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유
가게에 한 손님과 중학생으로 보이는 딸이 함께 식사를 하러 왔다.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주문을 하면서 밥을 빨리 달라고 했다.
최대한 빨리 내준다고 내주지만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음식을 하려면 꼭 필요한 시간이 있다. 스테이크를 빨리 내주고 싶어도 스테이크가 익는 시간이 필요하고, 돈가스를 빨리 내주고 싶어도 돈가스를 튀기는 시간이 필요하고, 스파게티를 빨리 내주고 싶어도 스파게티를 조리하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딸은 느긋해 보이는데, 엄마는 밥을 먹는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시간을 확인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빨리 밥을 먹어야 해서 그런지 둘 사이에는 대화도 거의 없었다.
밥을 후다닥 먹기에 후식으로 뭘 드실 건지 물어봤더니, 지금 시간이 없으니 커피와 주스를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서 달라고 했다. 그래서 준비를 해줬더니 계산을 하고 나가면서 손님이 한마디 했다.
“저희 딸 학원 시간이 다 되어서요.”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런데 뭐가 옳은 일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급하게 음식을 먹이고 굳이 학원을 보내는 게 맞는 일인지, 아닌지.
부모의 입장에서는 학원에 가기 전에 든든하게 저녁을 먹였다는 뿌듯함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화시킬 시간도 없이 쫓겨 가듯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우리 아이들도 학습지를 한다. 아이들이 매일 해야 하는 학습지의 양은 정해져 있다. 매주 금요일 학습지 선생님이 오시는데 그때까지 정해진 양을 해놓아야만 한다.
학습지를 매일 해야 하는데, 가끔 밀릴 때가 있다. 주말에 실컷 놀고 나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찔끔찔끔하다가 목요일이 되어서야 다음날 선생님이 오시는 걸 떠올리고 부랴부랴 학습지를 한다.
학습지를 풀다가 아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기 때문에 나와 아내는 아이들이 학습지 푸는 것을 도와주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날도 목요일이었다. 주말에 실컷 놀고서 밀려놨던 학습지를 하는데, 아들이 힘들다며 불평을 했다. 나는 한 손에 회초리를 들고 아들에게 똑바로 앉아서 학습지를 다 하라고 엄포를 놓으면서도 마음속으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밀려서 하다 보니 학습지를 다 끝내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맙소사!
이제 7살 먹은 아이가 한 시간 동안이나 앉아서 학습지를 다 풀어야만 하다니! 물론 매일 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그런 학습지를 지금 이 어린 나이에 해야만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TV에서 사교육 문제, 극성인 부모들의 이야기나 나올 때마다 나는 결코 아이들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공부를 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하고 싶은 걸 하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이 태어나고, 유치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게 되자 나 역시 어느새 똑같은 부모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지만, 주위의 모두가 다 시키는 것을 우리 아이에게만 시키지 않는 것은 부모로서의 무책임과, 방임이 되어버렸다.
학습지 선생님들은 학습지를 시키지 않는 부모들을 아이들에게 도무지 관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들처럼 만들어버렸고, 아이를 망치는 부모로 만들어버렸다. 학원 선생님들은 학원을 보내지 않는 부모들을 능력이 없고,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규정해 버렸다. 물론 모든 학습지 선생님들과 모든 학원 선생님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상담을 할 때 은근히 그렇게 말을 함으로써 나쁜 부모가 되지 말라고, 학습지를 하고, 학원을 보내서 좋은 부모가 되라고 말한다.
그들은 아이들은 하얀 도화지와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예쁜 그림을 그리느냐는 부모가 도와주기 나름이라고 한다. 나 자신의 일이면 그런 도화지 필요도 없고, 쓸 일도 없다고 외쳐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식의 일에는 차마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니라는 생각을 계속하면서도 남들이 다 하니까, 다른 아이들도, 다른 집에서도 다 하니까 우리 아이들에게도 시킨다. 나는 비겁한 놈이다. 용기가 없는 놈이다. 남들이 다 하니까, 다른 아이들도 하니까 우리 아이들에게도 시키는 그런 못난 부모다.
러시아의 임금은 우리나라의 임금보다 무척 적다. 그런데도 그들은 대부분 다차라고 불리는 별장을 가지고 있어서 주말에는 가족들이 다 함께 다차에서 머물며 시간을 보낸다. 그 별장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작고 허름한 창고 같은 곳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곳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다차는 낡고 오래된 집 같은 분위기가 난다. 그들은 다차가 어떻게 보이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차가 화려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보기에 웅장하고 멋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곳에서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만약 다차 문화가 있다면 우리는 다차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할까 아니면 남들에게 보이는 다차의 겉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