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爲而無不爲
배움을 행하면 지식은 날로 늘어나고
도를 행하면 지식은 날로 줄어든다
줄이고 또 줄여 하지 않음에 도달한다
하지 않음으로써 행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천하를 취할 때는 항상 일을 벌이지 않으면서 그렇게 한다
일 벌이기를 좋아하면 천하를 취하기에 부족하다.
- 도덕경 48장 -
2025년 을사년이 시작되었지만 우리에게는 구정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어 또 한번의 새해를 맞이하며 각오를 다질 수 있어 좋다. 바쁘게 한해를 마감하고 서둘러 새해를 맞이하다 보니, 미쳐 준비를 하지 못하고 어수선한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다가오는 구정을 깃점으로 새로운 생각과 각오를 준비 중에 있다. 그 중에 올 한 해를 보내며 좌우명으로 삼을 문구를 찾던 중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글귀가 있어 의미를 되새겨 보고 있다.
"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 "
노자의 도덕경 48장에 있는 말로 ‘한 것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고전을 통해 선인들이 남긴 말들은 해석하는 사람들의 처지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그 전에 말한 것을 해석하면 ‘僞學日益(위학일익)’ 배움을 행할수록 날로 늘어나고, ‘爲道日損(위도일손)’ 도를 행할수록 날로 줄어든다란 말이다. 배움을 통해 지식이 날로 쌓이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배움의 목적은 세계와 사물에 대한 지식, 즉 사회적, 실용적 목적을 가진 지식을 배우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욕망의 충족과 자신을 꾸미는 일에 힘쓴다. 물질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지식을 배우고 탐구함에 따라 그의 지식은 날로 늘어나지만, 더불어 오만과 편견 그리고 선입견만 쌓인다. 오직 자신만이 이 세상의 중심이고, 타인과 공공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다.
반면에 ‘爲道(위도)’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천지만물 즉 자연의 총체성에 대한 통찰,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서고, 감각적 욕구가 초래하는 왜곡된 인식을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노자가 말하는 지식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道(도)’를 아는 것이다. 자연성과 근원성을 망각하는 단편적 지식의 확대, 즉 시야가 좁은 지식이 오히려 총체적인 통찰을 얻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우리 속담의 ‘아는 것이 병이다’라거나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바로 그런 경우를 경계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전체는 모르고 부문만 알기 때문에 그 앎이 편견으로 작용하여 오히려 제대로 된 앎을 방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이치,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기존에 가진 부분적 지식 혹은 편견과 선입견을 점차 줄여나가는 배움을 해야 한다. 새로운 이해와 총체적 지식 획득을 방해하는 기존의 편견과 선입견을 하나씩 내려놓지 않으면 새로운 관점이 들어설 자리가 남지 않는다. 먼저 자기가 가진 작은 지식, 편견, 선입견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어제 우리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에 대한 법정구속이 현실이 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더불어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무법적인 난동과 폭력을 볼 수 있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응원봉’을 들고 나와 평화적이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뜻과 의지를 표출하는 젊은 친구들의 시위문화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런 모습들의 근원적인 것은 얄팍한 지식과 편향적인 지식의 축적에서 나온 편견과 선입견이다. 올바른 지식의 축적은 나이와 시간에 비례되지 않는다. 잘못된 지식에서 오는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기 위해서는 제대로된 배움을 해야 한다. 아니 그 전에 잘못된 지식을 버리는 것부터 해야 할 것이다.
‘爲道(위도)’는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수 있는 지식의 잔재물을 비우고 또 비우고, 버리고 또 버리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無知(무지)’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무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근원을 ‘아는’ 것이다. 그런 근원적인 총체성에 입각한 행동이 ‘無爲(무위)’다. 존재의 근원 통찰과 통찰적 인식 활동을 통해 ‘무지’와 ‘무위’에 도달하고, 피상적 지식을 넘어서는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 통찰의 뒷받침이 있어야만 존재의 깊이에 다가가는 진정한 활동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올 해 삶의 좌우명을 ‘무위이무불이’로 삼았다. 어리석인 지식과 편견, 선입견이 생기지 않도록 묵은 지식을 버리고, 면벽을 통해 구체적 사물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것, 진정한 근원으로 마음을 돌릴 수 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고 또 쓰여 있지 않은 벽을 바라보아야 비로소 사물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고, 이미지를 넘어서 사물의 근거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즉 기존에 가진 단편적 지식의 방해를 넘어서, 무념으로 근원을 통찰하는 것이 ‘위도’이다.
그 이후에야 새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고, 일을 행함에 못할 일이 없을 것으로 본다.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지식의 함정에 빠져 선입견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한들 무엇을 그리 많이 알 수 있겠는가? 뛰어봐야 벼룩이라고 우리는 세상을 총체적으로 알 수 없다. 세상의 복잡함은 인공지능같은 어떤 탁월한 기계를 사용해도 절대로 다 알 수 없다. 무엇을 안다고 자만하는 순간, 자신의 작은 총명에 우쭐하는 순간, 우리의 앎은 지독한 선입견이 되어버린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근거에 대한 통찰력, 즉 메타인지 능력이다. 메타인지는 차라리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일 수 있다.