는 까례예쯔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많이 쫓겨났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서 우수한 일꾼으로 인정받던 그들은 자신들이 왜 쫓겨나는지도 몰랐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오빠는 눈이 파란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오빠를 돌려보냈습니다할머니의 가족들 그리고 할머니 오빠의 가족들은 모두 그동안 지내고 있던 농장 밖으로 쫓겨 나왔습니다.      


 농장 밖으로 나온 그들은 당장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그들에게 농장은 평생을 살아온 곳이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것도다른 일을 한다는 것도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엄마와 아빠도 농장 밖으로 쫓겨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사람들은 서로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똑같은 이야기만 되풀이하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항상 여유가 있고유쾌하던 그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뭔가에 쫓기는 듯 초조해 보였습니다    

 

 어느 날 소녀의 할아버지는 사람들을 모았습니다소녀의 아빠도 그들과 함께 모이려고 했지만할아버지는 소녀의 아빠에게 다그치듯 말했고소녀의 아빠는 할머니엄마와 함께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습니다그날 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오빠는 사람들과 함께 그동안 일하던 농장에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곧 사람들은 흩어졌고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오빠는 눈이 파란 사람들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가서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떠났던 소녀의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아빠가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왔을 때는모든 것이 변해 있었고어디에서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오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기차에서 할머니의 엄마가 할머니의 동생을 끌어안고 울던 것처럼 울었습니다소녀의 할머니는 한참을 울다가 할머니의 엄마가 했던 말처럼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이제 우리의 땅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소녀의 엄마와 아빠는 짐을 꾸렸습니다하지만 정작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말하던 할머니는 짐을 꾸리지 않았습니다소녀의 아빠와 엄마가 거듭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했지만할머니는 끝까지 자신만큼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아빠와 엄마는 고민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소녀의 아빠는 엄마의 불룩 튀어나온 배를 잠시 바라봤습니다결국 소녀의 아빠와 엄마는 끝까지 그곳에 남을 수밖에 없다는 할머니를 놔둔 채 그곳을 떠났습니다     


 소녀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소녀에게 익숙한 동네가 나타났습니다그곳은 바로 소녀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러시아 극동의 우수리스크였습니다우수리스크에서 아빠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엄마는 배가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고아빠는 그런 엄마의 배를 보며 매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일터에 다녔습니다곧 아이가 태어났는데그 아이는 바로 소녀의 오빠였습니다소녀는 할머니와 엄마를 알아봤던 것처럼 오빠도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번에는 소녀가 태어났습니다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소녀는 자기가 태어나는 모습을 스스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습니다.     

 

 소녀의 아빠는 부지런히 일을 했습니다소녀의 엄마도 아이들을 맡기고 일을 하러 다녔습니다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소녀와 소녀의 오빠가 점점 커갈수록 생활은 궁핍해지기만 했습니다엄마와 아빠가 열심히 일을 하는 데도 더 이상 소녀 가족의 생활은 나아지지가 않았습니다희망을 품고 우수리스크로 향한 소녀의 아빠와 엄마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소녀의 엄마와 아빠는 한국인도러시아인도우즈베키스탄인도 아니었습니다사람들은 소녀의 가족들을 고려인이라고 불렀습니다하지만 고려인의 나라가 도대체 어디인지 콕 집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호랑이의 등에 탄 소녀는 아빠와 엄마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어느 순간 소녀가 어린 시절 흐릿하게 기억하는 것처럼 아빠가 불안하고초조하고신경질적인 모습으로 변했을 때아빠는 한국이라는 나라로 떠나겠다고 엄마에게 말을 했습니다이렇게 말을 하는 소녀 아빠의 얼굴에는 아주 희미하나마 희망이 보이는 듯했습니다소녀의 엄마는 그토록 먼 타슈켄트에서 이곳 우수리스크까지 아빠와 함께 떠나왔음에도 불구하고또 남편이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에 슬펐지만가족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슬픔을 꾹 참고아빠를 보내주기로 했습니다소녀의 엄마는 아빠의 젊었을 때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그 모습을 사랑했습니다당당하고 여유로웠던 남편의 젊었을 때 모습이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엄마의 마음도 너무나 아팠기 때문에 아주 오랜 시간 만에희망에 찬 눈빛으로 말을 하는 남편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소녀의 아빠는 꼭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다 함께 한국에 가서 행복하게 살자고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소녀의 아빠는 희망을 품고 한국으로 떠났습니다소녀는 호랑이의 등에 타고 아빠를 쫓아 한국으로 갔습니다     


