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만드는 생각

생각이 만드는 생각

생각이 만드는 생각.


군에 가기 전 잠시 공장에 일했던 적이 있었다. 그곳은 비닐하우스용 특수비닐을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내가 한 일은 비닐을 뽑아내는 기계 앞에서 비닐을 동그란 원통에 감는 일이었다.


원통은 저절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는데, 처음 감기는 동안만 잘 잡아주면 알아서 비닐이 감겼다. 일정한 두께가 되면 면도날 칼로 비닐을 재빨리 자르고 얼른 다른 원통에 감기도록 감아주어야 했다.


이때 잘못하면 기계 속으로 비닐이 말려들어가게 되고, 작업이 전면 중단되었기 때문에 주의해서 해야만 했다. 그렇게 감아놓고, 이미 감긴 비닐 원통을 빼내고 새로운 원통을 끼워 넣는 단조로운 작업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근무는 주, 야 2교대로 일주일씩 돌아가며 일을 했다. 주간 근무 때에는 점심시간 공장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아주머니들이 해주시는 밥을 먹었다. 하지만, 야간에는 아주머니들이 퇴근하시고 없었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막내가 식당에 가서 야식을 챙겨 와야만 했다.


식당에는 몇 가지 반찬들도 있었지만, 갓 들어온 신입 중에 음식을 맛있게 할 수 있는 직원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대부분의 야식은 라면이었다. 막내는 식당에서 라면을 끓여 김치와 밥을 챙겨 와야만 했다. 나 역시 처음 들어가 며칠 동안 식사 당번을 맡아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보다 어린 신입이 한 명 들어왔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으면 아무리 막내라도 라면 심부름을 시키기가 부담스러웠을 텐데, 나보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홀가분하게 식사 당번을 넘겼다.


한 사람이 빠지면, 그 사람의 몫만큼의 일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야 했기에, 식당까지 직접 가서 가르쳐주지는 못하고,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신입직원에게 야식을 어떻게 챙겨서 와야 하는지 설명을 했고, 신입직원은 알겠다며 식사를 챙기러 갔다.


시간이 흐르고 신입직원이 라면과 김치 그리고 밥을 챙겨 왔다. 잘 챙겨 올 수 있을까 조금 우려했었는데, 신입직원이 챙겨서 오는 모습을 보고서 나는 한숨을 돌렸다.


우리들은 라면 주위로 모여 앉았다. 그런데 라면을 끓인 냄비가 그동안 끓인 냄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찌그러진 냄비에 끓여왔는데, 냄비가 찌그러진 것이 꼭 옛날 느낌이 났다. 선배 직원들이 말했다.


“이야~ 신입. 이런 냄비는 어디서 찾았냐?”


“와~ 이렇게 찌그러진 냄비에 끓여 먹으니까 더 맛있네.”


찌그러진 냄비에 끓여서 더 맛이 나는 것일까? 막걸리 주전자도 일부러 찌그러뜨리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모두 라면을 맛있게 끓인 신입직원을 칭찬해가며 라면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라면을 먹기 시작했는데 공장장님이 아직도 일하시느라 오시지 않고 계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공장장님께 얼른 오셔서 라면이 붇기 전에 드시라고 말씀드리자 잠시 기계를 더 만지시다가 장갑을 벗으시고 옷을 탁탁 털며 이쪽으로 걸어오셨다

.

“어~ 라면 냄새 좋다. 출출한데 좀 먹어볼까?”


우리 쪽으로 걸어오며 출출한 배를 채워줄 라면을 반갑게 바라보던 공장장님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지더니 깜짝 놀란 목소리로 외치셨다.


“야! 왜 개밥그릇에 끓였어!”


그 정체불명의 찌그러진 냄비는 바로 공장에서 키우는 커다란 개의 밥그릇이었던 것이다. 그 말과 동시에 모두들 입속에 씹고 있던 것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국물을 뿜어내고, 면을 뱉어내고, 김치와 밥도 입속에 있는 건 모두 다 쏟아냈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벌어졌다. 맛있다고 칭찬할 때는 언제고 선배 직원들은 신입직원에게 한참 동안 욕을 쏟아부었다.


한참을 그렇게 음식을 뱉어내면서 욕지거리를 하다가 잠시 후 모두들 배를 잡고 웃었다. 비록 입을 버려서 야식을 먹지 못해 배는 고팠지만, 밤새도록 무료한 작업에 딱히 재미난 일도 없었던 터라 더욱 기억에 남는다. 이 기억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그 공장에 대한 어떤 것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이렇게 가끔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일들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추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쨌든 정말 신기한 것은 그토록 맛있다고 생각했던 라면이 공장장님의 그 말을 듣자 마치 개의 침 냄새가 라면에서 느껴지는 듯 한 착각이 들면서 입맛이 싹 가셨다는 것이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맛있게 먹고 있던 바로 그 라면인데 말이다.


감히 원효대사의 큰 깨달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 역시 그것을 계기로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이고, 내 생각이나 편견에 의해 조작되고 변형된 생각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있는 동네에는 은하사라는 곳이 있다. 영화 ‘달마야 놀자’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인데, 그 근처에는 영구암과 천진암이라는 두 곳의 암자가 있다. 어느 날 천진암에 들릴 기회가 있어 그곳에 갔다가 운 좋게 암자의 스님께 차를 한 잔 대접받게 되었다.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스님께서 차를 드시다가 갑자기 찻잔을 나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찻잔을 나에게 주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찻잔을 받았다. 스님께서 물어보셨다.


“지금 이 찻잔은 누구의 것입니까?” 나는 머뭇머뭇 거리며 말했다.


“저에게 주셨으니까... 제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잠시 후 다시 찻잔을 돌려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돌려드렸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이 찻잔은 누구의 것입니까?” 나는 또 머뭇거리며 말했다.


“스님께서 도로 가져가셨으니... 스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제가 이 찻잔을 드렸을 때, 이 찻잔을 받으시면 거사님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받지 않으시면 이것은 다시 저의 것이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많은 험담과 비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거사님이 받으시면 거사님의 것이 되지만, 받지 않으시면 그 모든 험담과 비난은 고스란히 했던 사람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 어딘가 글에서 봤던 내용의 이야기였지만 실제로 내가 그 상황을 직접 겪으니 와 닿는 느낌과 깨달음은 책에서 느꼈던 것과는 비할바가 못되었다. 나는 정말 스님의 그 말씀을 듣고 크게 깨우쳤다. 남들이 하는 모든 말들을 다 나의 마음속에 담을 필요는 없는 것이구나. 나의 마음의 빗장을 그런 비난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굳게 걸어놓으면 그것은 결국 그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필요한 충고나 조언에는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 없는 비난이나 험담까지 다 새겨 놓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내 마음에 담아놓고 새겨놓아야 할 좋은 것들이 너무나 많기에 그런 좋지 않은 것들까지 비집고 들어올 틈을 내어줄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삶은 좋은 생각과 좋은 말만 하고, 좋은 이야기만 담아놓기에도 너무나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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