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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나무 Nov 25. 2024

16. 배우자를 잃은 기분이 어떠냐고

아버지는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기집애를 무슨 서울까지 대학 보내냐 했을 때도, 딸이라도 합격하면 보내야지 하고 편을 들어주셨다. 삶의 모든 길목에서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걱정 마라, 내가 있다”며 당신은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돈봉투를 건네셨다. 그런 아버지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서 결국 한마디 말도 듣지 못하고 보내야만 했었다. 그 황망함,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죄송함, 그리움, 그 모든 감정이 뒤범벅되어 힘들었었다.      


그가 암이라고 했을 때, 혹시나 그가 나를 떠나게 된다 해도 아버지처럼 갑자기 아무 말도 나누지 못하고 보내진 않으니 나은 거라고, 마지막을 함께 준비하고 보낼 수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감히, 감히 자위했었다.      

사회적인 절차대로 그의 떠남을, 찾아와서 아파하고 아쉬워할 수 있게끔 지인들을 맞는 장례식을 치른 후, 결국 그는 화장터에서 작은 단지 하나가 되어 내게 왔다. 장례식 때는 손님을 치르느라 울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보통은 화장터에서 장지로 바로 가겠지만, 그가 가기로 했던 묘지의 상황이 녹록지 않아 며칠 기다리라고 했다.

작은 유골함이 된 그를 안고 집으로 왔다. 처음엔 그냥 두고 보다 밤에는 껴안고 잠을 잤다. 집에 계속 두면 안 될까 생각했다. 아마 며칠 더 함께 보냈다면 그의 유언이고 뭐고 그냥 집에 뒀을지도 모른다. 결심하기 전에 준비가 됐다며 유골함과 영정을 갖고 오라고 했다.

겨울이라 땅이 너무 굳어서, 제대로 묘를 세우기 힘들다고 일단 친구 가족들과 함께 가묘를 했다. 정신도 마음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절차에 따라 흘러가고 있었고 내 입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나왔지만 머리로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유골함만 땅속에 묻고 영정사진만 가지고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일이 깔끔하게 마무리되고 그의 유골함마저 내게서 사라지자, 그제야 그가 정말로 나를 떠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가져본 적 없는 깊은 분노가 들끓었다. 분명 우리가 함께 죽음을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이고 신이고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육종암이 걸릴만큼 그에게 스트레스를 줬던 모든 환경들과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다가 마침내는 내게서 그를 앗아간 그마저도 비난했다. 그가 내게 한 마지막 말이 “자기야, 나 너무 쪽팔려”라는 것에도 분노했다. 이 말이 내가 들었어야 하는 마지막 말이냐며, 어떻게 이렇게 갈 수 있냐며 혼자서 미친년처럼 발악했다. 내게 남길 말이 그것밖에 없었냐며, 묘비에 내 이름도 지워버리고 묘지에도 절대 안 가겠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차피 마음대로 떠나버린 건데 내가 어떻게 하건 뭔 의미냐며 울다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가 시골집을 빌려둔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아파트였다면 신고당했을 거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리처럼 반짝이는 꽃들로 가득 찬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빛나는 공간에 그가 서 있었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심하게 아프고 나서는 들어보지 못했던 다정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자기야 ~”라고 불렀다. 겨우 세 음절이지만 그 속에 모든 마음, 미안하고 고맙고 걱정되고 그 모든 마음들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그러면서도 애정이 잔뜩 묻어있는 너무나 다정한 그의 목소리.  


아... 다행이다. 그는 이제 편안하구나. 그 모든 지옥 같은 통증에서 벗어나 이제 평온해졌구나. 그를 괴롭혔던 모든 것들로부터 이제 해방되었구나, 이렇게 내게 마지막 말을 들려주는구나, 참 좋다고 꿈에서나마 생각했다.      


그런 꿈에서 깬 다음, 내가 편해졌을까. 설마. 그러지 못했다. 그가 안식을 하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그가 없는 고통은 오로지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

     

여전히 어쩔 줄 모르는 슬픔 속에 있던 내게 친한 친구가 전화를 했다.

“배우자를 잃고 나면 어떤 느낌이야?”     


솔직히 이 질문을 들었을 때는, 친구가 맞나 하고 생각했었다. 물론 상황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도 불치병이므로, 아마 굉장히 조심스럽게 물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입조차 열 수 없었다. 무언가 압도적인 것이 나를 누르고 있는데 그걸 몇 마디 말로 어떻게 표현하라는 건가. 머릿속으로 화만 메아리쳤다.      


그가 떠난 지 2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이제 조금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비슷한 상황에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괴물이 몸의 일부를 섬세함이라곤 하나도 없이 뜯어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몸은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은데 그냥 너덜너덜 찢겼다. 그래서 몸의 어디는 피가 흐르고 어디는 신경세포가 망가졌고, 어디는 근육이 찢어졌고 또 다른 어디도 문제가 있겠지만, 나는 정확히 어디에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모르는 채 여전히 살아있다. 심장이 멈추진 않았으니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뜯기지도 않은 거 같은데 심장이 계속 아프다. 생리학적으로는 살아있는데 별로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 한 번씩 숨이 턱턱 막혀서 가슴을 두드려줘야 한다. 어딘가 아픈 것도 같은데 어딘지도 모르겠다. 뇌에도 뭔가 손상이 왔는지 기억이 오락가락하고 그와 함께 갔던 곳,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보며 그곳에 가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미친 생각도 한다. 그 상태로 평생 울었던 모든 울음보다 몇수십배 더 많이 애가 끊기듯이 울어댄다.


어떤 이들은 잠을 자지 못한다고 호소하기도 하는데 나는 시골집에서 혼자 울다가 지치면 잠들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잠시 멀쩡한 듯 보이다가 그들이 떠나고 나면 다시 정신 나간 것처럼 지낸 것 같다. 그가 갔었던 산을 오르고 그의 사진에 등장하던 곳이 어딘지 찾아보고, 그가 읽던 책에 밑줄 그은 곳을 찾아보고, 그의 옷을 입고 그의 목도리를 하고 다녔다. 매일 묘지를 가면서도 그가 내 옆에 없다는 것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가 있다지만, 내가 볼 때는 그 단계가 도돌이표처럼 다시 돌아오는 것 같다.      


어쩌면 지금도 그가 죽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지도.  

그는 저 멀리에서 내게로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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