 소녀의 아빠가 희망을 품고 도착한 대한민국의 부산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엄청나게 많은 배들이 오가고집채만 한 컨테이너들이 쉴 새 없이 배로땅으로 오르내렸습니다하지만 소녀 아빠의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어차피 그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 중에 한명일뿐이었고, 다른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인과 같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소녀의 아빠는 소녀의 할머니가 그토록 말했던 우리의 땅에 고려인들이 설 자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녀의 아빠는 다시 우수리스크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지만예전과 똑같은 어려운 생활이 될 거란 생각에 돌아갈 수 없었고가족들을 한국으로 불러오고 싶었지만외국인 노동자의 신분이었기에 쉽게 불러올 수도 없었습니다결국 소녀의 아빠는 가족에게 돌아가지도가족을 불러오지도 못한 채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점점 몸과 마음이 메말라갔습니다어릴 적 소녀의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아빠의 모습은 무서웠지만지금 보고 있는 아빠의 모습은 불쌍해 보였습니다

     

 소녀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자조금 전 보았던 부산항과 비슷해 보이는 어떤 항구가 나타났습니다그곳은 규모가 부산항보다 많이 작긴 하지만부산과 비슷한 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톡이었습니다소녀는 블라디보스톡의 항구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오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오빠는 열심히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었습니다짐을 모두 나르고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오빠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 모두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배의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했습니다그때 누군가 소녀의 오빠에게 물었습니다.

      

넌 나중에 뭘 할 거야?”      


 그 사람의 물음에 멀리 바다를 바라보던 소녀의 오빠가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의 수평선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나중에 난 한국으로 갈 거야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소녀의 오빠는 희망에 가득 찬 얼굴이었습니다소녀는 오빠가 바라보는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바다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계속 메아리치듯 들려왔습니다소녀는 반짝이는 바다의 빛에 눈이 부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눈을 천천히 떴습니다

     

 그때 소녀의 귀에 오빠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습니다  

   

이제 일어났니?”     

 

 이번 목소리는 지금까지 들었던 목소리와는 많이 다르게 바로 귓가에서 들리듯 생생한 목소리였습니다오빠의 목소리에 소녀가 완전히 눈을 뜨자 오빠가 사모바르에 차를 끓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소녀는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고는 자신이 소파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어젯밤 오빠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소녀의 오빠는 잠시 후 할머니가 계신 타슈켄트로 떠나야 한다고 소녀에게 말했습니다소녀의 오빠는 소녀에게 이제 더 이상 할머니를 볼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소녀는 너무나 슬펐지만어서 떠나야 했기에 준비를 서둘렀습니다그리고 가방에 뭔가를 챙겼습니다  

   

 수십 년 전할머니의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오빠가 기차를 타고 40번의 낮과 밤 동안 달렸던 그 길을 지금 소녀는 오빠와 함께 가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소녀와 소녀의 오빠가 가는 길은 땅이 아닌 하늘이었고, 40일이 아니라단 몇 시간에 불과했습니다

     

 소녀와 소녀의 오빠가 할머니의 집에 도착했습니다소녀는 빙 둘러선 사람들 가운데 시간이 멈춰버린 듯 가만히 누워있는 할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소녀는 가득 주름진 할머니의 얼굴에서 수십 년 전 할머니의 엄마와 함께 기차에 오르던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을 보았습니다소녀는 가만히 가방을 열고 그 속에서 뭔가를 꺼내 할머니의 손에 꼭 쥐어 줬습니다그것은 어린 할머니가 기차에서 그토록 맛있게 먹던 감자였습니다그리고 소녀는 붉은 모자를 할머니의 머리에 씌웠습니다작을 것 같았던 붉은 모자가 할머니의 머리에 꼭 맞았습니다


 소녀의 눈에는 붉은 모자를 쓰고 조그만 손에 감자 한 알을 쥔, 방긋 웃는 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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