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민기를 추모하며
나의 청춘 빈 곳을 메워주었던 그가 세상을 떠났다. 자유, 민중, 민주의 의미를 제대로 모른체 젊은 혈기로 그리해야만 젊은 지성인으로서 당연시 되던 시절, 그가 70년에 자작곡으로 처음 불렀던 '아침이슬'은 내 가슴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는 독재가 일상이던 시절, 대학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도 최고의 대학에서, 하지만 그의 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었다.
서울대 회화과 1학년 1학기를 마친 후 그의 마음을 채운 것은 노래였다. 평소 독학으로 배운 포크기타를 붓대신 들었다.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듀오를 결성하고, 명동에 생긴 '청개구리'라는 놀이터에서 노래를 시작하였다. 당시 명동에는 '쎄시봉'이란 포크송 가수들의 터전이 있었다. 모두들 잘 알듯이, 그곳엔 윤형주, 송창식, 조영남 등이 활동하였지만. 그들은 자작곡을 부르지 않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외국 번안곡들을 부르며, 당시의 젊은이들의 반항정신을 잠재우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있었다.
당시 외국 번안곡에 반대하며 자작곡으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청개구리'라는 터전으로 모여 들었다. 김민기는 그 곳에서 러닝차림으로 1970년에 '아침이슬'을 자작곡으로 발표한다. 이 곡을 필두로 '상록수', '작은연못' 등을 작곡하고 직접 부르며, 오늘날까지 학생운동의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사실, 김민기는 노래가 좋았을 뿐이다. 당시의 상처받고, 우울한 같은 또래들의 아픔과 슬픔을 노래로 표현하고자 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노래가 학생운동의 대표곡으로 불리우며, 독재에 저항하는 세력의 배후로 낙인 찍인다. 그의 삶을 보면 오히려 자유롭고, 평온한 함을 살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소박하게 사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래서 그는 늘 뒷전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편하게 두지 않았다. 그가 작곡하고 불렀던, '아침이슬'은 그를 공안당국의 표적으로 만들었고, 모진 고문으로 그의 삶과 정신을 짓밟았다.
나는 그 당시에는 몰랐다. 내 젊음이 뼈속까지 저항정신으로 꽉꽉 채워져 있을 때는 그는 독재에 저항하는 세력의 배후로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노래 '아침이슬', '상록수', '작은연못', '늙은 군인의 노래' 는 강렬했다. 마치 그의 정신세계는 모든 젊은 지성들에게 반항하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학생운동을 할 때, 그의노래는 수백만번 불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오히려 배신자로 낙인 찍이기도 했다. 정말 억울한 삶이 아닐 수 없다. 공안 당국으로부터는 저항세력의 배후로, 데모하는 세력들에겐 소극적으로 대응해 배신자로 낙인찍혔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는가
그가 꿈꾸던 세상은 따로 있었다. 바로 대학로에서 1991년부터 문을 연 소극장 '학전'이다. 그는 그곳에서 젊은 무명 배우들과 함께 '지하철 1호선'이란 뮤지컬을 2023년까지 8천회 이상 올리며, 뮤지컬 배우들의 성지로 만들었고, 김광석, 윤도현, 나윤선, 정재일 등 수많은 스타 가수들을 배출하였다.
그는 뒷전에서 조용히 문화적 갈증을 풀어주는 조연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정치하는 세력들이, 선동하는 세력들이, 앞장서기를 업으로 하는 세력들이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그런 수많은 악의 세력들로부터 받은 스트레스가 위암이란 지병을 유발하였고, 비교적 젊은 나이인 73세에 생을 마감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나의 젊은 시절, 내 문학적 갈증을 채워주고, 나의 청춘과 함께 했던 김민기님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좋은 세상에서 마음 편히 원하는 것 맘껏 누리고 보내시길 바랍니다. 나의 젊은 날 같이 해줘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