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 서울 지하철 1호선

by 산너머

서울 도심의 도로는 맨날 파헤쳐져 있었다. 버스를 타고 종로 쪽으로 출퇴근을 하려면 철판 위를 곡예하듯이 굴러갔다. 차창에서 내려다본 땅 밑은 강처럼 깊었다. 그 아가리 속으로 빨려갈 것 같았다. 무섭지 않았다. 재미와 스릴이 교차했다. 서울 어린이 대공원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겁나 재미있는 놀이기구가 있다고 했는데, 그런 아찔한 재미가 있는 곳. 여긴 1970년대 서울 한복판이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내내 철판 위로 철커덩 철컹 내달렸다. 가다가 서고 가다가 회전을 틀 때면 아슬아슬했다. 그 긴장감으로 복잡한 일이 생기면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청량리역까지 갔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 딱 한 번 남자를 만났는데, 이 남자가 범죄자는 아니지만 다혈질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이성, 친구가 아닌 애인이 요지경이었다.

산만 보고 자란 스물한 살짜리 여자는 이 남자를 만나 끌려다니기도 하고, 패대기치기도 하고, 꼬꾸라지기도 했다.

이 남자는 내가 여자이길 강요했다. 강요당하기 싫어 피하면 나를 두들겨 팼다. 견디다 못해 헤어지자고 하면 길거리든, 골목에서든 갈비뼈가 부러져라 때렸다.


엄마는 욕은 했어도, 오빠한테 고자질은 했어도 때리진 않았다. 오빠가 때리긴 했지만. 오빠가 때리는 거 하고 애인이 때리는 거 하곤 기분이 전혀 달랐다. 오빠는 나만 때린 게 아니고 언니, 동생을 다 때려서 공평했는데, 이 남자는 나만 때려서 그런가 불공평했다.


남자를 피해 직장이 있는 곳에서 청량리로 가는 버스를 올라타길 여러 번. 공사 중인 지하철 1호선은 내 청춘처럼 위태로웠다. 오빠는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이 남자는 죽이고 싶었다. 실제로 죽이려 한 적은 없고 같이 죽자고는 했다. “물에 빠져 같이 죽자!” 핏대를 세우며 덤볐다.


같이 죽으려고 청량리역에서 경춘선을 탔다. 강촌에서 내려 제일 깊은 곳을 찾아가 동반자살을 하자고 꼬드겼다. 강촌역에서 내리면 바로 강이 보였다. 강 건너편을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했다. 다리 중간에 시꺼먼 강이 보였다. 남자와 나는 중간에 서서 밑을 내려다봤다. 지하철 1호선 철판 밑은 안 무서웠는데 여긴 무서웠다. 버스를 타고 다닐 땐 긴장감이 넘치고 심장이 창자쯤 내려갔다 올라붙으면서 호기심이 일었는데, 다리 밑은 창자고 뭐고 다리가 벌벌 떨리고 스물한 살의 청춘을 여기다 받치기가 아까웠다. 남자랑 다리 위에서 강물만 내려다보다가 경춘선을 타고 청량리역으로 되돌아왔다.


남자는 사진 찍는 게 취미였다. 현상 인화까지 했다. 산, 강, 나무 그딴 것들을 찍으면서 나를 찍어 눌렀다. 이유는 단 하나 자기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여성스러워야 한다고 강요를 했다. 나는 지고지순한 편이긴 한데 강요는 싫었다. 명령하거나 억압을 하면 그 자리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와 버렸다.

남자에게 버스정류장까지만 바래다 달라고 하고 동생과 사는 우리 집은 알려주지 않았다. 몇 번 만나고 보니 알려주면 안 될 것 같았다. 당연히 고향도 알려주지 않았다. 전라도 솔참시까지만 진짜였고, 면, 리는 엉뚱한 곳을 알려줬다. 나는 순수한 맹탕 같아도 거짓말을 잘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도망치듯 헤어졌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잠적해 버렸다. 말이 굴렀다는 말구리 고개를 넘어 화전 밭으로 은둔했다.

엄마는 지겹다는 말을 달고 살아도 욕은 안 했다. 오빠 눈꼬리가 찌그러져도 이젠 나를 때리지 못했다. 욕을 하려고 하면 냅다 소리를 질렀다. 눈치를 주면 집에서 나와 냇가 뚝방 길을 걸었다. 밥은 먹여주고 잠잘 곳이 있는 고향이 안식처였다.

그 시절엔 오빠처럼, 그 남자처럼 여자를 패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들이 많았다.


한 남자를 만나고, 폭력에 시달리고, 도망치고, 은둔하고. 성질에 안 맞아 직장을 여기저기 옮겨다니 다 보니 1974년 8월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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